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중요한 것
회사에서도,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MBTI는 빠지지 않는 주제다. 내가 INFP라 말하면 사람들은 내가 J가 아닌 P라는 것에 의아해했다. 사실 나는 J인 척 하는 P다. 본디 체계적으로 계획하기보다는 좋아하는 것에 몰입하는 편이고, 그러다 흥미를 잃으면 용두사미 꼴로 지지부진하게 두는 성정이다. 그런데 인생에 흥미로운 게 많을 리 없으니 치열한 현대사회에서 밥벌이하려면 전략적이고 계획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분야가 그렇겠지만, 마케팅 업무 특성상 전략적인 기획과 시간 관리, 성과 분석 능력이 중요하다 보니 J의 업무처리 방식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본체는 P인데 J인 척 하려니 마음이 편한 적이 없었다.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을까 봐 전전긍긍하는 불안감도 점점 커졌다. 완벽하기 위해 계획하고, 계획한 대로 안 되면 완벽하지 못할까 봐 불안한 것. 나를 지치게 만드는 불행의 트라이앵글이었다.
복도를 지나가는 사람들 소리에 눈을 떴다. 아침 일곱 시. 방음이 잘 안되는 호텔방 너머로 낯선 이방인의 대화가 간간이 들려왔다. 아니지. 여기서 이방인은 나구나.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니 어젯밤에 봤던 이 호텔 방 풍경이 낯설게 느껴졌다. 멍하니 침대에 앉아 있다가 퍼뜩 이래선 안 된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나 샤워하고 입을 속옷이 담긴 파우치를 찾았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속옷을 담은 초록색 파우치가 보이지 않는다. 옷가지들 사이에 껴있나 싶어 다시 한번 뒤져보지만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어디 갔지…. 분명 넣어뒀는데…. 설마 아닐 거야. 불길한 느낌이 들어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기야, 혹시 거실에 네모난 초록색 파우치 있어?"
"초록색 파우치? 잠깐만…. 응, 여기 있는데?"
"하…."
전화를 끊고 나는 절망했다. 그 파우치에 속옷이며 양말이며 콘택트렌즈며 중요한 것들이 들어있는데 그걸 안 갖고 왔다고? 믿고 싶지 않았다. 도대체 그걸 왜 빠뜨린 거지. 분명히 챙겼는데. 가기 전에 체크해 했는데. 언제 놓친 거지.
입국 후 첫날부터 계획이 어긋나자 갑자기 분노가 치밀었다. 당장 입을 속옷과 양말조차 없는 상황이 짜증 났고, 한달살이의 모든 추억을 담을 사진 속 내 모습이 안경을 쓴 채로 남겨질 거라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짐을 꼼꼼하게 챙기지 않은 내 탓이지만, 아니 출국하기까지 저도 정말 바빴잖아요!!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예요!! 뜻대로 되지 않은 답답함과 이곳에 오기까지의 마음고생했던 잔여물이 겹쳐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한국에서 느긋한 주말 저녁을 보내야 할 남편에게 우다다 카톡을 보냈다.
"다 망했어…. 미국에서는 콘택트렌즈를 당장 살 수도 없어."
"중요한 게 뭔데? 여기서 미국여행 망칠만한 게 뭔데. 속옷과 양말은 사면 되고 렌즈 대신 안경을 쓰면 되고. 망칠 거 하나도 없어."
그러더니 초록색 파우치는 국제우편으로 보내주겠다며 며칠 참아보라고 한다. 그래. 그 방법이 있었지…. 차분한 남편의 반응과 해결책에 사방으로 뿜어대던 분노가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일단 속옷과 양말은 맨해튼에 가서 살만한 곳을 찾아보자. 렌즈는 렌즈 보존액을 사서 지금 하나 있는 일회용을 며칠 써보자.
내가 가고 싶은 뉴욕에 가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여행 아니었던가. 중요한 건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이었다. 회사에서 일할 때처럼 계획에 차질이 생길까 봐 예민하게 굴지 않아도 된다. 조금씩 수정해 나가며 나만의 여정을 채우면 되는 것이다.
어느덧 시간은 11시를 향하고 있었다. 호텔 조식은 놓쳤고 감정을 쏟아내느라 진을 뺀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났다. 호텔 카운터에 가서 택시를 불러달라 했다. 어학원 기숙사까지의 가격을 물으니 130달러라 한다. 우버보다는 비싸지만, 바가지요금은 아니었다.
시간에 맞춰 호텔 앞에서 택시를 기다리는데 어떤 여자가 내게 웃으며 다가왔다.
"안녕? 택시 불렀지? 내가 운전사야. 짐 내가 들어줄게."
허리까지 오는 긴 생머리에 큼지막한 선글라스, 핫핑크 재킷을 입은 운전사는 스페인계 미국인 같아 보였다. SUV 차에 올라타 내부를 둘러보니 운전사가 직업 같아 보이진 않고 주말마다 일하는 열정적인 워킹맘 같았다.
차를 타고 고속도로에 들어서니 창밖으로 가을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졌다. 도로는 우리나라의 두 배는 될 것 같은 널찍한 너비를 자랑했고, 도로표지판 하나하나가 큼직하게 눈에 들어왔다. 이 나라는 모든 것이 다 커서 신기했다. 차가 조금 더 달리자 멀리서 반짝이는 강의 모습이 보였다.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강은 마치 거대한 거울처럼 하늘을 비추고 있었고, 그 위에는 수백 대의 크고 작은 배들이 떠 있었다.
차는 빠르게 뉴저지를 지나 맨해튼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도시의 고층 빌딩들이 멀리서 눈에 띄기 시작했다. 어느새 도로는 좁아지고, 차들이 밀려들었다. 그러다 갑자기, 거대한 맨해튼의 세계가 펼쳐졌다. 처음 마주한 맨해튼은 내가 그동안 상상했던 크기가 한없이 작게 느껴질 정도로 거대하고 위압적이었다. (뉴욕 여행 에세이에서 자주 보던 이 표현을 내가 직접 쓰다니 감개무량하다) 하늘에 닿을듯한 높은 건물들이 끝없이 이어지며,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사방에서 흘러나와 순식간에 어디론가 사라졌다.
저마다 다른 모습과 색깔로 빛나는 인파를 보며, 나는 잠시 내가 어디에 있고, 어느 계절에 있는지 헷갈렸다. 한국에서는 사람들이 대체로 비슷한 계절감의 옷과 색깔을 입기 때문에 계절과 날씨가 자연스레 구분됐다.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뒤섞여 있어 그 구분이 흐릿했고, 마치 구분할 필요성마저 없는 듯이 보였다. 나는 내가 이 도시 안으로 섞여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뉴욕이라는 거대한 풍경화에 삼켜질 것만 같은 압도감이 느껴졌다. 압도된 감정 뒤에는 설렘과 긴장감이 한데 뒤엉켜 가슴이 두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