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차별, 외모차별
10년 전쯤 처음으로 서양나라인 영국, 프랑스, 스위스로 배낭여행을 갔다. 그때 특히 영국에서 인종차별적 놀림을 많이 받았다. 런던의 테이트모던 박물관에 갔는데 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내게 와 손가락으로 눈을 찢으며 내 얼굴을 놀려댔다. 당황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가만히 그 애들을 쳐다볼 뿐이었다. 거리에서 '칭챙총'이라는 소리도 꽤나 들었고 어딜 가나 '니하오'라고 했다.
요즘은 과거에 비해 한국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고 다름에 대한 포용력도 높아진 것 같다. 하지만 이건 비단 해외의 이슈만은 아니었다. 외모에 대한 놀림은 내가 나고 자란 한국에서도 만만치 않았다. 내 눈은 눈꼬리가 올라갔다. 나는 내가 친구들과 조금 다르게 생겼다는 걸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만 해도 전혀 몰랐다. 초등학교를 입학해 처음 반에 들어갔던 날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반에 도착해 뒷문을 열었는데 마침 문 뒤에 서 있던 남자애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더니 내게 두 손으로 눈꼬리를 올리는 흉내를 냈다. 그때 나는 처음 알았다. 내 눈꼬리가 올라간 것이 놀림감이라는 것을.
그 뒤로 중학생까지 약 9년간 빈도만 다를 뿐 틈틈이 올라간 눈에 대한 놀림을 받았다. 놀림을 받을 때마다 내가 어떻게 대응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대부분 놀림을 고스란히 받는 쪽이었다. 커서는 깨달았지만, 그때만해도 나는 놀림과 상처가 별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몰랐다. 놀림을 받는 횟수만큼 나의 상처의 깊이도 깊어갔다.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에는 매일 일기를 쓰고 담임 선생님께 짧은 코멘트와 함께 도장을 받곤 했는데, 한 번씩 내 올라간 눈 때문에 놀림을 받아 속상하다는 일기를 쓸 때면 선생님은 '선생님이 볼 땐 얼마나 개성 있는 눈인데!' 라며 코멘트를 남겨주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 코멘트틀은 별로였다. 그리고 그 코멘트를 읽었던 어린 나이에도 개성 있다는 말은 못생겼다의 좀 우회적인 말이라고 여겨졌다.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월드컵과 이천수
2002년 월드컵이 열리던 여름이었다. 모두가 월드컵 신화에 열광했다. 친구들과 함께 롯데월드에 놀러 갔는데, 늘 그렇듯 놀이기구에 탑승하려는 줄이 한참 길었다. 친구와 두줄로 줄을 서 있었는데 내 바로 뒤에 있던, 나보다 고학년인 것 같아 보이는 남자애가 내 얼굴을 보더니 "이천수 닮았다. 불쌍하다."라고 말했다. 축구선수 이천수의 눈매와 내 눈매가 비슷해 보였던지 그런 말을 했던 것 같은데, 그 말이 사춘기 소녀였던 내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였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내 외모를 보고 불쌍하다는 소리를 듣는 것은 너무나 충격적인 것이었다.(이천수 선수는 죄가 없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 사실을 모르는 내 옆의 친구에게도 나는 말하지 못했다. 롯데월드도, 놀이기구도 다 소용이 없었다. 놀이기구를 타는 둥 마는 둥 하며 그날 하루를 그렇게 망쳐버렸다.
그날의 사건은 내게 큰 후유증을 남겼다. 그때부터 한동안 누군가의 눈을 보는 게 두려웠다. 나를 놀릴까 봐 두려웠다. 어딘가 의기소침해진 나를 가족도 알아채지 못했고 나 역시 이 일을 공유하고 싶지 않았다. 가족에게 공유한다고 해서 정신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을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외모에 대한 놀림으로 엄마에게 하소연하면 엄마는 나보다 더 가슴 아파했지만, 그 당시 내게 필요했던 자존감과 용기를 일깨워주지는 못했다. 아마 당신 역시 그런 놀림을 감내하기만 하며 살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대학생 때 쌍꺼풀 수술을 했다. 내 눈 생김새가 수술을 하기 조금 어려운 형태라며 부분 마취만 한 채 수술을 했는데, 가장 예민한 눈 가장자리로 느껴지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의사는 울면 안된다고 계속 얘기했지만 울고 싶지 않아도 내 신경이 고통을 느끼자 자연스럽게 눈물을 줄줄 흘렸다. 수술하는 그 순간에도 나는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런 고통을 감당해야 하는 거지?'라는 원망이 들었다.
눈에 줄 하나 긋는다고 눈이 드라마틱하게 달라진 건 아니었지만 쌍꺼풀이 생기니 이전보다 눈이 덜 올라간 것처럼 보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를 꾸미는 법도 알게 되고 크고 작은 일을 해내면서 자기 효능감과 자긍심도 키워갔다. 세상의 잣대도 조금 달라졌다. 아름다움의 범주가 확장된 듯하고 다름에 대한 것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분위기가 되었다. 자연스럽게 나는 언젠가부터 외모의 굴레에 나를 가두지 않게 되었다.
한국에서 온 아이돌?
유년시절의 보상이라도 받듯 서른 살이 넘어서는 주위로부터 외모에 대한 긍정적인 얘기를 많이 듣는다. 회사 동료와 선후배로부터 줄곧 '동인이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미국에 오니 내 개인적인 동안의 기질에 동양인이 갖고 있는 동안의 유전자가 더해져 뉴욕에서 만난 사람들은 내가 굉장히 어리다고 생각했다.
어학원에서 30살 이상의 성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반에서 수업을 들었는데 나를 모르는 어학원의 선생님들은 내게 왜 성인반에 있냐고 물은 적도 있었고,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가면 학생 요금인지, 성인 요금인지를 질문받곤 했다.
서점에 갔는데 교복 입는 흑인 소녀가 내게 다가와 "정말 예뻐요."라고 말한 적도 있다. (난생 처음 들어본 칭찬이라 이렇게 기록으로 남긴다.) 어학원의 내 담임선생님 조나단은 내가 졸업할 무렵 "너를 처음 봤을 때 아이돌인지 알았다."며 민망한 과찬을 했다. 조나단은 50대 아저씨라서 마치 내가 십대 학생들을 보면 다 예뻐 보이듯이 나를 후하게 칭찬했을 것이다. 미국의 비만 정도는 한국의 비만 정도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심각하다. 보기에도 건강이 위험해 보이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니 작고 마른 체형의, 한국의 세련된 패션을 선보이는 내가 조나단에게는 그렇게 보였을 것 같다.
어학원 같은 반 친구 짜이쉬안 언니는 나를 처음 보자마자 한국인이라는 걸 알았다고 했다. 같은 나라 안에서는 세분화하여 서로의 외모를 평가하려 하지만, 다른 나라의 사람이 보기에는 결국 한국인이라는 하나의 카테고리 안에 묶여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외모는 평가의 요소가 아닌, 상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그 사람의 정체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풍기는 분위기와 느낌, 취향 이 모든 것이 얼굴, 헤어스타일, 패션, 태도에서 드러난다. 그래서 우린 함부로 그 사람의 외모를 평가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뉴욕에서 느낀 수백만 가지의 즐거움 중 하나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있던 어학원 반에는 멕시코, 스위스, 프랑스, 대만, 중국, 체코, 스페인, 독일 그리고 한국 총 9개 국가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매일 아침 학원에 꾸미고 온 모습을 보는 것도, 수업에 참여하는 방식을 보는 것도 흥미로웠다. 멕시코에서 온 친구는 내가 하는 얘기를 듣다가 공감이 가면 꼭 눈을 찡긋하며 동의한다는 신호를 보내는가 하면, 프랑스에서 온 친구는 만날 때마다 유럽식 인사인 비쥬를 해서 나는 당황하지 않은 척을 하곤 했다.
미국에 동양인도 많고 한국의 위상도 많이 높아지고 이른바 K문화에 많이 친숙해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맨해튼을 혼자 걷다 보면 호기심 어린 시선을 받곤 한다. 하지만 놀림이나 경멸의 시선이 아닌 다름에서 오는 관심과 얕은 호기심이라는 걸 안다. 10년이 지난 지금의 런던이 어떤 모습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다양한 인종이 모여 살고 있기에 모두를 '그러려니'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뉴욕이 오히려 편하고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