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지 못한 순간을 만난다는 것
예상치 못한 순간에 마주하는 어느 장면, 생각, 감정이 강렬한 영감을 줄 때가 있다. 길을 걷다가 뜻밖에 마주한 거리의 음악, 그날의 날씨가 만들어낸 도시의 색감, 우연히 들은 누군가의 대화 속 한마디 같은 것들 말이다.
그래서 영감을 찾는다는 것은 거창한 사건에서 오는 게 아니라, 열린 마음으로 사소한 순간을 기꺼이 맞이하는 나 자신일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휘트니 미술관은 뜻밖의 작품을 사소한 순간에 만나 영감을 충전했던 공간이다. 사실, 휘트니 미술관을 찾은 건 오로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보기 위해서였다. 2023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에드워드 호퍼 : 길 위에서>전시를 본 이후로 그에게 관심을 두고 있었다. 도시의 고독을 섬세하게 포착하는 그의 그림을, 뉴욕이라는 도시에서 직접 마주하는 순간은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다. 그런데 나는 호퍼를 만나러 가는 길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작품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휘트니 미술관 1층에서부터 한 층씩 천천히 오르며 전시를 감상하던 중, 흑인 무용수 앨빈 에일리의 전시가 열리는 3층에 도착했다. 하얀 조명의 평범한 전시 공간을 지나 마치 전혀 다른 세계로 들어선 듯 검붉은 조명으로 휩싸인 전시장이 오감을 사로잡았다. 전시장 벽면과 중앙의 전시대는 짙은 붉은 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천장과 가까운 벽 전체를 따라 가로로 길게 펼쳐진 커다란 파노라마 화면에서는 앨빈 에일리의 영상이 보라색과 남색, 빨간색이 뒤섞여 감각적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 빛은 전시실 안의 작품들에까지 번지며 또 다른 색감을 만들어내 그곳의 분위기를 신비롭게 만들었다. 그래서였을까. 이곳 3층엔 다른 전시실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작품을 관람하고 있었다.
나는 전시된 작품을 천천히 살펴보다가 한 점의 회화 작품 앞에서 걸음을 멈춰섰다. 작품의 이름은 <Gettin' Religion>. 아치볼드 존 모틀리 주니어의 작품이었다. 작품도 작가도 모두 생소하기만 했다.
빛의 반사로 일렁이는 푸른빛의 환희
그림엔 푸르스름한 조명이 번지는 밤거리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커다란 푸른 가로등이 거리를 비추고 있고, 그 주변으로 수많은 흑인이 묘사돼 있다. 어떤 이들은 트럼펫을 불고, 어떤 이는 지팡이를 짚고 느릿하게 걸어가고 있다. 그림 가운데엔 중절모를 쓴 남성이 서 있다. 정면이 아닌 오른쪽 어딘가를 바라보는 그의 고요한 시선이 그의 왼쪽에서 붉은 하이힐을 신고 하얀 강아지와 경쾌하게 걷고 있는 어느 여성의 모습과 사뭇 대조된다.
동시에 그림 뒤편에는, 가로등을 배경 삼아 드러난 가게와 집, 건물이 있다. 집 앞 난간과 계단에서 밤거리를 지켜보는 엄마와 아이가 있고, 건물 유리창 안에선 누군가가 고개를 내밀어 밖을 바라본다. 이처럼 그림 속 인물들은 캔버스 위에서 고정된 듯 보이지만, 저마다의 삶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 모든 순간을 푸른 조명이 은은하게 감싸고 있다.
처음엔 몰랐지만, 작품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고 나서야 눈에 띄는 한 사람이 있었다. 인파들 사이로, 푸른 가로등을 바라보며 하늘을 향해 두 손 들고 기도하는 사람이다. 'JESUS SAVES US'로 추정되는 글귀가 쓰인 단 위에 올서서, 다른 인물들보다 더 높은 곳에 배치됐음에도 불구하고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은 그를 유난히도 그림자처럼 표현한 짙은 색감 때문이었다.
재미있게도, 그를 인식하고 나니, 이 작품에서 그 수많은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오로지 그와 푸른색 가로등만이 보인다. 한껏 벌린 그의 입에서 우렁찬 찬양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듯하다. 작품 제목처럼, 작가는 종교를 갖게 된 사람의 보이지 않는 내적 열망과 환희와 종교가 지닌 내면적 가치를 회화적 기법으로 표현하고자 했었던 것 같다.
며칠 전 모마에서 봤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의 푸른빛이 떠올랐다. 두 그림의 푸름은 같은 듯 다르게 느껴진다. 두 작가 모두 불변의 가치를 그리고자 했지만, 고흐는 자신의 불안과 고독을 소용돌이치는 푸른 하늘에 실었다면, 모틀리는 종교의 환희와 열망을 도시의 푸른 조명 아래 담아냈다. 하나가 생의 고독을 껴안은 파랑이라면, 또 다른 하나는 생의 에너지로 넘치는 파랑이다.
그러나 내가 모틀리의 <Gettin' Religion>에서 한참이나 벗어나지 못했던 이유는, 작품의 주제나 회화 기법 때문이 아니었다. 그림의 바로 맞은편의 파노라마 스크린에서 상영되는 앨빈 에일리의 영상 때문이었다. 그 영상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반사되어 <Gettin' Religion> 위로 퍼지며, 그림 속 푸른빛이 일렁이며 살아나는 듯한 장면이 펼쳐졌던 것이다.
반사된 빛은 작품 속에 깃든 리듬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냈다. 영상의 조명에 따라 작품 속 푸른 가로등이 다채롭게 깜빡였고, 그 아래 사람들은 마치 살아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트럼펫에서 어느 재즈의 리듬이 귓가를 간질이는 듯했다. 나는 이 신비롭고도 황홀한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아 휴대전화를 꺼내 몇 번이고 반복해서 영상으로 담았다.
전시라는 무대에서 영감의 기회를 창조하는 큐레이터
나는 그 특별한 순간을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단지 작품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다. 전시 공간 전체에서 느껴진 독특한 감각, 작품이 놓인 위치, 맞은편에서 빛을 던지는 영상 모두가 하나의 연출처럼 완벽하게 어우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큐레이터가 이 효과를 의도하여 전시를 구성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만약 그랬다면, 이 놀라운 연출에 깊은 감사와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사실 뉴욕의 갤러리를 방문하면서 큐레이션 힘을 절감하곤 했다. 휘트니 미술관에서뿐만 아니라 모마에서도, 멧에서도, 브루클린 박물관에서도 큐레이션이 생각지 못한 영감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몸소 깨닫았다. 모마에서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바로 옆에 앙리 루소의 <잠자는 집시>를 배치한 것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고흐 앞에 몰려 사진을 찍는 동안, 상대적으로 소외된 루소의 그림은 오히려 내게 더 깊은 감흥을 주었다. 같은 밤하늘을
주제로 한 두 작품을 비교해 보며, 말미엔 나의 밤하늘을 고민하게 만든 건 큐레이터의 힘이었다.
뉴욕을 다녀온 뒤, 제주도의 어느 미술관을 방문한 적이 있다. 내로라하는 화가들의 이름을 내건 그 전시회는, 막상 가보니 그 화가들의 작품은 전시의 아주 일부였고, 그마저도 대표작이 아니었다. 많은 방문객을 유도해야 하는 미술관의 고충을 이해했지만, 무엇보다도 아쉬웠던 건 큐레이션이었다.
작품이 천장에 닿을 듯 높게 전시돼 있어 눈으로 보기도 어려웠고, 작품을 비추는 조명이 지나치게 밝아 감상에 방해가 되기도 했다. 일부 작품의 설명을 담은 오디오 해설은 관람객의 동선이나 감상의 흐름을 세밀하게 고려하지 않은 채 정보 전달에 급급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미술관을 오래도록 좋아해온 사람으로서, 나는 적잖이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관람객이 작품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기회도, 깊이 빠져들 수 있는 배려도 부족해 보이는 전시 구성은, 그저 예술을 '목격'하게만 만들었다.
내가 휘트니와 모마에서 느낀 건 분명했다. 관람객은 작품을 보기 위해 전시장을 찾지만, 그 작품을 '경험'하게 만드는 건 전시의 방식이다. 전시는 작품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구성하는 무대이고, 큐레이터는 그 무대 위에서 관람객의 감각을 안내하는 연출가다. 단순히 작품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관람의 흐름을 설계하고 감정을 확장시켜 새로운 영감을 창조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인 것이다.
미술관을 '작정'하고 찾아온 관람객에게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 그것이 전시 공간이 해야 할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한다. 좋은 작품을 보여주는 것만큼이나, 그 작품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가 중요한 이유다. 오늘도 그날의 번쩍였던 순간을 떠올리며 <Gettin' Religion>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또 다른 영감의 순간을 맞이하기 위한 열린 마음을 되새겨본다. 나를 위해 이 작품의 제목을 <Gettin' Inspiration>로 불러도 되지 않을까? 모틀리도 이해해 주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