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둘 하나의 기억
엄마는 요리를 참 잘한다. 직접 면을 반죽해 기계로 면을 뽑아 국수를 만들어주셨고 여름철이 되면 미꾸라지를 직접 곱게 갈고 갈아 추어탕을 하셨고 내가 고구마튀김을 한참 좋아할 땐 부엌에 한동안 고구마튀김 냄새가 가득했다.
요리와 음식에는 큰 관심이 없는 딸이 굶고 다니진 않을지 걱정되어 한 번씩 아빠 편으로 사과 상자만 한 큰 스티로폼 박스에 내가 좋아하는 멸치볶음이며 미역국이며 보내시곤 하는데, 아빠는 내게 알리시지도 않고 먼 길을 무거운 박스를 들고 지하철을 타고 오시곤 조용히 집 앞에 두고 가셨다. 박스에는 낯익은 노란 포스트잇에 '잘 챙겨 먹고 다녀'라는 엄마의 글씨가 쓰여 있었다.
나도 나이를 먹고 보니, 먹는 것을 즐기지 않는 엄마가 그토록 열심히 재주껏 요리하셨던 건 순전히 가족을 위한 것이란 걸 깨달았다.
어린 시절 멋모르는 내 눈에도 엄마가 좋아하는 게 하나 보였는데 바로 커피였다. 주방에는 머그잔 크기의 도자기로 만들어진 알록달록한 용기 3개가 세트로 있었는데 거기엔 커피 가루와 설탕, 프림이 보관돼 있었다. 집에 손님이 오시면 엄마는 "어떻게 해줄까? 둘둘 하나?" 하고 손님 취향을 확인하시곤 주전자에 물을 받아 물을 끓이셨다. 단지 '티스푼 몇 번 타줄까?'를 물었던 '둘둘하나'가 어린 내게는 어른들이 하는 복잡한 수신호같이 느껴졌다. 엄마를 도와 의젓하게 손님께 커피를 내드리고 싶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상일 뿐이었다.
시간이 흘러 도자기 용기 세트는 고춧가루, 흑설탕, 소금 보관용 통이 되었고, 엄마는 노란 커피믹스 스틱을 하루에 두세 잔씩 마셨다. 매일 꼬박꼬박 커피를 마시는 엄마를 보며 한 번씩 커피 맛이 궁금해 티스푼으로 조금 떠서 먹어보면 정말 맛이 없었다. 그런 나를 보며 엄마는 "커피는 나쁜 거야. 먹지 않는 게 좋아."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엄마의 그런 바람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엄마의 커피 의존이 내게 부정적인 인상으로 남았던 걸까. 나는 또래들보다 늦게 커피에 정을 붙였다. 고3 수험생활 때도 초콜릿 같은 단것을 주로 먹었고 대학생 때도 달달한 것들로 시험기간 스트레스를 달랬다. 언젠가 친한 교수님과 얘기하다가 커피 주제가 나왔는데, 내가 커피가 맛있는 줄 모르겠다고 하자 교수님은 "그건 네가 진짜 맛있는 커피를 안 마셔봐서 그런 거야."라고 말씀하셨다. 이후 시간이 흘러 친구와 정동길을 걷다 우연히 정동극장에 있는 한 카페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마땅히 시킬 것이 보이지 않는 나는 따뜻한 라를 시켜 마셨다. 그리고 처음이었다. 커피가 맛있다고 생각된 것은. 그때 불현듯 교수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그것은 내게 유레카와 같은 순간이었다. 오랫동안 이해되지 않았던 엄마의 커피 사랑을 이해하게 되는.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나는 본격적으로 커피에 정을 붙였다. 사실 그건 나로서는 선택권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매일 이어지는 야근과 업무 스트레스를 견뎌내려면 커피는 필수 불가결한 것이었다. 시작은 그랬지만, 연차가 높아지고 나름의 내공도 쌓이면서 커피 취향도 생기고 커피 맛을 예민하게 구분할 줄도 알게 됐다.
나는 흰 우유를 워낙 좋아하기 때문에 커피도 웬만하면 라테만 마시는데, 새로운 지역에 갈 때마다 라테 맛집을 찾으려 애쓴다. 주말엔 격주 간격으로 유명한 로스터리 카페를 찾아 원두를 구매해 집에 있는 커피 기계로 라테를 만들어 텀블러에 싸서 출근하곤 했다. 경제적인 이유도, 환경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커피를 사무실에서 두고 오랫동안 마시는 탓에 보냉 기능이 있는 텀블러에 커피를 보관하는 게 맛을 유지하는데 훨씬 좋았기 때문이다.
뉴욕에 오고 처음 며칠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실 틈이 없었다. 공항 근처 호텔에 있다가 맨해튼으로 넘어온 후 충격적인 숙박 컨디션에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붙잡기까지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고 투어를 몇 개 하면서 정신이 없었다.
제아무리 뉴욕이 별천지라 하더라도 라테 없이는 더 이상 생활하는 게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졌을 때 유명하다는 카페에 가서 라테를 마셨는데, 웬걸. 밍밍하고 맛이 없었다. 그 이후로도 아침에 어학원에 가기 전 타임스퀘어 부근에서 평점이 4점대 후반으로 좋은 카페를 찾아 커피를 마셔봤지만 어쩐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맛이었다. 여기는 뉴욕이고 실력이 좋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자본주의 끝판왕 아닌가? 콧대 높은 커피 취향을 갖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학원 수업 시간에 미국의 커피 맛이 너무 밍밍하다고 살짝 불평하니 선생님도 동의한다고 했다. 본인도 좋은 카페를 항상 찾고 있다고. 하지만 여기는 뉴욕이 아닌가. 비록 오늘은 실패했어도 내일 가볼 카페는 차고 넘쳤다. 그리고 나는, 기억에 남을 만한 라테를 만났다.
Sawada coffee
로어 맨해튼에 위치한 'Sawada coffee(사와다 커피)'는 카페 입구가 대로에 나와 있는 것이 아니고, 건물과 건물 사이에 어두운 공간에 있다 보니 찾기가 쉽지 않았다. 여기는 직접 개발한 라테 몇가지를 판다. 내가 시킨 라테는 ‘Black Camo Latte‘로 한 잔에 약 9,500원. 꽤 비싼 가격이라 아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예술 작품과 같은 아름다운 라테아트를 순간 그런 생각은 사라졌다. 라테아트만 봐도 이 집이 잘하는 집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데, 라테를 받고 나서 나는 여기가 진짜라는 걸 알았다. 커피는 진하고 고소하고 달콤한 맛이 조화로웠다. 향과 맛을 음미하며 홀짝홀짝 마시고 나니, 오늘 하루 힘차게 뉴욕을 돌아다닐 수 있을 것 같은 에너지가 생기는 듯했다. 카페 매장은 숲속 근사한 통나무집을 연상케 하는 우드 느낌으로 포근한 느낌을 줬다. 개인의 기호에 맞게 커피와 빵을 즐길 수 있도록 꿀 스틱과 설탕 등을 두어 손님에 대한 배려가 돋보였다.
Culture Espresso
브라이언트 파크 근처에 있는 'Culture Espresso(컬처 에스프레소)'는 커피와 초콜릿 칩 쿠키로 유명한 곳이다. 매장 안에 들어서자, 원두, 티셔츠, 텀블러, 머그잔 굿즈들이 눈길을 끌었다. 알록달록한 컬러가 돋보이는 그림과 분홍색 에스프레소 잔이 어우러져 공간에 활기를 더하며, 들어가는 순간 괜히 기분까지 좋아지게 만드는 곳이었다.
맨해튼의 많은 카페가 그렇듯, 이곳 역시 매장이 작고 바 형태의 좌석이 전부였다. 네다섯 명 정도만 앉을 수 있는 공간이 있었지만, 모두 만석이라 앉을 수가 없었다. 별수 없이 플랫 화이트와 초콜릿 칩 쿠키를 테이크아웃했는데 각각 4.75달러, 4.5달러로 모두 총 13,000원 정도였다. 커피는 깔끔하고 균형 잡힌 맛이었고, 초콜릿 칩 쿠키는 겉은 바삭하면서도 속은 쫀득해 한입 베어 물자마자 왜 이곳의 대 메뉴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깔끔한 커피에 달콤한 초콜릿 칩 쿠키.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조합이었다.
이 두 카페뿐만 아니라 % 아라비카, 블루보틀도 커피 맛이 참 좋았는데, 커피를 잘하는 카페들은 라테아트를 참 잘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보통 라테를 줄 때 테이크아웃의 경우 종이컵 뚜껑을 덮어서 손님에게 준다. 하지만 미국의 카페는 테이크아웃을 하더라도 뚜껑을 끼워주지 않고 커피잔에 내용물을 꽉 차게 담은 채로 주는데, 라테아트를 꼭 만들어 준다. 뚜껑이나 홀더나 빨대는 원하는 대로 챙겨가는 형태이고 특히 빨대는 따로 요청해야 준다.
한 달간 컵에 가득한 예쁜 라테아트를 보다가, 한국에 돌아와 라테를 주문하니 맛은 좋더라도 대충 우유 거품을 흩트려놓은 라테가 왠지 멋없게 느껴졌다. 아마도 한국에서는 뚜껑을 덮은 채로 손님에게 제공하다 보니 손님은 보통 뚜껑을 열지 않고 바로 커피를 마셔버리기 때문에 라테아트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 얘기를 카페에서 오랫동안 일한 적 있는 친구에게 말했더니, 라테아트를 만들고 싶어도 밀려있는 주문들 때문에, 때로는 참을성 없이 기다리는 손님의 눈치가 보여 만들 여유가 없다고 했다. 나 역시 과거 직장인 시절, 커피를 '수혈한다'고 표현했던 사람으로서 그 마음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미국의 감성 가득한 라테를 경험한 이후 나는 한국 카페에서 받은 라테의 뚜껑을 열어 라테 아트가 있는지 슬쩍 확인해 보곤 한다. 오늘도 요즘 자주 가는 카페에서 라테를 테이크아웃하였는데 기대 없이 뚜껑을 열고 확인해 보니 근래 처음이다! 작은 하트 라테아트가 있다. 왠지 모르게 참 반갑고 기쁘다. 이제는 내가 그시절 엄마의 커피 사랑을 이해하고, 나만의 커피 취향을 찾으면서 소소한 행복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