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뉴어크 리버티 공항

by 리틀 골드문트

13시간 그리고 무취

13시간의 비행을 마치고 뉴어크 리버티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13시간의 시차를 생각하면, 비행기를 타기 전 나는 그대로인데 별안간 미국에 있는 셈이었다. 비행기에서 내린 순간 코끝에 스치는 공기는 아무런 향도 없었다. 그야말로 무취. 출입국 심사대로 빠르게 걸어가는 사람들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지난여름부터 통제할 수 없었던 내면의 목소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기까지 걸렸던 시간들. 이후 꼬리에 꼬리를 무는 부정적인 물음표를 이기려 애썼던 과정들. 적당한 선에서 그럴듯하게 주변을 정리하고자 했던 노력들. 어렵고 고됐던 지난날들의 감각은 때때로 견디기 버거운 것들이어서 나는 속수무책으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런데 13시간의 비행과 무취는 과정에 비해 너무도 담백하고 깔끔한 결말이었다.


짐을 꾸역꾸역 넣어 터질듯한 보조 가방과 배낭, 캐리어를 낑낑대며 끌고 공항 밖으로 나오니 이미 자정을 넘긴 시간이었다. 늦은 입국 시간을 고려해 첫날 숙소로 선택한 곳은 뉴어크 리버티 국제공항 인근에 있는 '홀리데이 인 익스프레스 뉴어크 호텔'이었다. 공항 근처의 호텔들은 대개 30분 간격으로 무료 셔틀을 운행하기 때문에 나처럼 혼자 늦은 시간에 도착하는 사람에게는 꽤 괜찮은 선택지였다.



블로그에서 알려준 '무료 셔틀 찾아가는 법' 이미지와 내가 현재 있는 위치를 어영부영 대조해 가며 길을 찾아가다 보니 호텔 차량 주차장인 P4에 다다랐다. 피로한 비행 끝에 무거운 짐을 끌고 숙소로 향하고자 하는 여행자들이 하나둘 모여들었고, 저 멀리서 호텔 셔틀버스가 나타날 때마다 어느 호텔 버스인지 확인하려는 사람들의 발걸음만이 스산했다. 나는 주차장에 정차했다 떠나가는 셔틀버스를 바쁘게 눈으로 좇으며 어두운 밤, 낯선 환경에서 느껴지는 긴장감을 바지런히 쫓아내고 있었다.


모여들었던 사람들은 셔틀버스를 타고 다시 떠나갔지만, 내가 예약한 호텔의 셔틀버스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깨를 짓누르는 배낭은 점점 더 무겁게 느껴졌고, 새벽이 가까워질수록 공기는 한층 싸늘해졌다. 피로가 서서히 몰려왔다. 그때였다. 저 멀리 호텔 셔틀버스가 보였다. 나와 포함해 다섯 명이 버스에 올라탔다.


셔틀버스를 타고 15분쯤 이동하니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서자, 은은한 노란 조명이 비추는 로비가 눈에 들어왔다. 왼쪽엔 카운터, 오른쪽엔 조식을 먹는 장소로 보이는 식사 공간이 있었는데 예전에 어느 미국 드라마에서 보던 세트장과 비슷한 분위기였다. 카운터로 가서 체크인하고 배정받은 1층의 객실 안으로 들어갔다.


적막이 감도는 방에 들어오니 비로소 '무사히 입국하기' 미션을 완료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돌덩이 같았던 배낭을 내려놓고 침대에 잠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침대 맞은편 거울로 내 얼굴이 보였다. 미용실에서 머리를 볶은 다음 날 미국에 왔다. 몇 년간 긴 머리를 승무원처럼 반듯하게 묶어왔던 내가, 짧은 파마머리에 안경을 쓰고 있는 모습이 영 낯설기도 하고 마치 어릿광대처럼 느껴져서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심심한 머리 스타일로 가면 뉴욕 여행이 영 맛이 나지 않을 것 같아서 머리를 볶았는데, 나 지금 너무 웃기게 생겼잖아?


긴장이 풀리며 허기가 느껴졌다. 피곤했지만 뭘 좀 먹지 않으면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미국에 육류 반입이 불가하여 라면도 가져가면 안 된다는 어느 유튜버의 영상을 보고 내가 챙겨 온 음식은 누룽지와 블록 형태의 우거지 된장국 그리고 캔 김치 몇 개였다.


캐리어를 열고 집에서 가져온 접이식 커피포트와 텀블러를 꺼냈다. 커피포트에 물을 끓여 놓고 텀블러 안에 2 봉지 분량의 누룽지와 우거지 된장국 블록 2개를 넣었다. 끓는 물을 붓고 부리나케 샤워하고 나니 어느새 새벽 2시였다. 이제 먹을 일만 남았다. 간만에 하는 야식이었다.


기대를 하고 한 입 먹어보니 시골 누렁이를 위한 밥 같은 비주얼은 그렇다 치고, 누룽지를 너무 많이 넣어 우거지 된장국 맛이 너무 밍밍했다. 김치는 외국에서 파는 김치처럼 내 입맛에는 너무 달달했다. 김치는 칼칼해야 제맛인데…. 하지만 지구 반대편 낯선 땅에서 먹는 이 작고 소박한 한식이 기내식보다 만족스러웠다. 후후 불어가며 뜨거운 음식을 먹는 것만으로도 경직됐던 근육이 풀리는 듯했다.


정신없이 먹고 배가 불러오니 까딱하면 잠들 것 같은 묵직한 피로가 몰려왔다. '여기서 잘 있다 갈 수 있을까?'를 잠깐 생각하다 금방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