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돌연
미술관의 전시 공간에서 어느 작품의 작가 이력을 보다 보면 '돌연 ~로 떠났다.'라는 글귀를 볼 때가 있다. '돌연 프랑스로 떠났다.' '돌연 미국으로 떠났다.' 급작스레 거주지를 바꿨다는 이 말이 작가의 거침없는 주관과 예술가적 기질을 보여주는 듯하여 참 멋있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예술가를 선망하는 나는 왜 '돌연'이 어려운 건지 잠시 생각에 빠지곤 했다.
초등학생 시절
미국에 대한 기억을 거슬러가 보면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초등학교 1학년 무렵 시작되었던 것 같다. 오빠의 초등학교 같은 반 친구의 엄마인 영문학을 전공한 아줌마에게 처음 영어를 배웠다. 아줌마 댁에서 동갑내기 딸과 함께 영어를 배웠는데, 흥미를 보이며 곧잘 따라 배웠다. 아줌마가 가르쳐 주신 미국식 버터 발음도 잘 따라 했고 무엇보다 영어 공부하는 것을 재밌어했다. 아줌마 댁에서 우리 집까지는 걸어서 10분 거리였는데, 수업이 끝나면 오늘 배운 단어를 중얼거리며 우리 집으로 가곤 했다. 내가 처음 외운 단어는 apple. "A, P, P, L, E, A, P, P, L, E…." 금방 잊어버릴세라 '에이피피엘이'만 무한으로 반복하며 집으로 돌아갔던 그날의 풍경을 기억한다.
영어에 대한 흥미는 미국에 대한 관심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내가 11살이던 무렵 해리 포터 시리즈가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고 나도 전 세계 소녀팬 중 한 명이었다. 당시 나는 해리포터 역을 맡은 '다니엘 래드클리프'의 팬카페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특히 미국에 사는 또래 한국인 친구들과 소통하며 채팅하고 펜팔을 주고받았다. 친구들은 해리포터와 관련된 소식을 팬카페에 올려주기도 하고 내게 국제우편으로 굿즈를 보내주었다. 나도 한국에서만 구할 수 있는 선물들을 보내주곤 했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한국의 학교들과는 달리 비교적 자유로운 미국 생활이 부럽게 느껴지곤 했다.
중, 고등학생 시절
2000년대 초에는 조기유학, 해외 대학 진학이 인기였다. 대형 서점에 가면 민족사관고등학교나 외국어고등학교 합격 전략, 아이비리그 대학에 입학한 학생들의 공부법을 다룬 책들이 베스트셀러로 자리했다. 미스코리아 출신 하버드생 금나나의 <나나 너나 할 수 있다>, 미국 명문대 10곳에 합격한 박원희의 <공부 9단 오기 10단> 같은 책을 읽으며, 나도 언젠가 해외에서 공부해 보고 싶다는 꿈을 키웠다. 그러려면 외국어고등학교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열심히 공부한 끝에 서울의 한 외국어고등학교에 합격했다.
외국어고등학교에서 프랑스어를 전공했는데, 프랑스어반은 단 1개였고 3년 내내 우리는 같은 반이었다. 반에는 집안도 좋고 외모도 출중하고 공부까지 잘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평범한 사춘기 소녀인 나는 그들이 왕자님, 공주님처럼 보였다. 비교 대상과 내가 비슷한 수준이어야 질투심을 느낄 텐데, 당시 내가 느낀 그들과 나의 갭은 너무도 컸다. 무엇보다 힘들었던 건, 잘난 아이들과 치열하게 경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영어를 좋아해서 외국어고등학교에 왔을 뿐인데, 대학에 가려면 영어뿐만 아니라 내가 싫어하는 수학을 비롯한 모든 과목을 잘해야만 했다. 프랑스어도 적성에 맞지 않았다. 게다가 내신은 상대평가로 매겨지는 탓에, 만점을 받지 않으면 좋은 내신 등급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중학생 때 1, 2등을 다투던 나는 꼴찌를 겨우 면하는 수준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왜 공부를 해야 하지? 대학은 왜 가야 하지?'라는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리고 그 생각은 점차 '나는 왜 살아야 하지?'라는 더 근본적인 질문으로 이어졌다. 학교에서는 매일 밤 10시까지 야간 자율 학습을 시켰다. 말이 '자율'이지, 강압적이고 강제적인 것이었다. 나는 억지로 책상에 묶인 채 하루 14시간을 학교에서 보내야 했다. 멍한 채로 의미 없이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나마 나를 위로하는 건 '왜?'를 던지는 게 허용되는 철학적 사상을 다루는 윤리 수업 시간뿐이었다.
대학생 시절
대학에서 철학과 미국 문화학을 복수 전공했다. 철학도, 미국 문화학도 너무나 사랑한 학문이었지만, 사랑의 대가는 가혹했다. 동아리 활동과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업과 그 외의 것들의 균형을 잡기 어려웠다. 미국 문화학은 100% 영어로 진행되었다. 수업엔 외국에서 교환학생으로 온 원어민 학생들, 해외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한국 대학교로 온 원어민과 다름없는 한국인 학우들이 다수 포함돼 있었다. 수업 중 그들과 때때로 토론하고 조별 과제를 할 때마다 영어의 한계를 느꼈다. 하물며 수업 교재는 미국 문학이 아닌가! 옛날 말로 어지럽게 쓰인 문학작품을 매주 몇십 페이지씩 읽고 퀴즈를 보기도 했다. 단어의 뜻을 모두 알고 있어도 좀처럼 해석이 안 되는 문장이 많은 어려운 작품을 부여잡고 있노라면 정말이지 울고 싶었다. 언젠가는 수업도 시험도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미국 문화학 수업의 어느 교수님께 '죄송하지만 힘들어서 못 할 것 같다'라는 문자를 보낸 적이 있다. 감사하게도 그 교수님은 내가 퇴학하려는 줄 알고 깜짝 놀라 전화하시곤 열심히 위로해 주셨다.
교환학생을 가고 싶은 마음에 학교에서 마련한 설명회에 참석했다. 성적 우수생이 되어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교환학생 비용이 생각보다 훨씬 많이 든다는 걸 알았다. 내 학점으로 장학금은 어림도 없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아주 큰 금액은 아니었지만, 빠듯한 집안 형편 속에서 학생인 내게 그 금액은 '불가능'을 의미했다. 그날 밤, 착잡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단념하자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하지만 절친한 친구들이 프랑스며 미국이며 교환학생을 떠나 세계를 누비고 있는 동안, 홀로 한국에 남아 고군분투하는 내 현실이 씁쓸했다. 벽에 부딪힌 듯한 현실에 무력감을 느꼈다.
그 후로도 교환학생을 가지 못했던 일은 오랫동안 후회로 남았다. 시간이 지나 직장 생활을 해보니 그때 다른 방법이 있을 수도 있지 않았나 싶었다. 그렇게 간절했다면, 부모님께 말이라도 해봤다면 해결책이 나오지 않았을까? 하다못해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어서라도 다녀오고, 직장 생활을 하며 갚아나가면 되지 않았을까? 그때는 미처 이런 가능성조차 떠올리지 못했다.
직장인 시절
'문과라 죄송합니다'라는 뜻의 '문송합니다'의 대표자가 나였다. 주전공 철학과의 많은 학우들이 구직을 고려해 경영학과를 비롯한 다른 학과를 전공했을 때 나는 구직시장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미국 문화를 선택했다. 다 알고 선택한 것이기에 후회는 없었지만, 예상한 것만큼 구직활동은 험난했다. 계속되는 서류 광탈. 가고 싶었던 모든 외국계 기업을 포함한 수십 개의 회사 입사 지원에서 실패의 고배를 마셨다. 취업을 위해 졸업을 미루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졸업 후 디지털 마케팅 업계에서 커리어를 시작했다.
첫 회사는 열정페이를 요구하는 악덕 중소기업이었다. 값싸게 직원들을 굴리는 환경에서 이제 막 사회를 처음 경험한 나는 일 잘하는 사원이 되고 싶었고 새벽까지 야근하는 일이 잦았다. 입사 2주 만에 5kg이 빠져버렸다. 먹은 음식물 족족 설사를 했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입사한 20대 후반의 동기 남자 직원은 어린 나이에 통풍에 걸렸다. 야근 후 집에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술과 과자, 치킨을 자주 먹었다고 했다. 야근하는 어느 날 밤, 절뚝이며 걷는 동기의 모습을 보고 나는 울컥하고 말았다. 우리는 이렇게 살기엔 아까운 청춘이었다.
어떻게든 이보다 나은 환경으로 이직해서 사람답게 일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치열하게 일하며 포트폴리오를 쌓았다. 대행사 두 곳을 거쳐 대기업 두 곳에서 마케터로 일했다. 그렇게 달려온 커리어였는데, 네 번째 직장에 오니 공허함이 밀려왔다. 내 월급은 첫 직장에 비해 네 배로 뛰었고, 한때 새벽까지 야근하며 택시를 타고 영동대교를 건너던 나는 이제 정시 퇴근을 하고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문과생도 잘나갈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고, 결국 그렇게 해냈지만, 막상 이뤄놓고 보니 허망한 마음이 들었다. 고등학생 때 수도 없이 자문했던, '나는 왜 살아야 하지?'라는 질문이 다시 찾아왔다. 우울감이 깊어졌다.
영어학원 시절
커리어 시장에서 내 인연이 닿는 곳은 언제나 영어와도, 해외와도 무관한 곳이었다. 최선이 되지 않을 때마다 차선을 선택했지만, 여전히 나는 마음 한편에 미국을 품고 있었고 하루에도 몇 번씩 이 길이 맞는 것인가 자문했고 괴로워했다.
영어를 좋아하지만, 영어 쓸 일이 없으니 실력이 떨어지는 건 당연했다. 점심시간을 활용해 원어민 영어 스피킹 수업을 다니기 시작했다. 40분간 진행되는 이 영어 수업을 듣기 위해 점심시간이 되면 나는 종종걸음으로 학원에 갔고, 수업이 끝나면 늦을세라 급하게 사무실에 복귀하곤 했다.
영어 수업이 있는 날에는 시간이 부족해 보통 점심을 걸렀는데 점심을 먹는 것보다 영어 수업에 가는 게 더 즐거웠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아는 몇 명의 동료들과 가까운 친구들은 내가 영어 수업 들으러 가는 것을 자기 계발 측면으로만 여기고 좋은 말로 '대단하다' 또는 '독하다'라고 했다. 하지만 이건 내가 살기 위해 하는 것이었다. 정확히 뭔진 모르겠지만 내 꿈을 놓지 않겠다는 나의 발악이었고, 전쟁터 같은 사무실을 벗어나 나와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을 만나 마음을 터놓고 소통하는 소중한 시간이기도 했다.
그날은 여느 때와 같이 영어 수업이 끝나고 사무실로 복귀하던 길이었다. 갑자기 울컥하더니 눈물이 차올랐다. 삼삼오오 동료들과 점심을 먹고 복귀하는 거리의 직장인들 사이에서 갑작스러운 감정에 당황한 나는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사실 나는 알고 있었다. 몇 달 전부터 내 마음 안에서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어!'라고 외치고 있다는 것을. 처음 그 목소리는 희미했지만, 시간이 조금씩 지날수록 존재감을 드러냈고 어느덧 마음을 비집고 흘러넘치고 있었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어…. 더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어….
몇 달 후 직장을 그만두었다. 공식적인 퇴사 사유는 불분명했기에 누군가에게는 나의 퇴사가 갑작스러운 것이었고, 이해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돌연 퇴사했다. 하지만 내가 그만둔 것은 결코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십수 년 켜켜이 쌓인 오래된 시간이었고 세상에 나오길 바라는 나의 목소리였다.
나는 잠시 미국으로 떠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