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에게 인형이란
어학원 첫날이었다. 수업이 끝난 후 친구들과 함께 맨해튼을 거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특별히 목적지는 없었지만, 맨해튼은 온갖 유명한 것들로 가득한 곳이라 눈에 띄는 상점들이 한 번쯤 들어본 장소들이었다.
우리는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에서 주인공들이 자주 찾던 매그놀리아 베이커리를 발견했다. 한국인 동생이 여기서 바나나 푸딩을 꼭 사 먹어야 한다고 해서 각자 하나씩 M사이즈의 푸딩을 사들고 나오는 길이었다.
베이커리 옆으로 커다란 창문에 바비인형과 다양한 봉제인형들이 전시된 인형 가게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어릴 적 바비 인형은 돈이 있어도 쉽게 구할 수 없었던, 바다 건너의 미지의 물건 아니었던가?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떠올리게 하는 커다란 인형 솜 충전 기계와 알록달록한 상점 내부의 모습에 이끌려 나는 홀린 듯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따뜻한 동화 속 나라가 펼쳐졌다. 놀이공원에서 들을법한 경쾌한 음악이 울려 퍼지고 있었고, 한쪽에는 귀여운 봉제인형들이, 다른 한쪽에는 동화책과 장난감이 높이 쌓여있었다. 귀여운 유니폼을 입은 직원들은 저마다 날아다니는 장난감을 시연하기도 하고, 장난감에 대해 설명을 해주고 있었다.
상점 1층 안쪽으로 들어가니 민트색으로 꾸며진 카페가 보였고, 그 앞에 사람들이 줄을 길게 서 있었다. 나는 디저트를 파는 곳인 줄 알고 가봤더니, "뭐야!! 너무 귀엽잖아!!" 친구들과 나는 소리를 질렀다. 젤리캣 다이너(Jellycat Diner)라고 쓰인 식당 컨셉의 공간에서 직원이 팬케이크 인형을 현란한 프라이팬 손목 스냅을 선보이며 굽고 있었던 것이다.
> 젤리캣에 대한 더 많은 정보는 여기!
https://eu.jellycat.com/jellycat-diner-experience-new-york/
어린 시절, 인형은 어린아이들을 위한 물건이라고 배웠다. 초등학교 3학년 때쯤 엄마는 내가 갖고 놀던 미미, 쥬쥬 인형들을 버리셨다. 학교에서 돌아오니 인형들은 없었고 이미 동네 꼬마 아이들이 내 인형들을 가져갔다고 하셨다. 엄마는 내가 인형놀이를 좋아하는 걸 걱정하셨던 것이다. 나는 그 염려 때문에 인형놀이를 좋아하는 나 자신을 걱정하기도 했다. 상상력이 풍부했던 나는, 아줌마가 된 내가 인형놀이를 하는 모습을 한 번씩 떠올리곤 했다.
하지만 나이를 먹고 보니, 엄마가 걱정할만한 것이었을까 싶다. 친구네 집에 놀러 가보면 버리지 않고 고이 모셔둔 어린 시절 갖고 놀던 인형이 전시돼 있기도 했고, 무엇보다 요즘은 피규어처럼 성인이 즐기는 인형도 많지 않은가.
실제로 이 귀여운 젤리캣 다이너 퍼포먼스를 보기 위해 인형을 사고 줄을 선 사람들 중 절반 이상은 성인이었다. 시간이 지나도 우리 모두에게는 저마다 간직하고 싶은 동심이 있다. 나이에 맞지 않는 유치함이라고 치부하기보다는 그 동심을 지키는 것 또한 건강한 어른이 되는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 돌아와서 유튜브를 보는데 우연히 가챠(일본에서 만든 랜덤 뽑기 게임으로 주로 동전을 넣고 캡슐에 들은 장난감을 뽑는 형태) 브이로그 영상을 보게 됐다. 나와 몇 살 차이 나지 않는 한 커플이 국내 가챠 전문점을 돌아다니며 가챠로 뽑은 물건들을 리뷰하는 영상이었다.
내가 아는 만화라고 해봐야 초등학교 때 봤던 '카드캡터 체리'나 '포켓몬' 정도이지만, 여전히 인기가 많은 고전이라 종종 언급되는 것이 반가워서 흥미롭게 영상을 봤다. 그렇게 하루에 한 두 편씩 영상을 계속 보게 되었다.
며칠 보다 보니 가챠가 궁금해졌다. 마침 주말이었고 별다른 일정도 없었다. 남편에게 말했다. "가챠 하러 갈래?"
우리는 집에서 멀지 않은 가챠 전문점 하나를 골라 찾아갔다. 무인으로 운영되는 곳이었고 다양한 가챠 아이템이 있었다. 나는 어떤 걸 뽑아볼지 아이템 하나하나를 구경하다가 어린 시절 인기가 참 많았던 미피 캐릭터로 된 작은 파우치 아이템을 발견했다.
미피 파우치 아이템은 흰색 클래식 버전과 회색, 초록색, 노란색, 분홍색 다섯 가지 종류의 미피 버전이 있었다. 나는 내가 익히 봐왔던 흰색 미피가 갖고 싶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통 안을 들여다봤지만 어떤 색깔의 미피가 나올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운명에 맡기는 수밖에...!
초등학교 저학년 때 몇 번 해보고 실로 오랜만이었다. 어릴 때는 한두 번 해볼 수 있었지만 이제는 원하는 만큼 할 수 있다니, 내가 성공한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교환한 가챠 전용 동전을 넣고 손잡이를 돌리는 게 전부인 단순한 행동이었지만, 어린 시절의 향수가 더해지니 괜히 신이 나고 즐거웠다.
드르륵- 탁. 캡슐이 떨어졌다. 두근 거리는 마음으로 캡슐 안으로 보이는 아이템을 확인하곤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꺄!! 하얀 미피다!!" 초심자의 행운이 작용했을까? 원하던 아이템을 뽑은 나는 캡슐을 흔들며 기뻐했다.
남편과 나는 가챠도 하고 근처 인형 뽑기 방에서 인형 뽑기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쓴 돈은 총 만 원. 만 원의 행복이었다.
SNS 어딘가에서 이런 글을 본 적이 있다. '낭만이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무언가를 하는 것'이라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시간을 내는 일, 스스로를 위해 꽃을 사는 일. 어떤 의미에서는 없어도 그만인 것들이지만, 바로 그런 사소한 행위들이 삶을 낭만적으로 만드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어른에게 인형이란, 어쩌면 가장 순수한 형태의 낭만이지 않을까? 누군가에게 과시할 명품 가방도, 자랑할 예쁜 옷도 아닌, 오로지 나를 위해 선택한 작은 귀여움. 사람이든 물건이든 귀여워할 줄 아는 마음을 계속 간직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