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외국에서 한국인은 주로 한국인끼리만 어울린다고. 그 나라 사람들과 교류하며 문화를 배우기보다는 한국인끼리만 다니면서 폐쇄적인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런 현상은 한국인들뿐만 아니라 아시아 문화권 전반에서 흔히 볼 수 있다고도 했다. 아시아인은 유독 같은 문화권 사람끼리 모이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어학원 첫날 수업이 끝난 후 신입생들이 식사하는 자리에서 만난 한국인 동생은, 본인은 한국인들과 어울리지 않겠다고 내게 말했다. 영어를 배우러 어학원에 온 만큼 한국인들과 지내는 걸 피할 거라고. 나중에 그 친구는 나와도 한번 전망대에 같이 간 적 있는 일본인 친구들과 주로 같이 다니는 것 같았다. 한국인을 피해도 일본인들과 다니는 건 괜찮았던 모양이다.
나는 내향적인 사람이지만 새로운 사람에게 말 거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없어서 인종이나 출신 나라와 상관없이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고 싶었다. 짜이쉬안 언니, 서윤 언니와 어학원 수업이 끝나고 같이 점심을 먹거나 관광하기도 했지만, 나는 다른 사람들과도 적극적으로 어울렸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문화의 다양성을 알아가는 건 뉴욕에서 할 수 있는 특별한 경험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내가 어학원에서 3주간 있으면서 느낀 건, 끼리끼리 문화는 비단 아시아인들만의 특징이 아니라는 것이다. 반 친구들과 어울리며, 또 수업 후 액티비티에 참여하면서 흥미로웠던 점은 사람들이 공통된 문화를 기반으로 자연스럽게 모여든다는 것이었다. 스페인과 브라질, 멕시코처럼 라틴 문화를 공유한 이들은 서로 친밀하게 어울렸고, 스위스, 프랑스, 독일처럼 유럽 대륙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은 그들끼리 유독 가깝게 지냈다. 때때로 그들과 더 가까워지고 싶어서 수업이 끝난 뒤 함께 놀러 갈 곳을 제안하기도 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대게 "초대해 줘서 고마워. 하지만 생각해 볼게."와 같은 돌려 말한 거절이었다.
우리는 수업 시간에 화기애애하게 토론을 나눴지만, 우리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그룹 간의 경계가 존재했다. 수업이 끝나고 같이 어딜 가자는 내 제안을 거절한 프랑스 친구가, 새로운 스페인 사람이 오자마자 자연스럽게 그녀를 자기 무리에 소개하는 모습을 보고는 알 수 없는 씁쓸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나와 비슷한 사람에게 끌리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듯, 익숙한 문화를 공유한 사람이나 나와 비슷한 외모의 사람에게 마음이 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생각한다. 반면에, 누구에게나 열린 마음으로 다가가는 친구들도 있었다. 겉모습에 대한 선입견 없이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진심으로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 나처럼 이곳에서 만난 친구들을 통해 문화를 이해하고 시야를 넓히려는 사람들 말이다.
하루는 수업이 끝나고 점심을 먹어야겠는데, 날도 좋은데 혼자 먹고 싶지는 않았다. 마침, 학원 엘리베이터 앞에서 멕시코에서 온 두 명의 여성을 만났다. 나는 "이번 주에 처음 학원에 온 거야?", "숙소는 어디야?", "수업은 재미있니?" 라며 말을 붙였고, 잠깐의 스몰 토킹을 하다가, 혹시 지금 점심 먹으러 가는 길이라면 함께해도 되겠냐고 물었다. 지금 처음 본 사람이 갑자기 밥을 같이 먹자고 하니 황당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들은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그중 한 명은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는 사람이었다. 도자기처럼 매끈한 피부에 화려한 이목구비, 가슴이 드러난 타이트한 옷차림을 보니 인플루언서 또는 연예인 같았다. 점심을 먹으며 들은 얘기로는, 그녀는 남편이 유명한 DJ라고 했다. 자신의 인스타그램을 보여주었는데, 사진 속 삶은 예상대로 화려했다. 그녀는 어린 아들을 가족에게 잠시 맡기고 뉴욕 여행을 왔다고 했다. 영어가 유창하지는 않았지만 열심히 소통하려고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고, 친절했다. 식사 중에 티슈를 건네주거나 자신이 산 음료를 종이컵에 나누어 맛보라며 권하기도 했다. 작은 배려들이 자연스러워 그녀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후 어학원 화장실에 종종 만날때마다 그녀와 반갑게 인사하곤 했다. 그녀와 말하지 않았다면 겉모습만 보고 왠지 도도한 깍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 역시 이곳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스스로 모르는 사이에 쌓였던 고정관념을 하나씩 허물어가는 걸 배웠다.
유럽 아저씨들과 한국인 가이드
어느 날 문법을 가르치는 호세 선생님이 아시아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는 퀸즈 지역에 위치한 플러싱(Flushing)을 소개해 주었다. 수업 중 음식 얘기가 나왔는데, 짜이쉬안 언니가 대만 음식이 그립다고 말하니, 여기 가면 다양한 아시아 음식을 맛볼 수 있고 본인의 최애 동네 중 하나라고 하면서. 호기심이 생긴 나는 수업이 끝나고 반 친구들에게 내일 시간이 되는 사람은 나와 함께 플러싱에 가자고 제안했다.
다음날 수업이 끝나고 프랑스 친구 크리스토프와 스위스 친구 마커스가 내게 왔다. 플러싱에 같이 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플러싱에서 점심으로 아시아 음식을 먹어보기로 했다. 타임스퀘어역에서 7호선 종점인 플러싱 메인 스트리트 역까지는 4~50분 정도 걸렸다. 친구라 했지만, 이들은 사실 50대로 보이는 (우리는 나이 정보는 공유하지 않았으므로 추정이다) 아저씨들이었다.
스위스에서 온 마커스는, 마르고 탄탄한 몸에서 드러나듯 마라톤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세계 각지에서 열리는 유명한 마라톤에 참석하는 것이 취미이고, 뉴욕에 온 것도 11월 3일에 있을 뉴욕 마라톤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마커스는 유럽 언니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우리 반에 새로 온 브라질 언니가 시종일관 그를 관심 있게 눈여겨봤다는 건 안 비밀) 철도 기관사인 크리스토프는 아들이 뉴욕에서 일하고 있는데 그의 여자친구가 중국인이라고 했다. 우리는 플러싱에 도착할 때까지 담임선생님인 조나단이 얼마나 특이한 사람인지에 대한 뒷담(?)과 각자 뉴욕에서 찍은 사진들을 공유했다.
지하철을 나오자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다. 마치 중국의 거리에 온 듯, 사방에 보이는 건물 간판과 안내판들이 중국어로 가득했고, 보이는 사람들의 90%는 아시아 사람들이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옆에 있는 한인타운에 가본 적이 있지만, 그곳은 한 블록 정도 되는 한인 거리의 느낌이었다면, 여기는 커다란 마을과도 같았다. 나도 플러싱은 처음이었고 아는 정보가 딱히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같은 아시아인인 데다가 플러싱 나들이를 제안한 건 나였으니, 연신 이곳을 신기하게 관찰하는 이 두 아저씨를 잘 리드해야겠다는 일종의 사명감이 들었다. 이왕이면 중국 음식보다는 한식을 먹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평점이 괜찮은 한식당으로 데리고 갔다.
마라톤 이틀 전이라 식단 조절을 한다는 마커스에게는 비교적 가벼운 음식인 비빔밥을, 고기는 다 좋다는 크리스토프에게는 돈가스를 추천했고, 매운 음식이 그리웠던 나는 매운 낚지볶음을 시켰다. 한인 3세 같아 보이는 종업원에게 플러싱에 처음 왔는데 가볼 만한 곳을 알려달라고 물었고, 그는 친절하게도 구경하면 좋을 곳들을 알려주었다. 음식이 나왔고, 어설프게 젓가락질하며 맛있다고 좋아하는 아저씨들을 보며 내심 한국의 문화를 알린 것 같아 뿌듯했다.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플러싱 시내 거리를 거닐었다. 거리에는 음식부터 골동품까지 다양한 물건을 파는 상인들의 목소리가 울러 퍼졌고, 구경하는 사람들과 제 갈 길을 분주히 가는 사람들로 북적였고 활기가 넘쳤다. 길가에는 중국 전통 시장에서나 볼 법한 메뚜기, 귀뚜라미 같은 벌레 꼬치들이 진열되어 있었고, 그걸 바라보는 아저씨들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내가 본 적 없는 과일들과 음식들도 많았다. 싱가포르와 홍콩의 재래시장을 구경해 본 적이 있지만 난생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마커스는 음식 앞에 적힌 중국어를 가리키며 "이거 읽을 수 있어?"라고 천진난만하게 물었고 나는 "난 한국인이고, 저건 중국어야."하고 응수했다. 여기저기서 중국어가 들렸고, 거리에 보이는 미국식 건물들이 생경하게 느껴졌다. 생경한 건 풍경만이 아니었다. 왼쪽엔 주황색 NewYork 티셔츠를 입은 관광객 모드의 크리스토퍼와 오른쪽엔 멋진 선글라스를 낀 마커스, 그리고 그 가운데 곱슬머리를 한 작은 동양 여자의 조합이라니.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 신선한 조합이 웃겼다.
우리는 그날 플러싱 시내를 구경하고, 어느 베트남 카페에서 진한 커피 한 잔씩 마시며 수다를 떨다가 맨해튼으로 돌아왔다. 우리의 플러싱 나들이 스토리는 수업에서 재미있는 얘깃거리가 되었다. 그리고 몇 주 뒤, 뉴욕 출국을 하루 앞둔 날, 나는 뉴저지의 저지가든몰 아울렛에서 운동화를 고르고 있는 마커스와 우연히 만났다. 우연한 만남이 주는 놀라움에 즐거워하며, 우리는 서로의 안녕을 기원하며 헤어졌다.
이제는 각자의 일상에서 나는 이렇게 아저씨들과 함께한 즐거운 추억을 떠올리고, 그들은 뉴욕에서 경험한 중국 문화와 한국 음식을 소소하게 기억하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부디 오래오래 건강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