「피프티 피플」 정세랑
오늘의 책인 「피프티 피플」 은 약 50명의(제목은 피프티 피플이지만 실제로는 50명 플러스 알파가 된다고 한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볼 수 있는 소설이다.
목차도 각 이야기의 주인공인 사람들의 이름으로 되어있는데, 퍽 인상 깊은 목차였다.
정말 제목대로 50명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건 줄은 몰랐다. 한 사람의 인생을 보는 것도 벅찬데,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려니 약간은 버거웠다. 한 편으로는 여러 삶을 겪어본 경험이 신기하기도 했다.
어렸을 땐,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게임 속 NPC 같은 개념으로 이해했다. 이 세상의 주인공이 '나'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뭐 어쨌든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내가 맞으니깐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나를 제외한 사람들이 NPC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었을 때,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신기했다. 사실 지금도 신기하다고 생각한다. 다들 저마다의 생각이 있고 인생이 있다는 것을 한 번 더 되새기면, 타인을 더 배려하게 되는 듯했다.
작가님의 말을 인용하자면, 「피프티 피플」은 주인공이 없는 또는 모두가 주인공인 책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의 인생을 엿본 건 거의 처음인 듯했는데, 사실 나는 다른 사람이 뭘 하든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편이다. 사람에게 데여볼 만큼 데여봤다고 생각하기에 더 상처받지 않기 위한 나만의 작은 방어 법이다.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스트레스 관리에 좋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관심을 쏟는 만큼 나의 에너지가 쓰이기에 이 책은 여러 번 끊어 읽게 됐다. 한두 명의 이야기만 읽어도 피곤함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 인생에도 그렇듯 몇몇은 그냥 지나쳐가기도 하고, 몇몇은 주의 깊게 보며 실제 있는 사람인 양 나와의 관계를 넓혀갔다.
소소하면서도 소소하지 않은 것 같은, 내가 살아보지 않은 인생을 경험해 볼 수 있어 특(이)별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각 스토리의 주인공은 다르지만 세계관이 이어져있어 곳곳에 숨겨진 연결고리를 찾는 재미도 있으니, 정세랑 작가님의 책이라면 그냥 믿고 읽어보길 바란다.
정세랑 「피프티 피플」 84p
숨은 얘기를 더 물어주기를 기다린다.
자극적인 요소 없이 이야기를 재밌게 풀어가는 것도 작가님의 역량이 아닌가 싶다. 정말 실제로 있을 법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더 와닿은 이야기였다. 그리고 브리타의 귀여운 모먼트가 기억에 더 남은 듯했다.
나만의 경험을 한 후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알려줄 때, 약간은 설레며 상기된 모습으로 상대방의 질문을 기다릴 때가 있다. 숨은 얘기를 더 물어주기를 바라는 순간이 꽤 있는데, 그 모습이 상상돼서 가벼운 웃음이 나왔다.
정세랑 「피프티 피플」 92p
선미의 발에 물기가 완전히 마를 때까지
계속 계속 춤을 췄다.
기억 한구석에 남아있는 장면인데, 아빠인지 엄마인지 남친인지 아니면 세 명 다 인지 자세히 떠오르진 않지만 나도 누군가의 발에 올라가 춤을 췄던 기억이 있다.
티비에서 본 장면을 내 것이라 착각한 건가 의심되긴 하지만, 내 경험으로 믿으려 한다. 몽글몽글한 감정이 그대로 느껴져 인상 깊은 구절이라 생각했다. 기억을 사실로 확실히 하기 위해 다음에 만나면 그의 발에 올라타 춤을 춰야지.
정세랑 「피프티 피플」 95p
부모님이 시간차를 두고
세상을 버렸던 병원이 나왔다.
작가님의 모든 글을 좋아한다 다짐할 수 있었건만, 여기에 나온 "세상을 버렸다"라는 표현은 무척이나 불편했다. 처음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들을 칭하는 건 줄 알았는데, 그것과 상관없이 이 세상에 없는 사람들을 모두 통칭하는 표현이었다. 세상이 그들을 버린 건 아닐지 곱씹게 됐다.
이 문장을 계속 계속 되새겨보았는데, 우리가 삶의 주체로서 세상을 져버린 것도 우리의 의지로 했다는 의미가 담긴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세랑 「피프티 피플」 122p
어떻게 알았을까?
아마도, 눈만 보고.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그 감정이 티가 나기 마련이다. 상대방이 나를 바라봐 주는 눈빛에서 사랑을 느낄 때만큼 기분이 좋은 순간이 또 있을까? 있긴 하겠지만 그만큼 행복하다는 거지~
암튼 제3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도 좋아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눈은 알아챌 수 있기에 눈만 보고 좋아하는 사실을 깨달았을 거라는 추측이 꽤나 사실적이면서 귀여워 보였다.
정세랑 「피프티 피플」 294p
닥터 헬기라는 게 생기는 거 알아요?
「피프티 피플」 이야기를 보다 보면 의료계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는 걸 알 수 있다. 직업도, 상황이 발생할 때도 병원과 관련된 순간이 자주 나왔다. 닥터 헬기 얘기도 그중 하나였는데, 최근에 넷플릭스 드라마 <중증외상센터>에서 봤던 거였기에 괜스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책은 2017년에 쓰인 건데 2025년에도 닥터헬기를 다루는 드라마가 나왔다니, 작가님의 선견지명이 보이는 듯했다.
정세랑 「피프티 피플」 331p
가장 경멸하는 것도 사람,
가장 사랑하는 것도 사람.
그 괴리 안에서 평생 살아갈 것이다.
인생은 정말 그런 것 같다. 사람과 있어 힘들지만, 사람과 있어 행복하다. 아이러니한 괴리 속에서 우리는 평생을 살아야 할 것이다. 살 만큼 살아봤다고 미련 없을 나이는 아니지만, 그동안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나를 다져냈다.
지금은 그중에 나와 잘 맞는 사람들만 남아있지만, 배신도 당해보고 미움도 받아보고 관계도 끊겨보면서 영혼과 마음이 많이 다쳤다. 그래서 사람들과 가까이하는 게 더 어려워졌다. 하지만 그만큼 나를 사랑해 주고 보듬어 주고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사람들도 있다. 그 소중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잘 이어나가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정세랑 「피프티 피플」 359p
평범하게 불행한 주부의 삶이라
하는 게 더 맞겠다.
'평범'과 '불행'이라는 단어가 함께 쓸 수 있던 것이었나 어색한 느낌이 들었지만, 이보다 더 잘 설명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 시절 당연하게 여겼던 불행함이 담담하면서도 먹먹하게 들려오는 듯했다. 그저 평범하게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에피소드인 <그리고 사람들>에서는 새롭게 등장한 인물도 있었지만 그동안 바라봤던 각 삶의 주인공들이 한 데 모여 문제를 헤쳐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세계관이 연결되어 있는 만큼 한 공간에 모인 그들이 반갑게 느껴졌다.
「피프티 피플」은 '나'를 그저 '나'답게 바라봐 주는 것 같아서 오래도록 미지근하면서도 무심한 듯 다정한 소설이다. 정말 어디선가 이 인물들이 삶을 살아가고 있을 것만 같은데, 나도 그들과 함께 평범하면서 소중한 일상을 살아가야겠다고 소소한 다짐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