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불안은 음식에서 나타났다
나는 가리는 것 없이 잘 먹는 아이였다. '우리 가족에게 외식보다는 집 밥을 먹인다'를 실천했던 음식 솜씨 좋은 엄마는 제철에 맞는 한식으로 나를 키우셨다. 어린아이들이 그렇듯 어른들의 "어머, 00이는 어쩜 이렇게 잘 먹어?" 칭찬이 좋았던 나는, 나물이며 채소며 열심히 먹는 아이였다.
양질의 음식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엄마는 줄곧 우리 남매에게 과자, 초콜릿, 떡볶이 같은 군것질은 좋지 않은 음식이라고 말씀하셨고 나는 어렸을 때 가공식품을 먹은 기억이 별로 없다. 어린 시절 우리 집에는 과자가 없었는데, 친구네 집에 놀러 갔을 때 과자가 거실 테이블과 주방 식탁에 널려있는 걸 보고 집 안에 과자가 이렇게 많을 수도 있구나 충격을 받은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수업이 끝나고 친구와 함께 하교할 때 친구들이 "과자 사 먹자", "떡볶이 사 먹자"라고 나를 꼬드겼을 때, 나는 내 세상의 전부였던 엄마의 말을 떠올리며 웬만하면 거절하려고 애썼다. 가끔은 먹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때도 있었지만, 나는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흐르고 스무 살이 됐다. 나의 스무 살 시작은 우울했다. 가고 싶은 대학과 학과에 진학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친한 친구들 중 일부는 원하는 좋은 대학에 갔고, 일부는 재수생활을 했다. 나처럼 가기 싫은 대학에 진학한 경우는 없었다. 원하는 대학에 간 친구들은 졸업 전부터 성형수술을 하느라 바빴고, 그 이후엔 즐거운 학교 생활을 하느라, 소개팅을 하고 연애를 하느라 바빴다. 또 재수를 선택한 친구들은 다시 수험생 생활을 하느라 바빴다. 가깝게 지내던 친구들은 나를 잊은 듯했다.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학교 친구와의 만남도 즐겁지 않았던 나는 그렇게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우울한 동굴 속에서 나는 폭식을 하기 시작했다. 학교가 끝나고 집 앞 지하철 역에 내리면 근처 마트로 향했다. 마트를 한 바퀴 돌아보며 과자를 담기 시작했다. 한두 봉지가 아니라, 매번 12개, 24개입 박스 과자를 담았다. 다음에는 빵집이나 도넛 가게에 가서 빵과 도넛을 샀다. 내 백팩은 과자와 빵과 도넛으로 가득 찼다.
먹방은 저녁을 먹은 후 시작됐다. 방 안으로 들어와 영화를 보며 빵과 과자를 먹어댔다. 그 순간만큼은 아무런 우울도 분노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보던 영화가 끝이 나고, 사가지고 온 과자와 빵도 다 먹고 나면 큰 공허함이 남았다. 배가 너무 불렀다. 미련하게 먹은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이 들었다.
반복되는 폭식에 살이 급격히 쪘다. 외출할 때마다 조여 오는 바지 때문에 신경질이 났다. 안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 피부도 푸석푸석해지고 스무 살답지 않게 안색이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폭식을 끊을 수가 없었다. 당장 오늘 하루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울감의 늪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달고 짠 과자들이 필요했다. '오늘은 곧장 집에 가자'라고 결심했지만, 결국 나는 망설이다가 다시 마트로 향했다. '이걸 다 먹지는 말자'라고 결심했지만 나는 결국 그 많은 것들을 밤늦게까지 다 먹어버리고 말았다. 다음날 아침이 되면 후회가 밀려왔다. 살고 싶어서 먹어댔지만, 그저 살고만 있는 삶의 나날들이었다.
결국 나는 원하는 대학과 학과에 편입했지만, 여전히 폭식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학기가 시작하면 학과 공부며, 알바며, 동아리 생활이며 정신이 없었다. 빡센 복수전공 수업 스케줄과 걸핏하면 찾아오는 크고 작은 시험들, 중학생, 고등학생 아이들의 과외 준비와 동아리 생활이 너무 벅찼다. 밤이면 다시 폭식을 하기 시작했고 다음날 아침이면 후회하는 날이 반복됐다.
학기가 끝나고 방학이 되면 어김없이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음식을 최대한 줄이고 운동을 했다. 그럴수록 음식에 대한 집착이 더욱 심해졌다. 그렇게 고통스럽게 살을 빼고 학기가 시작되면 다시 폭식을 시작했다. 그러고 나면 내 몸은 예전만큼의 운동으로는 살이 빠지지 않았다. 더 높은 강도의 운동과 절식을 진행되어야 몸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점점 지쳐갔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지만 어떻게 이렇게 사는 삶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이 끔찍했던 굴레는 내가 첫 회사에 입사하면서 갑작스럽게 막을 내렸다. 처음 들어간 회사는 일이 많고 열정페이를 요구하는 악덕 중소기업이었다. 인턴경험도 없고 아날로그 감성인 내가 오로지 오기로 선택한 '디지털 마케팅' 분야는 말 그대로 맨 땅에 헤딩이었다.
나는 일 잘하는 신입사원이고 싶었다. 정신없이 몰아치는 일을 완벽하게 해내야 한다는 집착과 값싸게 직원들을 굴리는 회사의 악덕 횡포에 나는 입사 2주 만에 5kg가 빠졌버렸다. 먹은 음식물 족족 설사를 했다. 음식에 대한 갈망은 오늘 할 업무에 대한 부담감과 두려움으로 대체되었다. 어느덧 나는 소화가 잘 안 되는 빵, 과자, 케이크보다는 소화가 잘되는 한식, 밥을 말아 편하게 넘길 수 있는 찌개와 국만 겨우 먹을 수 있었다.
야근이 많은 고강도 업무의 사무실 환경에서 직원들은 살이 빠지거나 살이 쪘다. 나는 전자였지만, 대부분의 직원들은 후자였다. 직원들은 주로 저녁으로 고칼로리 배달음식을 시켜 먹었고, 하루종일 12시간 넘게 앉아있는 삶을 반복하면서 생기를 잃고 살이 쪘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입사한 20대 후반의 동기 남자 직원은 어린 나이에 통풍에 걸렸다. 야근하고 집에 가서 스트레스를 풀 요량으로 술과 과자, 치킨을 자주 먹었다고 했다. 야근하는 어느 날 밤, 절뚝이며 걷는 동기의 모습을 보고 나는 울컥하고 말았다. 우리는 이렇게 살기엔 아까운 청춘이었다.
나는 어떻게든 좋은 환경으로 이직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몇 년 후 이뤄냈다. 하지만 쌍놈집 머슴살이나 대감집 머슴살이나 똑같은 머슴살이의 애환이 있다. 나는 이전처럼 밥을 '못' 먹지는 않았지만 밥맛이 없었다. 회사가 고집하는 비효율적인 구조, 절대복종적인 업무 체계 속에서 고객보다는 한 사람만을 위해 일하는 보람 없는 하루가 계속됐다.
의사 결정권자의 말 한마디에 업무 경력이 도합 몇십 년은 되는 경력직 구성의 우리 팀이 지진에 휘청이는 건물처럼 위태롭게 움직였다. 집에 가면 나는 기진맥진을 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먹는 것조차 귀찮았다. 엄마의 정성 어린 반찬은 냉장고 어딘가에서 썩어나가고 있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영어공부를 에너지도, 책 한 권을 읽을 에너지도 없었다. 친구 만나는 것도 귀찮았다. 보람 없는 삶 속에서 매일을 깜깜한 숲 속에 길을 잃은 것처럼 막막하게 살았다. 그러다가 나는 점심시간에 영어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웬만한 사람이 아니면 점심약속을 잡지 않고 점심시간이면 영어학원으로 갔다. 그러다 보니 회사에서 거의 먹는 일이 없게 되었다. 어떤 날은 집에서 텀블러에 챙겨간 카페라테가 전부이기도 했고, 어떤 날은 ABC 주스와 단백질바가 먹은 전부이기도 했다. 일하는 데 많은 에너지를 많이 쏟은 날은 학원에 가기 전에 편의점에 들러 삼각김밥을 사 먹곤 했다. 나는 영어학원에서 나처럼 영어를 좋아하는 비슷 취미의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는 그 40분이 참 좋았다. 그곳에서 나는 즐거웠고, 내 마음은 평온했다.
하지만 소식 생활은 내 몸에 무리가 많이 갔던 모양이다. 면역력이 극도로 나빠졌다. 생전 생기지 않았던 다래끼와 피부병이 생겼고, 이러다 말겠지 싶었던 증상들이 몇 주나 지속되었다. 나는 학원을 안 가는 날이면 피부과, 안과, 내과, 산부인과 등 여러 병원들을 가야 했다. 매일 빈속에 커피를 마시면서 위장도 안 좋아졌다. 속이 쓰린 날들이 계속됐다.
이때의 나는 말라있었다. 또래 여자 직원들은 가끔 내게 "00님은 어떻게 이렇게 말랐어요? 부러워요."하고 말을 붙였는데, 먹는 게 별로 없다 보니 마른 것이었다. 이를 알리 없는 직원들은 내가 체질적으로 마른 것으로 알고 부럽다고들 했다. 나는 어느새 먹는 데는 별로 관심이 없는 30대 직장인이 되어 있었다.
9년의 커리어를 마무리 짓고, 요즘 나는 하루 두 끼를, 때때로 그 이상을 챙겨 먹는다. 일어나서 밥을 먹고, 한 시간 뒤쯤 근처 카페에 가서 카페라테를 테이크아웃한다. 빈 속에 커피를 먹을 일이 없으니 속 쓰릴 일은 없다.
직장 생활할 때보다 시간적 여유가 생겼으니 대부분 음식은 직접 해 먹는다. 파, 양파, 마늘, 고추를 언제든지 먹을 수 있게 씻어 정리해 두니, 찌개, 국은 금방 만들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엄마표 반찬도 버리는 일 없이 다 먹게 되었다. 전에는 엄마가 멸치볶음, 나물 등 밑반찬을 잔뜩 챙겨줄 때면 그 정성이 고맙다가도 저걸 언제 다 먹지 싶었는데, 이제는 매일 챙겨 먹을 수 있음에 감사하다.
그렇게 소박한 집밥을 해 먹다가 한 번씩 자극적인 맛이 생각나서 분식이나 빵을 배달해 먹으면 혈당이 오르는지 심장 두근두근한다. 내 몸은 이제 자극적인 맛을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전에는 어렵게 휴가를 내어 여행을 가도 잘 먹질 못했다. 그런 내가 바꼈다. 최근 다녀온 대만에서 나는 하루에 다섯 종류 이상의 음식을 먹었다. 마음에 여유와 위장의 크기는 비례하여 작동하는 듯하다.
나는 20대 초중반의 폭식을 지나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의 소식을 지나왔다. 이제 나는 정식하고 싶다. 나를 위해 제때, 바른 방법으로 음식을 챙겨 먹고 싶다. 나를 잘 보듬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