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뉴욕에서의 신고식

by 리틀 골드문트

그해 여름

내가 여름에 태어났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사계절 중 여름을 제일 좋아한다. 내게 여름 풍경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리는 애니메이션의 여름과 닮았다. 따가운 햇살, 목덜미를 무겁게 짓누르는 습기 너머로 무성하게 녹음 진 짙푸른 나무와 시끄럽게 아우성치는 매미의 소리를 듣노라면, 익숙한 일상에서 벗어나 알 수 없는 어디론가 향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용기가 생긴다. 내가 한 뼘 더 성장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두근거림과 미지의 대상을 향한 기대감. 말미엔 그것이 헛된 것이라 할지라도 나의 여름은 충만했고 다시금 찬란하게 빛날 여름을 기다렸다.


그날은 내 생일이었다. 생일인 것을 회사 동료나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는 걸 좋아하지는 않아도, 나를 위한 기념 정도는 하고 싶어 연차를 썼다. 늦은 아침 눈을 뜨니 집안은 고요했다. 몸을 일으킬 기운조차 없어 침대에 누운 채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다 오늘 남편에게 요 몇 달간 품어온 나의 생각들과 뉴욕 여행에 대해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은 여름이 시작되고부터 점심시간을 쪼개 어학원 정보를 하나씩 알아보고 있었던 터였다. 남몰래 퇴사와 미국 여행을 준비한다는 게 인생에서 해보지 못한 일탈처럼 느껴져 묘하게 들뜨기도 했다.


일말의 결심이 서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어지럽게 잡동사니들로 가득한 서랍을 뒤적였다. 예전에 사두었던 빈 곳만이 가득한 하얀색 편지지를 꺼내 들었다.


사실 1년 전쯤 결혼기념일에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기념일인 만큼 남편은 고급 일식집을 예약했는데 일식집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내 딴엔 결혼생활을 되돌아보며 미래에 대한 솔직한 내 심정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잘 안 풀려 남편과 말다툼을 했다. 그 후 한동안 이 주제에 대해서는 꺼내지 않았는데 그러면서 나는 속앓이를 했다. 한참 속앓이를 하던 무렵 이 편지지를 샀다. 겉보기에 평화로운 이 일상에서 나는 조금씩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다듬어지지 않은 날 것으로 써 내려가고 싶었다. 그래서 아무런 디자인도 없는 하얀 편지지를 샀다. 그런데 막상 사고 보니 보여주고 싶은 내 마음이 뭔지도 잘 모르겠고 그 마음을 써 내려갈 용기도 나지 않았다. 동시에 왜 내 마음을 남편에게 구구절절 설득하듯 설명해야 하는 것이고, 그것에 '용기'를 내야 하는지 스스로 우습기도 했다. 내 마음을 표현하는 것마저 평화로워 보이는 이 일상에 돌을 던지는 게 아닐까 불편한 마음이 드는 나는, 약해빠진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편지지는 서랍에 봉인돼 있었다.


하지만 막상 봉인돼 있던 편지지를 꺼내 들자마자 나는 단숨에 글을 써 내려갔다. 수백 번 수천 번 대뇌인 오래된 마음을 나열하는 것은 생각보다 수월한 일이었다. 창밖엔 매미가 시끄럽게 울어 재끼고 있었다. 나는 하얀 편지지 세 장을 검은색 글자들로 빼곡히 채우곤 남편의 출근용 가방에 넣어두었다.


그해 가을

차는 어학원 기숙사 앞에 섰다. 나는 운전사 언니에게 130달러를 건넸다. 어학원 기숙사는, 어학원이 근처 호텔과 계약해 학생들에게 일부 객실을 제공하는 형태였다. 내가 머무는 방 형태는 혼자 화장실과 방을 모두 사용하는 개인실이었다. 호텔 문을 열고 들어서자, 왼쪽에 고풍스러운 서재 스타일의 로비가 보였다. 깊이 있는 적갈색 목재 책장에 수십 권의 책이 꽂혀있었고 그 앞엔 고풍스러운 소파와 가죽 의지가 마련돼 있었다. 내 맘에 딱 드는 로비 분위기였다.


사람이 없는 카운터로 가니 A4용지 세 장에 각각 영문 이름이 크게 적혀 있었다. 내 이름이 적힌 종이를 꺼내 들었다. 거기엔 방 번호와 비밀번호, 와이파이, 숙소 편의시설 등 이용 방법이 간략히 안내되어 있었다. 체크인은 오후 4시 정각에만 가능하다고 미리 안내받았지만,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달리 갈 곳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로비에서 기다릴 요량으로 바로 왔다. 시계를 보니 12시. 4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어쩔 수 없이 죽치고 있는 수밖에.


다행히 세 시간쯤 지났을 무렵 라틴계 출신의 젊은 남자가 나타나 체크인할 거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자 내가 머물 방 위치와 숙소 출입문 사용 방법을 간단하게 알려주었다. 캐리어를 끌고 내가 머물 방 안에 들어서는데 코를 찌르는 지독한 락스 냄새에 얼굴이 찌푸려졌다. 나는 여기가 내가 묵기로 한 곳이 맞는지 믿을 수 없었다.


방은 한눈에 봐도 처참했다. 검은색으로 페인트칠 된 나무 바닥은 군데군데 칠이 벗겨져 흉하게 파여 있었고, 외관상으로 족히 100년은 되어 보이는 낡고 오래된 협탁과 가구에는 곳곳에 파손된 흔적이 역력했다. 담벼락만이 보이는 창문 위에는 고장 난 누런 블라인드가 힘없이 매달려 있었고 그 아래 먼지가 가득한 에어컨이 창문에 붙어있었다. 처음 보는 형태였는데, 나중에 찾아보니 창문틀에 직접 설치하는 에어컨으로, 설치가 비교적 간단하고 공간을 절약할 수 있어 미국에서 널리 사용된다고 한다. 하지만, 이 낡은 에어컨이 제 기능을 할지는 의문이었다.


빛바랜 풀색 벽지는 군데군데 벗겨져 있었고, 벽에는 오래된 액자 두 개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 계단 난간 사진 같았는데, 사진의 의도를 알 수없는 똑같은 사진이 두 개나 걸려 있는 것이 기이하게 느껴졌다. 방 전체가 낮고 묵직한 음울함이 깔려 있었다. 동화책 '소공녀'의 주인공이 살았던 다락방이 이런 느낌이었으려나?


이 숙소는 맨해튼 미드타운에 위치한 다른 호텔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하긴 했지만, 가격 자체는 절대 저렴하지 않았다. 문제는, 실제 숙소 시설과 객실 내부가 어학원을 통해 받은 사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사진에서는 깔끔하고 고풍스러웠지만, 실제로 마주한 공간은 최소 50년은 더 낡아 보였다.


어학원과 연계된 기숙사라고 해서, 그리고 숙소 사진이 괜찮아 보여서 별다른 의심 없이 덜컥 결정한 것이 실수였다. 나중에야 구글에서 찾아보니, 이곳은 어학원 학생과 회사 인턴뿐만 아니라 일반 여행객에게도 객실을 제공하는 숙소였고, 평점과 후기가 꽤 좋지 않았다. 내가 느낀 것과 비슷하게 오래되고 낡은 가구와 열악한 시설에 대한 불만이 많았고, 업체에서 제공하는 사진과 실제 시설이 크게 다르다는 지적도 반복해서 등장했다. 한국에서 미리 숙소를 꼼꼼히 찾아봤더라면 이곳을 선택하지 않았겠지만, 출국 전까지 회사 업무와 퇴사 준비로 정신없이 바빴던 게 결국 화근이었다.


뉴욕행을 택한 건 나 자신이었다. 그리고 그 누구도 나의 뉴욕행이 핑크빛일 거라 말하지 않았다. 이 모든 충격적인 모습이 마치 '어서 와 뉴욕은 처음이지?'하고 비웃는 듯했다. 이 모든 건 내 예상을 벗어난 것이었지만 한편으론, 나는 각오가 되어 있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이 모든 걸 직감적으로 예측하듯 일회용 수건, 탈취제, 다양한 종류의 알코올 소독제, 침구 커버 등을 살뜰히 챙겨 왔다.


나는 방 곳곳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살균 티슈로 내 손이 닿을 법한 문고리, 리모컨, 탁자, 전자레인지 등을 열심히 닦아냈다. 편백 오일 스프레이를 뿌려 락스 냄새와 묘하게 섞인 오래된 퀴퀴한 냄새를 중화시켰다. 베개와 탁자에 일회용 커버를 씌우고 절대 쓰고 싶지 않은 더러운 쿠션과 러그는 창문 앞에 두어 창문형 에어컨 틈으로 느껴지는 한기를 막았다.


대청소 후 객실


하루를 묵어 보니, 공중화장실처럼 생긴 화장실에는 밤에는 뜨거운 물이 잘 나오지 않았다. 스스로를 우스갯소리로 모기라고 부를 만큼 추위에 약한 내가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는 곳에서 2주를 보내야 한다니 끔찍했다. 밤이 되면 창문에 붙어있는 에어컨 틈 사이로 한 시간마다 대마초 냄새가 올라왔다. 이 창문형 에어컨을 뗄 수 있다는 것도 나중에야 안 사실이었다. 호텔 관리자가 없는 밤과 새벽에는 로비에서 술 취한 남녀들이 개념 없이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대학생 때부터 주기적으로 혼자 여행했던 나였지만, 이 숙소에서는 영 잠을 자지 못했다. 세 시간마다 잠에서 깨기 일쑤였다. 나는 순진하게도 호텔에 여러 문제에 대해 바로 항의하지 못했다. 어쩌면 바보같이 이곳 분위기에 움츠러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일주일이 지나서야 어학원의 학생 지원 담당자를 통해 호텔 매니저에게 온수와 난방 문제를 항의하여 해결했다.


며칠 뒤 아침, 어학원에 가기 위해 샤워를 하다 머리를 감으려고 몸을 앞으로 숙였는데, 순간 목과 등 근육이 마비된 듯한 극심한 경련과 저릿한 통증 느꼈다. 전에도 몇 번 담에 걸린 적이 있었지만, 이번에 느껴지는 통증은 강했다. 어학원에 가서 학생 지원 담당자에게 목에 담이 걸렸다고, 병원에 가고 싶다고 하니 따뜻한 물로 몸을 이완시키고 스트레칭하란다. 음…. 그 말은 나도 할 수 있는 말인데…. 그날 수업을 듣고 나니 통증이 더 심해지길래 다른 방법이 없을지 인터넷을 찾아봤는데, 미국 드럭스토어에서 muscle relaxation patch(근육 이완 패치)나 spray를 구매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가까운 드럭스토어인 CVS에 들렀다. 그런데 이 나라 약 종류가 많아도 너무 많다. 하지만 정작 내가 정작 찾는 제제품이 보이지 않았다. 약사가 있길래 물어봤더니 건조한 표정으로 "제품이 없으면 없는 거다."라는 무심한 대답이 돌아왔다. 다른 CVS를 찾아가 봐도 마찬가지였다. 직원이 손님을 위해 열심히 찾아주고 심지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달라고 하는 한국의 친절함에 익숙해져 있다가 이런 무관심과 푸대접을 받으니 답답할 노릇이었지만 내가 달리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한동안 제품을 찾아보다가 내 증상과 비슷한 곳에 효과가 있는 알약을 사서 먹었다.


다행히 약효는 있었다. 다음날부터 조금씩 목을 가눌 수 있었고, 이틀이 지나서는 통증이 거의 사라졌다. 숙소가 좀 더 안락했다면, 따뜻한 물이 잘 나왔다면 애초에 담에 안 걸리지 않았을까? 잠시 원망스러운 마음이 스쳤지만, 뉴욕의 따뜻한 가을 햇살을 만끽하며 사람들의 경쾌한 발걸음 사이로 바지런히 발을 맞추다 보니 이내 얼마나 바보 같은 생각인지 깨닫게 됐다.


그렇게 나는 뉴욕에서 신고식을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