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향군인의 날, 워싱턴 DC에서
한 나라의 수도를 떠올리면, 그 나라에서 가장 인구수가 많고, 경제적, 지리적, 문화적 중심지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가끔 그 나라의 도시가 너무 유명한 나머지 수도로 착각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미국 뉴욕도 그중 하나이다. (수도로 착각하는 대표적인 대도시로 호주의 시드니 (수도 캔버라), 캐나다의 토론토 (수도 오타와), 터키의 이스탄불 (수도 앙카라), 브라질 상파울루 (수도 브라질리아), 스위스 제네바 (수도 베른) 등이 있다.)
뉴욕에서의 하루하루가 즐거웠지만 기왕 뉴욕까지 왔으니 수도인 워싱턴 D.C. (이하 워싱턴 DC)도 가보고 싶었다. 맨해튼에서 워싱턴 DC에 가는 방법으로는 기차 암트랙 (Amtrak)과 메가버스 (Megabus)가 있다.
암트랙을 이용할 경우 열차에 따라 편도 2시간 40분~3시간 30분이 소요되고 버스는 편도 4시간 30분~5시간이 소요되는데, 메가버스가 암트랙의 반값 정도이며 미리 예약할수록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이용할 수 있다. 인터넷에서 메가버스 이용 후기를 살펴보니 두 달 전에 왕복 10달러에 표를 예매한 사람도 있었다.
나의 경우는 미리 계획한 일정이 아니었고 3~4일 전 기준으로 메가버스에서 홈페이지에서 푯값을 확인하니 편도 가격만 88달러로 꽤 비쌌다. 내가 워싱턴 DC에 간다고 하니 헝가리 친구 니키가 관심을 보였는데, 메가버스 비용을 듣더니 내게 저렴한 당일치기 단체 버스 관광 정보를 찾아 알려주었다.
가격은 인당 16만 원대로 메가버스 왕복 티켓보다 저렴한 비용이었다. 단체관광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영어투어는 처음이라 궁금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가격이 저렴하니 고민의 여지가 없었다.
마침 투어를 하는 날인 11월 11일은 미국의 ‘재향군인의 날(Veterans Day)'이었다. 베테랑(Veteran) 이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특정 분야에서 경험이 많은 전문가'를 뜻하는 것 외에도 '전쟁이나 군 복무를 한 사람'을 뜻하는데, 11월 11일은 제1차 세계 대전 종전일로 세계 대전과 여러 전쟁에 참여한 참전용사들을 기리는 날이다.
워싱턴 DC는 맨해튼에서 차로 4시간 30분 정도 떨어져 있어서 투어 시작은 이른 아침인 6시에 시작되었다. 일찌감치 숙소에서 나와 약속 장소에 나오니 5시 20분으로 약속 시간인 6시까지 시간이 꽤 남아있었다. 만나는 장소는 맨해튼 타임스퀘어 호텔 앞이었는데, 아침에도 늘 사람으로 북적이던 곳이 그 시간대에는 어느 영화 속 버려진 도시처럼 스산하고 조용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일찍 아침을 시작하는 어느 노동자를 위한 길거리 핫도그 가판대는 그 시간에도 환히 길을 비췄는데, 지구에서 가장 바쁜 도시 뉴욕 맨해튼에서 새벽을 비추는 공간이 환한 백열등의 편의점이 아닌 노란 핫도그 가판대라는 것이 내겐 어색하게 느껴졌다.
곧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이내 호텔 앞이 수많은 투어 신청객들로 가득 찼다. 동양인은 나 혼자였고, 정말 각국의 다양한 남녀노소가 이 투어를 신청한 것 같았다. 6시가 되자 한국에선 볼 수 없는 초대형 버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호텔 앞에 흩어져 기다리던 우리들은 본능적으로 저 버스가 투어버스라는 걸 알았다.
버스는 멈춰 섰고 문이 열리며 이탈리아 출신으로 보이는 백발의 멋쟁이 가이드 아저씨가 여유로운 몸짓으로 나타났다. 눈을 감고도 가이드를 할 것만 같은 짬밥이 느껴지는 제스처로 신청자 명단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고 호명된 사람은 차례로 대형 버스에 탑승하기 시작했다. 나처럼 친구와 둘이서 온 사람도 있었고, 연인, 가족도 있었고 혼자서 온 사람도 적지 않았다.
얼마 전 바꾼 숙소의 침대가 불편해 요 며칠 수면시간이 부족했던 데다가 4시 반에 일어난 까닭에 채 2시간도 못 잤던 나는 버스에 타자마자 곧 잠에 빠져들었다. 버스는 4시간 30분을 달렸다. 깜깜한 맨해튼 거리를 벗어나 뉴어크를 지나고 필라델피아와 볼티모어를 거쳐 워싱턴 DC에 도착했다.
신기하게도 출발 지점이었던 맨해튼은 초겨울의 쌀쌀한 날씨였는데 필라델피아에서는 완연한 가을 풍경이 펼쳐지더니 워싱턴 DC에 도착하니 강렬한 햇볕이 내리쬐는 여름을 만났다. 육안으로는 헤아릴 수도 없는 드넓은 땅에 영화에서나 봤었던 펜타곤 (미국 국방부 본부 청사)과 백악관이 멀리서 보였다.
첫 번째 목적지인 알링턴 국립묘지에 도착해 내리니 껴입은 겨울옷이 무색하게 뜨거운 햇빛에 얼굴이 저절로 찡그려졌다. 버스에서 내린 모두가 강한 열기에 외투와 재킷을 주섬주섬 벗기 바빴다.
알링턴 국립묘지에는 제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등에 참여한 전사자와 테러 희생자가 모셔져 있다. 가이드를 따라 끝을 알 수 없이 펼쳐진 하얀 묘지 사이를 걸었다.
맨해튼이 회색의 아스팔트와 건물로 뒤덮인 짙은 묘연의 색감으로 기억된다면, 워싱턴 DC는 눈부신 새하얀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곳이었다. 수많은 숭고한 죽음 위에서 풍경은 고요했고 평온했다. 일정한 간격으로 펼쳐진 하얀 묘비가 마치 들판의 하얀 꽃처럼 눈부셨다.
국립묘지를 나와 링컨기념관으로 향하는 길에서 조지타운대학교 시내를 지나갔다. 조지타운대학교는 마치 해리포터 호그와트가 연상되는 붉은 벽돌의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대학교 앞 시내 역시 붉은 벽돌의 작은 상점과 음식점이 소박한 아름다운 거리였다.
겨울 문턱에 왔지만, 더운 날씨 탓에 반팔을 입고 전공 서적을 든 채 어디론가 걸어가는 대학생들, 땀 흘리며 조깅하는 사람들, 그 뒤로 보이는 드넓은 푸른 초원의 공원, 햇살에 반짝이는 타이들 베이슨 호수(Tidal Basin)의 모습이 영화 한 장면처럼 아름다웠다. 여기에 산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워싱턴 DC는 도시 전체가 센트럴파크 같았다. 시선이 닿는 모든 곳에 풀밭과 나무가 가득했다. 링컨기념관에 가기 위에 메모리얼 파크에 도착하자 재향군인의 날을 기념하기 위해 옷을 갖춰 입고 방문한 사람들이 제법 보였다.
미국 제16대 대통령인 에이브러햄 링컨을 기념해서 만든 이 기념관은 그리스 아테네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을 모티브로 지었다고 한다.
In this temple as in the hearts of the people for whom he saved the union the memory of Abraham Lincoln is enshrined forever.
(이 신전에서, 그리고 그가 연합하고자 한 국민들의 마음속에, 에이브러햄 링컨의 기억은 영원히 성스럽게 자리 잡고 있다.)
링컨 대통령 동상 위에는 그의 정신을 기리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그는 국가가 분열된 남북전쟁 시기에 미국이 하나의 국가로 연합하는 데 애쓴 위인으로 칭송받는다. 남북이 적대적인 상황에서,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의견까지도 포용하고, 노예제 폐지를 통해 미국의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실현했다는 점에서 평화에 기반한 리더십을 실현한 인물이다.
링컨 기념관을 살펴본 후 한국 참전 용사 기념비를 방문했다. 한국 참전 용사 기념비는 링컨 기념관을 기준으로 오른쪽에 있었다.
한국참전용사 기념비에는 19인의 참전용사 동상이 있는데, 추운 겨울 정찰 중인 군인의 모습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기념비 옆으로, 오늘 재향군인의 날 행사를 위한 자리가 한창 준비 중이었다. 오늘날 한국이 있게끔 도와주신 그들의 헌신에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감사의 마음을 담아 사진을 남겼다.
반나절 동안 돌아본 워싱턴 DC는 조용했고, 아름다웠고, 평화로웠다. 조국을 위해 미국뿐만 아니라 먼 타지에서도 희생한 영웅들의 남긴 유산처럼 숭고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전쟁은 진행 중이다. 한국과 북한, 우크라이나 러시아,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그리고 수많은 내전들.
한 곳에서는 숭고한 학문을 탐구하고 숭고한 정신을 기리면서도 다른 곳에서는 숭고한 정신과 이념을 명목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아까운 청년들이, 아까운 목숨이 희생을 강요당한다.
우리 모두가 안전하고 행복하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