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라는 안전한 우주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으로 지하철을 타고 혼자 외출했다. 목적지는 교보문고 광화문점. 지하철을 한 번 갈아타는, 40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그전에 종종 부모님과 함께 교보문고에 갔었던 터라 나름 눈에 익은 장소였다. 9시 30분이었던가, 영업 시작 시각에 맞춰 온다는 것이 시간이 꽤 남아서 추운 밖에서 기다렸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한 달에 두세 번은 주말마다 교보문고에 가서 책을 읽었다. 영업 시작 시각에 맞춰 갔던 이유는 책을 읽을 수 있는 좋은 자리에 앉기 위해서였다. 당시 인기가 많았던 그리스 로마 신화 시리즈와 신간 도서 등의 책을 몇 권 골라, 좋아하는 자리에 앉아 몇 시간이고 책을 읽었다. 어떤 날은 책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다가 점심때가 훌쩍 지나서 집에 돌아갔고, 어느 날은 영 내 맘에 드는 책을 찾지 못해 한두 시간만 머물다 집에 돌아가기도 했다.
대학생 시절에도 자연스럽게 학교의 도서관을 자주 찾곤 했다. 공강 시간이면 어김없이 로욜라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학교는 웬만한 신청 도서는 모두 구입해 줄 만큼 학생들의 지적 욕구를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었고 그런 학교의 학생인 것이 나의 자부심이기도 했다.
서가 사이를 거닐고 있을 때면 코끝을 간질이는, 오래된 책에서 스며 나오는 쿰쿰한 냄새가 좋았다. 서가에 기대어 책을 들춰보다가, 서가 너머 열람석에서 저마다 깊이 몰두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때면 위안이 되었다. 우리 모두, 시끄럽고 어지러운 세상을 잠시 피해, 고요한 이곳으로 모여들어 저마다의 꿈을 피우고 있다는 일종의 동지애에서 느껴지는 안도감 같은 것이었다.
나는 대학교 3학년까지 다닌 후 한 학기를 휴학하고 로욜라 도서관에서 풀타임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내가 맡은 업무는 학생들이 도서관에 신청한 해외 원서를 주문하고, 주문한 책이 도착하면 도서 등록, 라벨 부착, 서가 정리 등을 하는 일이었다. 학교의 제일 좋아하는 공간에서, 누군가가 나를 위해 그러했듯이, 나 역시 책을 기다릴 학우를 위해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게 즐거운 보람이었다.
졸업 후 한동안은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지 못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나는 '정답'과 '오답' 그리고 '답할 수 없는 것들' 사이에서 방황했다. 때로는 그 무엇도 선택하지 못한 채 비겁하게 눈치를 봤고, 때로는 꿋꿋이 정답을 외치며 조직의 치졸함에 분노했다. 밥벌이를 시작하기 전까지, 사회는 마치 모든 것에 정답이 존재하는 것처럼 나를 가르쳤고, 나는 정답이라 믿었던 것들을 착실하게 배우고 익혔다. 그런데 막상 현실에 나와 보니, 내가 믿어 의심치 않았던 원칙과 가치는 사회라는 시스템과 맞물리지 않았다. 단순히 설정을 바꾸면 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새로운 시스템을 다시 깔아야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장 폴 사르트르의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는 말에 깊이 공감하며, 그에 따라 살아가려 했다. 그래서 조직의 부조리가 어떠하든, 사회가 나에게 무엇을 강요하든 상관없이, 본래의 나 자신과 멀어지는 행위를 할 때마다 괴로움을 느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내 내면의 괴로움과는 무관하게 사회적인 호감도는 높아졌다. 그러면서 나는 그 무엇도 확신하지 못하는 순간이 많아졌다.
그러나 나는 확신하고 싶었다. 확신을 찾으러 과거의 나를 좇아 책이 있는 곳으로 갔다. 책은 저마다의 세계를 품고 있었고, 일방적이며, 그래서 안전했다. 그곳은 오직 작가의 신념만이 존재하는 안전한 우주였다. 나는 그 안에서 마음을 놓고 내 세계를 펼칠 수 있었다. 어느 순간에는 확신의 세계와 확신하지 못하는 세계 사이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다시 세상으로 나갈 힘을 얻곤 했다.
가을의 뉴욕에서 책을 읽는다는 것
그래서 가장 혁신적인 도시라고 불리는 뉴욕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여전히 많은 서점이 사랑받는 이유는, 어쩌면 뉴요커에게 서점이 안전한 안식처 중 하나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양한 가치관과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고, 매일 상식 밖의 일이 벌어지는 뉴욕에서 책은 어쩌면 가장 안전한 신경안정제일지도 모른다. 비록 뉴욕의 서점은 계속 줄어들고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80여 개가 남아 있다고 한다.
뉴욕으로 떠나기 전, 몇 안 되는 버킷리스트 중 하나는 책 한 권을 뉴욕에서 읽는 것이었다. 동화책이든, 소설이든, 잡지든 책의 장르나 형태는 상관없었다. 은행과 단풍이 어우러진 뉴욕의 거리를 걷다가 들어간 서점에서, 미국의 감성이 담긴 책을 구경하고, 그 중 마음에 드는 한 권을 골라 한 장씩 넘기는 모습을 상상하면 절로 웃음이 나왔다. 가을, 뉴욕, 그리고 한 권의 책. 그 조합만으로도 영감이 차오르는 듯했다.
뉴욕에 머무는 동안, 나는 스트랜드 북스토어(Strand Book Store), 키노쿠니야 뉴욕(Kinokuniya NewYork), 리졸리 북스토어(Rizzoli Book Store), 반스 앤 노블(Barnes&Noble), 북오프 뉴욕(BOOKOFF NewYork), 미스터리 북숍(Mysterious Book Shop), 드라마 북숍(The Drama Book Shop) 등 크고 작은 서점을 방문했다. 영감을 받았냐고?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넘치도록!
드라마 북숍(The Drama Book Shop)
드라마 북숍은 연극과 영화의 대본을 주로 취급하는 독특한 서점이다. 천장은 마치 책들이 하늘로 날아가는 듯한 예술적인 장식으로 꾸며져 있고, 카페도 겸하고 있다. 덕분에 마음에 드는 책을 구매한 후, 커피 한 잔과 함께 천천히 페이지를 넘기는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벽면에는 오래된 연극과 영화의 포스터들이 액자에 담겨 전시되어 있었고, 한쪽 커뮤니티 보드에는 독서 모임, 보컬 레슨, 기타 개인지도 수업 등 다양한 문화 활동을 알리는 전단이 붙어 있었다. 단순한 서점을 넘어, 지역 커뮤니티와 유기적으로 연결된 하나의 문화적 공간처럼 느껴졌다.
이 서점의 가장 큰 매력은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이다. 조용한 분위기를 요구하는 다른 서점들과 달리, 책장 사이사이에는 소파와 의자가 마련돼 있어 사람들이 모여 편안하게 대화할 수 있었다. 내가 방문했을 때도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연극에 관해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 서점의 지하에서는 작품 낭독회가 열리기도 하는데, 아쉽게도 내가 방문한 날에는 낭독 일정이 없어서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막혀 있었다.
나는 책을 둘러보다 익숙한 표지를 발견했다. 바로 <김씨네 편의점(Kim's Convenience)>이었다. 캐나다 토론토를 배경으로 편의점을 운영하는 한국계 캐나다인 가족의 이야기를 유머러스하게 그린 연극이다. 2011년 토론토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처음 선보였고, 이후 인기에 힘입어 2016년부터 2021년까지 캐나다 방송사 CBS에서 시트콤으로 방영되었으며, 이제는 OTT에서도 볼 수 있다.
수많은 낯선 작품들 사이에서 김씨네 편의점을 발견하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책의 앞 몇 장을 가볍게 읽어본 뒤, 망설임 없이 책을 구매했다. 그리고 서점 카페에서 라테를 주문한 후, 창문 앞자리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연극 대본집이라 책은 비교적 쉽게 읽혔다. 눈이 조금 피로해질 때쯤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서점 창밖을 바라보았다. 유리 너머로 바쁘게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내 왼편에는 한 여성이 줌(Zoom)으로 화상 회의에 열중하고 있었고, 오른편에는 노트북으로 리포트를 작성하는 듯한 여학생이 앉아 있었다. 서점 안에 들리는 적당한 소음과 바깥에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 그리고 따뜻한 라테가 더해지니 딱 내가 꿈꾸던 완벽한 순간이었다. 마치 크리스마스 날, 포근한 이불 속에서 느껴지는 안락한 느낌이랄까.
이 예쁜 서점은 종종 지나가는 행인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사람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휴대전화를 꺼내 서점을 사진에 담아 갔다. 그럴 때마다 서점 창가에 앉은 나는 그들의 사진 속 배경이 되곤 했다. 뉴욕에 있다는 것은 언제든지 누군가의 사진 속 배경이 된다는 것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느낀 뉴요커들은, 대게 사진 찍히는 걸 개의치 않았다. 그들은 기꺼이 배경이 되어 주었다. 뉴욕의 거리와 풍경은 여행자뿐만 아니라 뉴요커에게도, 언제든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 아름다운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책을 모두 읽는 데 걸린 시간은 약 2시간 30분. 마지막 장을 덮으며, 나의 뉴욕 버킷리스트를 완료했다는 뿌듯함과 함께 책이 남긴 기분 좋은 여운을 느꼈다.
북오프 뉴욕(BOOKOFF NewYorK)
웨스트 45번가에 위치한 북오프 뉴욕은 대표적인 중고서점 중 하나이다. 2층으로 구성된 이곳은, 1층에는 중고피규어와 일본 서적까지 함께 판매한다. 다양한 피규어와 중고서적이 가득해, 그저 잠깐 들러볼 생각으로 들어갔다가, 한참을 구경하고 책까지 구매해서 나왔다.
내가 북오프 뉴욕을 방문했을 때는 겨울로 접어드는 제법 쌀쌀한 날씨였다. 동화책을 둘러보다가 크리스마스 동화책을 펼쳐 들었는데, 뉴욕에서 크리스마스를 경험하지 못하고 떠나야 한다는 아쉬움이 갑자기 밀려왔다. 그래서 이 순간을 기념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크리스마스 동화책 한 권을 고르기로 했다. 한국으로 돌아간 후, 크리스마스 날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고른 책은 바로 <34번가의 기적(Miracle on 34th Street)>. 맨해튼 34번가는 뉴욕의 대표적인 백화점인 ‘메이시스 백화점’을 비롯한 대형 상점들이 모여있는 쇼핑 거리이다. 1947년에 동일한 이름의 영화가 개봉하여 큰 사랑을 받았다.
책을 펼쳐보니, 2018년에 스칼렛과 제이콥이 아이든에게 선물한 책이라는 메모가 적혀 있었다. 시간이 흘러, 이 책이 뉴욕 여행 중인 어느 한국 여자에게 갈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가끔 현실은 영화보다 더 재미있게 흘러간다.
중고 서점이라고 해서 모든 제품이 정가보다 저렴한 것은 아니었다. 어느 마블 책은 정가보다 훨씬 비싸게 책정되어 있기도 했고, 어떤 책은 정가와 비슷한 가격이었다. 마블 코믹스나 피규어를 수집하는 사람이라면, 뜻밖의 소장 가치가 있는 희귀 아이템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뉴욕 지하철은 인터넷이 잘 안되는 곳이 많다. 그래서 불편한 점이 참 많지만, 결국 그것도 익숙해지기 나름이었다. 인터넷이 되지 않는 지하철에서 나는 멍하니 창밖을 구경하거나, 옆 사람들의 대화를 흥미롭게 듣기도 하고, 어학원 수업 때 필기한 수첩을 보며 복습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인터넷이 안 되는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뉴요커들도 많았다. 그런 모습을 보며, 인터넷이 안 되는 지하철 역시,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뉴욕의 센트럴파크처럼 중요한 쉼의 공간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곳에서나, 진정한 쉼은 책 속에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