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이라는 매력
10년 전쯤 영국 런던에 갔을 때 뮤지컬 <라이언 킹>을 봤다. 어렵게 아르바이트하며 모은 돈으로 떠난 런던 여행에서, 뮤지컬 하나쯤은 꼭 보고 싶었다. 스토리가 익숙하고 영어 대사를 이해하는 데 비교적 쉬워 보이는 <라이언 킹>을 선택했다.
오래전 일이라 공연에 대한 기억은 희미하게 남았지만, 관객석의 풍경만큼은 내 기억에 선명히 남아 있다. 내 바로 앞줄에는 등이 파인 근사한 드레스를 입고 데이트하러 온 우아한 여성이 앉아 있었고, 어린이가 많을 거라고 생각했던 내 예상과 달리 공연장을 가득 메운 성인 관객들의 반짝였던 눈빛과 표정을 기억한다. 여행지에서 찾은 공연장은, 내가 앉아 있는 객석 또한 하나의 무대가 된다. 나 역시 그 무대 위의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때의 기억으로, 뉴욕에 가면 반드시 뮤지컬 <시카고>를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TV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보았던 여자 주인공인 록시 하트의 독무대가 강렬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눈과 귀를 사로잡는 독특한 재즈 선율에 맞춰 '날 좀 봐줘!'라고 외치는 듯한 그녀의 자아도취된 구애의 몸짓은, 내가 생각하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이미지와도 닮아 있었다. 자신을 표현하는 데 거침없고 적극적인 태도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한국을 떠나기 전 길거리 현수막에서 <시카고> 광고를 보았다. 현수막을 바라보며 뉴욕에서 이 공연을 직접 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막연한 설렘을 느꼈다.
뉴욕에서 뮤지컬을 저렴하게 보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대표적으로 (1) 로터리 추첨에 응모하는 것 (2) 타임스퀘어의 상징인 빨간 계단 아래에 위치한 ‘TKTS 부스‘에서 할인 티켓을 사는 것 (3) 앱 ‘투데이틱스(TodayTix)'를 이용하는 것이다. 같은 반의 프랑스 친구는 로터리 추첨에 곧잘 당첨되어 자랑했지만, 나는 로터리를 기다리는 대신 직접 공연장을 찾아가 보고 싶었다. 이왕 뉴욕에서 보는 공연이니 무대가 잘 보이는 좋은 좌석의 표를 사고 싶었고, 무엇보다 내가 원하는 낮 공연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수업을 마치고 숙소로 가는 길에 <시카고> 무대 복장을 한 사람들이 전단을 주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받아보니, 공연장 티켓 부스에서 표를 구매하면 최대 60달러를 할인해 준다는 내용이었다.
다음 날, 미리 앱에서 좌석을 확인한 후 앰배서더 극장의 티켓 부스에 찾았다. 흰머리가 희끗한 아저씨가 일하고 있었다. 토요일 2시 30분 공연에 가장 좋은 오케스트라석 가격을 물어보니 230달러가 넘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좋은 좌석에서 볼까? 하지만 그만큼의 비용을 들이기엔 망설여졌다.
“너무 비싼데 혹시 좀 더 저렴한데 좋은 좌석 없을까요?”
아저씨는 오케스트라석 오른쪽에 위치한 E2 자리를 추천해 줬다.
"무대가 잘 보이는 좌석인고 89달러예요. 이 가격이면 정말 좋은 좌석이예요."
그의 태도와 말투에서 어쩐지 신뢰가 갔다. 나는 바로 표를 구매했다.
나중에 공연을 보러 갔을 때 그 아저씨의 말대로 좌석은 정말 좋았다. <시카고>는 스토리 특성상 화려한 무대장치나 연출보다 배우들의 연기와 노래, 춤에 집중하는 작품이기에 공연장도 비교적 작은 편이었다. 내가 앉은 자리에서도 배우들의 표정이 충분히 보였다.
공연을 보러 가기 전, 같은 어학원의 일본인 친구가 관심을 보여 함께 관람하기로 했다. 그 친구는 오케스트라석을 구매하여 관람했다. 나중에 후기를 들어보니 오케스트라석은 배우들과 아이컨택까지 할 수 있을 만큼 확실히 좋은 좌석이었다. 하지만 내가 89달러를 냈다고 하자 좀 후회하는 눈치였다. 좋은 좌석에서 작품을 관람하고 싶다면, 해당 공연장의 티켓 부스에서 직원에게 직접 추천받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공연 시작 전, 닫힌 보라색 벨벳 커튼 위로 금빛으로 빛나는 CHICAGO 로고를 보고 있노라니 '내가 정말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보는구나'라는 생각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공연 시작을 알리자, 사방이 깜깜해지고 이윽고 검은 속옷 차림에 망사 스타킹을 신은 금발을 한 배우가 하얀 조명을 받으며 등장했다.
"Ladies and Gentlemen, you are about to see a story of greed, corruption,
violence, exploitation, adultery, and treachery…all those things we hold
near and dear to our hearts. Thank you…and welcome. (신사 숙녀 여러분, 여러분은 곧 탐욕, 부패, 폭력, 착취, 간통, 그리고 배신의 이야기를 보게 될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가깝게 여기고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들 말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환영합니다.)"
그리고 들려오는 익숙한 전주. 까만 단발머리의 탄탄한 구릿빛의 피부를 한 벨마가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그녀의 화려한 독무대가 시작됐다.
"Come on babe why don’t we paint the town and all that jazz!
I’m gonna rouge my knees and roll my stockings down and all that jazz!"
유튜브로 수차례 보았던 장면이지만, 직접 눈앞에서 펼쳐지는 공연은 전율이 느껴질 정도였다. 핀 조명 아래에서 대담하고도 매혹적인 몸짓을 이어가는 벨마와 그 뒤에서 일사불란하게 춤추는 배우들은 단숨에 관객의 집중을 이끌어냈다. 배우들의 근육이 핀 조명 아래서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발레공연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뮤지컬 <시카고>는 이른바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라고 불리는 1920년대 미국 시카고에서 실제 로 있었던 사건을 기반으로 한다. 금주법이 시행됐지만 밀주가 성행했고 사람들은 술과 파티에 빠져있었으며 폭행과 살인이 만연했다. 아름다움을 이용해 언론을 조종한 록시 하트의 캐릭터는, 실제로 불륜 상대를 살해하고 무죄를 받은 '불라 아난'이라는 인물에서 영감을 얻었다.
벨마처럼 무대 위에서 화려하게 춤추고 노래하며 세상의 주목을 받고 싶었던 록시는 그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남편 에이머스를 철저히 이용하여, 사랑밖에 모른다고 외치는 세상 속물적인 변호사 ‘빌리’와 함께 무죄를 받아낸다.
록시가 저지른 살인사건의 본질보다 그녀의 아름다움을 화제 삼았던 언론. 그리고 성공적으로 언론플레이에 성공한 록시와 빌리. 이 부조리한 스토리를 뮤지컬 시카고는 그 어느 뮤지컬보다 관능적인 방식으로 표현함으로써 부조리라는 본질을 꽁꽁 숨겨둔다. 마치 "관객 너희들도 부조리야 어쨌든 이 매력적인 무대에 빠졌잖아!"라고 말하듯.
공연을 본 후, 2003년 개봉한 르네 젤위거(록시 역), 캐서린 제타 존슨(벨마 역), 리처드 기어(빌리 역) 주연의 영화 시카고도 찾아보았다. 뮤지컬이 지닌 매력을 살리면서도 영화적 표현 방식으로 이야기를 더욱 입체적으로 풀어내어 흥미롭게 감상했다. 공연에서는 미처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영화를 먼저 보고 뮤지컬을 본다면 더 풍부하게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뮤지컬에서도 영화에서도 록시는 결국 원하는 것을 얻는다. 하지만 그녀는 정말 행복했을까? 세상의 주목을 받고 싶은 본인의 욕망을 위해 남편의 사랑을 짓밟은 록시가 그 이후에도 만족스러운 삶을 살았는지는, 글쎄, 미지수다.
공연이 끝나고, 관객들은 남편 에이머스를 향해 누구보다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자신을 위해 욕망을 좇는 것은 쉽지만, 타인의 욕망을 위해 희생하는 것은 어려운 것임을.
무대 위 배우들은 저마다 욕망을 연기했고, 우리는 그것을 숨죽여 바라보았다. 그러나 객석을 떠나 현실로 돌아가는 순간, 우리 또한 각자의 욕망이 교차하는 무대 위에 서게 된다. 욕망에 휩쓸린 벨마도, 희생만 하는 에이머스도 아닌, 스스로 균형을 잡은 채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