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아쉬안 언니가 어학원 같은 반에서 친한 친구였다면, 니키는 비록 같은 반은 아니었지만 학원에서 만나 우정을 나눈 또 다른 나의 친구이다.
1시간 30분씩 진행되는 수업이 끝나면 여자 화장실은 칸이 두 개뿐이라 항상 긴 줄이 생겼다. 학생들은 대부분 줄을 서는 동안 씨끌벅적하게 스몰토크를 나누곤 했다. (30대 이상의 우리들은 사회 경험이 있어서인지 스몰토크가 자연스러웠다. 반면, 30대 미만 학생들이 사용하는 화장실은 조용했다고 들었다) 니키와의 첫 만남도 그렇게 화장실 앞 긴 줄에서 시작되었다.
니키는 먼저 내게 말을 붙였고 우리는 간단한 자기소개를 했다. 헝가리에서 온 니키는 큰 키에 동그란 초록색 눈이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나와 대화하면서도 중간중간 그녀에게 인사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그녀는 소위 '인싸' 같았다.
"근데 너 혹시 핼러윈데이 퍼레이드에 관심 있니? 관심 있으면 같이 하자!"
당시는 핼러윈 데이가 며칠 안 남은 시점이었다. 뉴욕에서는 매년 핼러윈데이에 맨해튼 남쪽의 Canal Street에서 북쪽의 15th Street까지 약 2.2km 거리를 행진하는 성대한 퍼레이드 행사를 연다. 매번 새로운 테마를 선정해 멋진 의상과 공연을 볼 수 있는데, 일반인도 이 행진에 참여할 수 있다.
니키는 핸드폰으로 뉴욕 핼러윈 퍼레이드에 대한 내용을 보여주며 작년에 헝가리에서 본인이 했던 핼러윈 분장을 보여주었다. 강렬한 화장에 섹시한 코스튬을 입고 찍은 사진이었다. 이제 막 알게 된 헝가리 여인의 핼러윈데이 사랑과 적극적인 퍼레이드 파티원 모집에 나는 잠깐 말을 잃었다.
"한번 생각해 볼게!"
나는 한국에서도 핼러윈데이 분장이나 이벤트에 참여해 본 적이 없었다. 내향적인 내 성격에 괴기스러운 분장이나 화려한 코스튬은 다른 세계의 것이었다. 하지만 이 헝가리 여인의 기대에 가득 찬 표정과 눈빛을 보고 단박에 거절하기는 마음이 좀 그랬다. '모호하지만 대답은 했으니 이러고 말겠지.'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다음 날 화장실에서 니키를 또 만났다. 니키는 나를 보자마자 "생각해 봤니?"하고 물었다. 예상치 못한 두 번째 만남이었다. 나는 거짓말을 했다. "아…. 응, 그런데 나는 시간이 안될 것 같아, 미안해." "그래? 괜찮아. 마음이 바뀌면 알려줘!"
며칠 뒤 우리는 조나단 선생님이 이끄는 '바(Bar)' 액티비티에서 또 만났다. 액티비티에 모인 어학원 학생 중에서 니키만이 유일하게 아는 얼굴이었던 나는 그녀와 그날 바에서 술을 마시며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눴다. 니키는 벌써 뉴욕에서 두 달째 머물고 있었다. 그녀는 나처럼 호기심이 많았다. 내가 뉴욕에서 앞으로 가볼 곳들에 대해 이야기하자 니키는 같이 가고 싶어 했다. 잠깐 대화했지만 니키가 좋은 사람인 게 느껴졌기에 같이 안 갈 이유가 없었다.
니키와 나는 워싱턴 DC, 뉴욕 할렘과 브루클린 등 곳곳을 같이 다녔다. 우리는 같은 30대 여성으로서 커리어, 결혼, 출산과 같은 주제에서 공감대가 많았고, 무엇보다도 뉴욕에 대한 애정이 깊다는 점에서 특별한 유대감을 느꼈다. 우리는 지하철을 타면서, 길거리를 걸으면서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니키에게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뉴욕에 오기를 갈망하고 있었는지와 그간 어떻게 커리어를 쌓았는지, 어떤 마음으로 결혼을 결심했는지 등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 과정에서 느낀 감정들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니키는 철석같이 내 마음을 이해했다. 한국과 반대편 나라에서 그녀 역시 삶의 모습만 달랐을 뿐, 인생의 중요한 지점에서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고 이렇게 뉴욕에서 우리는 만났다.
니키가 나를 대하는 방식을 보며 나는 종종 생각에 잠기곤 했다. 겉으론 그럴듯해 보여도 구멍이 많은 헛똑똑인 나와는 달리, 니키는 똑똑하고 생각이 명확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좋고 싫음이 분명했지만, 그 안에 따뜻한 배려심을 품고 있었다. 사적인 인간관계에서는 거절하는 게 불편해서 애매하게 대답하는 나와는 달리, 미키는 "난 지금 배고프진 않지만 네가 먹을 때 같이 있어 줄 수 있어."라든지 "나는 여기서 흥미로운 게 없긴 하지만 너는 보고 싶은 것들을 충분히 다 보도록 해."라는 말을 하곤 했다.
처음에 니키의 이런 말들이 숨은 의도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다소 불편했지만, 몇 번 니키를 겪고 나서 나는 그게 정말로 니키의 순수한 마음임을 알게 되었다. 솔직한 자신의 취향을 밝히지만 너를 위해 기꺼이 뭔가를 하겠다는 진심. 나는 그녀의 이러한 화법이 합리적이면서도 따뜻하게 느껴졌다. 서로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도 함께 시간을 보내고 마음을 나누는 것이, 마치 성숙한 우정의 모습처럼 느껴졌다. 니키는 내가 내 감정을 표현하는 데 익숙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내 표정이 애매해 보이면 "지금 괜찮은 거지?" "네가 원하는 걸 말해봐"라고 나의 의사를 물어봐 주었다. 나는 그게 참 고마웠다. 니키를 만나는 동안 좋고 싫음을 표현하는 게 점점 편해졌다.
똑쟁이 니키에게도 취약한 점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음식이었다. 니키는 햄버거와 프렌치프라이를 정말 좋아했다. 뉴욕에서 지내면서 살이 많이 쪘다며 볼록한 배를 만지며 속상해했지만, 미국의 두껍고 짭짤한 프렌치프라이를 먹을 때마다 맛있다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한 번씩 건강을 챙기기 위해 채소가 가득한 샌드위치를 나눠 먹을 때면, 니키는 그 샌드위치를 정말 맛없게 먹었다.
뉴욕에서의 마지막 날, 나는 니키와 맨해튼 미드타운을 함께 걸었다. 니키는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에서, 록펠러 센터 앞에서, 라디오 시티 뮤직홀 앞에서 열심히 나의 모습을 찍어주었고, 내가 최애 음식 치폴레를 마지막 음식으로 먹고 있을 때 옆에 함께 있어 주었다.
내가 떠난 후에도 몇 주 더 머물 예정이었던 니키는 마지막 순간에도 "정말 안 가면 안 되는 거지?"라고 아쉬운 마음을 표현해 주었다. 나는 한국에 돌아가면 뉴욕에서의 일들을 글로 정리할 거라 말했고, 니키는 헝가리로 돌아가면 뉴욕에서 일하는 것을 목표로 이직을 준비할 거라 했다. 우리는 씩씩하게 다시 헤쳐나가 보자고 다짐했다.
시간이 지나 니키 역시 집으로 돌아간 후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은 연락을 주고받는다. 헝가리와 한국의 시차는 8시간이어서 주로 자정이 넘은 시간에 니키로부터 메시지를 받는다. 요즘 한국에 독감이 유행인데 니키도 독감에 걸려 꼼짝없이 누워있다고 했다. 나는 햄버거 같은 패스트푸드 말고 제대로 된 음식을 먹어야 한다고 잔소리했다.
며칠 전에는 헝가리 부다페스트가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신혼여행지나 동유럽 여행지로 인기가 많다고 얘기했더니, 니키가 매트리스 사진을 보내며 '이걸 사둘 테니 우리 집에서 지내'라고 한다. 자기 차로 함께 여행도 다니고, 근처 나라도 돌아보자고 하는 말에 구미가 당겨 비행시간을 찾아보니 직항으로만 12시간. 이렇게 대화하고 있지만 우리가 정말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 새삼 느껴졌다.
2025년에는 니키도 나도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우리가 원하는 그곳에 도달할 수 있도록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