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뉴욕에서 찾은 밥심

by 리틀 골드문트

H마트를 예찬합니다

나는 밥순이다. 그리고 한국의 매운맛을 사랑한다. 뉴욕으로 떠나기 전, 갖가지 종류의 라면과 캔 김치를 잔뜩 준비하여 내 입맛을 지킬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런데 출국 하루 전, 미국으로 입국 시 육류가 포함된 라면, 캔류는 반입이 불가하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결국 내가 미국으로 챙겨간 것은 누룽지와 캔 김치 몇 개가 전부였다. (다음에 미국에 가게 된다면 야채 라면을 꼭 챙길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뉴욕에 도착한 지 5일 만에 한국의 밥상이 그리워질 줄은 몰랐다. 뉴욕의 햄버거도 맛이 없었고 유명한 컵케이크도 맛있다는 느낌보단 느끼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고춧가루가 팍팍 들어간 얼큰한 국물이나 반찬이 간절했다. 특히 쌀을 먹지 않으니 어쩐지 먹어도 먹은 것 같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밥심으로 사는 사람이라는 걸 새삼스레 깨달았다.


숙소 근처에 있는 일본 음식과 식재료를 파는 마트에 가서 도시락을 사 먹어봤지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는 간장으로 맛을 낸 일본 음식이 아니라, 고춧가루와 마늘로 만들어낸 한국 음식이 필요했다. 구글링하던 중, 숙소에서 걸어서 약 16분 거리에 한인타운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곳에는 한국 음식을 비롯한 아시아 식재료를 판매하는 'H마트'가 있었다. 나는 다음날 어학원 수업이 끝나자마자 그곳으로 달려갔다.


나는 'H마트'라는 곳을 처음 알게 되었지만, 이곳은 한국인의 영혼이 있는 장소이다. H마트는 한국계 미국인 미셸 자우너가 2011년 출간한 회고록 <H마트에서 울다>의 주요 배경이 된 곳이다. 이 책에서 작가는 엄마와 함께 H마트에서 장을 보며 느꼈던 한국인의 정체성과 엄마와의 소중한 추억을 되새긴다. 이 이야기는 미국 내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며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전미도서상 논픽션 부문 후보에 올랐다.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들에게 H마트는 고향의 맛을 기억하고, 잃어버린 정체성을 되찾을 수 있는 치유와 연결의 공간일 것이다.


H마트에 들어서자마자 다시 한국으로 돌아간 듯 익숙한 마트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매장 내부를 둘러봤다. 마트는 규모가 꽤 컸다. 다른 나라에서도 한인 마트에 가본 적이 있지만 이렇게 대형 유통사 마트가 아니고서야 다양한 한국 식품이 있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한국의 각종 양념과 조미료, 국거리 미역과 같은 흔치 않은 가공식품들이 다 구비돼 있었다. 한국마트와 다른 건 장을 보는 사람뿐이었다. 아시아 사람도 있었지만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도 많이 있었다.


H마트에서 나는 오아시스를 발견했다. 감사합니다.
조기구이와 오징어초장도 있다. 미쳤다.


그러다가 나는 발걸음을 멈춰 섰다. 냉장고 한 벽면이 모두 한국 반찬으로 빼곡히 채워져 있는 게 아닌가! 흥분한 나는 반찬 하나하나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어묵볶음, 낙지젓, 황태채 무침, 콩나물무침, 심지어 조기구이와 오징어 초장까지! 사막 한가운데서 생명수 같은 오아시스를 발견한 것처럼 소름이 돋았다 그때 든 생각은 딱 하나였다. '이제 살았구나!!'


난 뉴욕에 온 이후로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게 앞으로 며칠 동안 어떤 반찬을 먹을지 고르기 시작했다. 모든 반찬이 맛있어 보였기에 마음 같아서는 열 개는 고르고 싶었지만, 기숙사 냉장고도 작았고 다른 짐도 많았기에 그건 무리였다.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여 나는 최애 반찬인 미역줄기볶음, 무말랭이&오징어젓갈, 두부조림, 세 팩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다양한 아시아 라면이 구비돼 있다. 신라면 비건 버전도 있다.


나는 반찬 함께 일주일간 먹을 즉석밥과 라면을 사서 기숙사로 돌아왔다. 한 손엔 학원 교재와 개인 물품이 들은 가방을, 한 손에는 H마트에서 산 식품으로 가득 찬 비닐봉지를 들고 그 어느 때보다 설레는 마음으로 걸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손을 씻고 즉석밥을 전자레인지에 데우고 라면을 먹기 위해 전기 포트에 물을 데웠다. 데워지길 기다리는 동안 나는 콧노래가 절로 나올 만큼 나는 신나 있었다.


나의 첫 한식. 정말 맛있었다. 아름다운 고춧가루 빛깔의 두부조림


모든 음식이 세팅되고 반찬을 첫입 먹는 순간 나는 웃음이 나왔다. 한국의 유명 한식당의 맛처럼 정말이지 너무 맛있었다! 혼자 '대박이다'를 몇 번이나 중얼거리며 허겁지겁 음식을 먹었다.


내 기숙사가 H마트와 멀지 않은 'H세권'이라는 사실은 앞으로의 뉴욕 생활에 대한 근심을 한결 덜어주었다. 당시 나는 뜨거운 물도 잘 안 나오고 사진과는 딴판인 열악한 기숙사 때문에 마음이 좀 지쳐있었다. H마트를 발견한 것이 마치 든든한 지원군을 얻은 듯, 이제 어떤 일이 생겨도 잘 버텨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H마트를 알게 된 후, 나는 2~3일에 한 끼는 H마트 표 반찬을 먹으며 한식을 즐겼다. 한인타운에 한식당이 많긴 했지만, H마트에서 산 반찬을 며칠 동안 나눠 먹는 게 경제적으로 훨씬 이득이었다. 게다가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이것저것 골라서 숙소에서 먹는 재미도 쏠쏠했다.


변비를 예방해 준 나물반찬들


샐러드를 제외하면 미국 음식은 채소가 부족하기에, 중간중간 H마트에서 샀던 나물 음식을 곁들이는 게 균형 잡힌 식사를 유지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어학원에서 뉴욕에서 지내며 변비에 걸렸다며 요거트를 사러 간다고 말하는 친구도 있었다. 한식 덕분에 나는 다행히도 원활한 배변 활동을 했다.


나는 뉴욕에 도착한 지 단 5일 만에 한식을 그리워했는데, H마트가 없던 그 옛날 한인 1세대들은 어떻게 향수병을 달래고 미국에 정착하셨던 걸까? 그분들의 노고가 있었기에 우리 후손들이 뉴욕 한복판에서도 쉽게 한국음식을 접하고, 편하게 여행할 수 있으니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H마트에서 한국인의 밥심을 찾고 남은 뉴욕 여행을 씩씩하게 이어갈 힘을 얻었다. 숙소의 구석에 있는 테이블 앞에서 바보같이 웃으며 정신없이 한국 음식을 먹던 그 소박한 순간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