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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에 가려다 중국에 도착했습니다(1)

by 리틀 골드문트

오랜만에 빨간색 매니큐어를 발랐다. 올해 처음 바르는 것이었다.


귀찮지만 내가 유난히 사랑하는 이 행위는, 대개 심리적으로 무언가를 꽤 기대하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이번 기대는 내일부터 떠나는 2박 3일 홍콩 여행에 있었다.


이번이 세 번째 홍콩이다. 첫 방문은 엄마와, 두 번째는 남편과 그리고 세 번째는 친구들과 함께다. 나는 친구들을 홍콩에서 만나기로 했다.


중국인 서윤과 대만인 짜쉬안. 둘은 내 에세이, '뉴욕에 가고 싶었고 그게 전부였습니다'에 등장하는 친구들이다. 어학원에서 같은 반이었고, 때론 여행과 음식을 함께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다양한 인종과 출신이 가득한 뉴욕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버팀목이었다. 셋 다 아시아 문화권에서 나고 자랐기에, 다른 국적의 친구들과 대화할 때보다 가치관과 정서를 나누기가 한결 편했다.


단톡방에서 서로에게 종종 안부를 묻던 우리는 언제 한번 만나자고 말해왔고, 마침 내 에세이 출간을 계기로 이야기는 구체적인 계획이 되어 마침내 실행에 옮겨졌다.



(1) 위기 하나 : 여행 하루 전 날, 서윤 언니가 동행하지 못하게 됐다고 알려왔다.


출발을 몇시간 앞두고 한창 짐을 싸던 중, 인스타그램 DM이 도착했다. 우리 셋이 함께 있는 단톡방에 중국인 서윤언니가 보낸 메시지였다. 호텔에 체크인을 하려고 하는데 여권 정보 일부를 묻는 내용이었다.


호텔에서는 보통 체크인 시 직접 여권을 제시하기에 언니에게 "체크인할 때 주면 되니 그때 하자"고 답을 남겼다.


그런데 잠시 뒤, 언니가 개인 DM으로 긴 글을 보내왔다. 언니가 홍콩에 갈 수 없다고 했다. 중국인은 홍콩에 가려면 매번 새로 발급받은 통행증이 필요한데, 일정을 착각하고 늦게 접수한 탓에 통행증이 아직 발급되지 않았다고 했다. 여권 정보를 알려달라고 한 건 본인이 직접 체크인을 못하니, 대신에 투숙할 사람들의 정보를 전달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


사람이 살다보면 타인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안할 것 같은 실수를 저지를 때가 있다. 하지만 실수로 인해 벌어진 상황은 머리론 이해해도 마음으론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이번 여행이 특히 설레었던 건, 내 인생 처음으로 ‘아무 준비도 하지 않는 여행’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홍콩 바로 위 도시인 선전에 사는 서윤 언니는 지난 10년간 일 때문에 홍콩을 수십 번 드나들었고, 그야말로 로컬처럼 홍콩을 꿰고 있었다. 나는 그저 가고 싶은 독립서점 몇 군데와 먹고 싶은 음식 리스트만 간단히 전했고, 나머지는 전부 언니에게 맡겼다. 공항 픽업까지 해주기로 했으니,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여행 하루 전, 이런 변수가 생길 줄이야!!


통행증이 내일이라도 나올 가능성은 희박했고, 이제는 대만인 친구 짜쉬안과 둘이서 홍콩 여행을 해야 했다. 언니는 거듭 사과하며 “서울로 가서 직접 사과하겠다”고 했고 미안한 마음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 말이 당장 내 여행 준비에 도움이 되진 않았다.


회사에서 위기 상황이 닥치면 애써 놀라지 않은 척, 차분하게 해결책을 찾던 10년의 습관이 이번에도 발동했다. 그때부터 정신없이 짐을 마저 싸고, 급하게 관광 루트와 교통편, 이동 시간, 경비를 모조리 찾아 구글 지도에 정리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새벽 3시. 비행기 탑승은 7시 45분이었고, 4시에 일어나 씻고 4시 반에 집을 나서야 했다. 한 시간 남짓 눈을 붙이는 건 의미 없었다. 결국 한숨도 자지 못한 채, 공항으로 향했다.


남편은 차로 나를 공항에 데려다주면서 이번 여행을 연신 걱정했다. 뉴욕에서 짧게 만난 친구 중 한 명이 오지 못하게 된 것도 그렇고, 아무리 홍콩이 처음이 아니라해도 몸조심 하라는 말을 여러 번 당부했다. 남편 입장에서는 내가 뉴욕에서 잠깐 만난 친구를 만나러 멀리 해외에 가는 일이 썩 미덥지 않았을 것이다. 하물며 그 중 한명이 못 나온다고 하니, 친구들에 대해 의심스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인천국제공항에서 홍콩국제공항까지는 약 3시간 30분. 나는 비행기에서 잠시 기절했다가, 아침밥을 먹었다가 커피를 마셨다가, 다시 꾸벅꾸벅 졸다가 홍콩에 도착했다.


짜쉬안 언니는 나보다 한 시간 뒤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짜쉬안 언니를 만난 후 시내로 이동해서 천천히 점심을 먹고, 돌아다니다가 숙소에 갈 예정이었다.


공항에 도착하고 인터넷이 연결되니 서윤 언니로부터 메시지가 여러 개 와 있었다. 비록 이번 2박 3일 여정에 함께하진 못하지만 온라인으로 실시간 동행하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공항 의자에 앉아 서윤언니와 대화를 했다.


"통행증은 아직이지?"

"응..."


그때 불현듯 한 생각이 스쳤다.


"근데 언니, 우리가 언니를 보러 가면 어때?"

"어? 근데 그것도 방법이야! 홍콩에서 선전까지 고속열차로 15분이면 돼!너 중국비자 없어도 되지?"

비자 없이 중국에 갈 수 있어서 상해에 놀러가는 한국인이 많다는 뉴스가 기억났다. 혹시나 싶어 다시 찾아보니 정말 무비자 입국이 가능했다.


"응, 한국인은 중국 비자 없이 갈 수 있어."

"좋다. 근데 대만인도 중국에 가려면 통행증이 있어야 하거든. 짜쉬안이 혹시 통행증을 가지고 왔는지 내가 확인해볼게."


짜쉬안 언니가 탄 비행기가 홍콩 땅에 도착하자마자 두 언니들은 연락을 주고 받았고, 정말 웃기게도 짜쉬안 언니는 통행증을 가지고 왔다.


우리 세명의 단톡방이 다시 정신없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짜쉬안 언니: (홍콩에 도착했더니 느닷없이 중국에 오라는 얘기를 들음) 그럼 우리 서윤이 집에 가는거?

나 : 오늘 서윤 언니네서 자고, 내일 아침 홍콩에 돌아와서 관광하자. 하루는 중국, 하루는 홍콩.

서윤 언니: 그래! 둘이 와준다면 너무 고맙지. 제대로 모실게.


내가 중국행을 덜컥 결정한 건 '홍콩에서 선전까지 열차로 15분'이라는 말 때문이었다. 나는 심지어 '밥만 먹고 돌아와도 되겠지' 라는 가벼운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엄청난 착각이었다. 홍콩에서 중국으로 넘어간다는 건 결고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그때 나는 미쳐 몰랐다. '대환장 입국행'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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