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쉬안 언니에게서 DM이 왔다.
"나 이제 캐리어 찾았고 곧 나가!"
나는 언니가 나올 출국장B 앞의 펜스에 몸을 기대고 서서, 출국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무리들 사이에서 언니를 부지런히 찾았다. 한 손에는 동영상 모드를 켠 핸드폰을 들고, 혹시나 내가 또는 언니가 서로를 못 알아보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그건 기우였다. 저 멀리서 나오는 언니를 단번에 알아봤고, 언니 역시 카메라로 본인을 촬영하고 있는 나를 용케도 빨리 찾아냈다. 10개월 만의 재회, 우리는 반갑게 포옹을 나눴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를 보며 웃음이 터져 나왔다. 누가 봐도 언니 역시 밤새 못 잔 흔적이 역력했기 때문이다. 언니의 큰 눈가엔 다크서클이 가득했다.
"잘 지냈어? 나 한숨도 못 잤잖아."
"나도!! 어제 얼마나 놀랬던지."
파워 J인 언니도 간 밤에 홍콩 정보를 찾아보느라 잠을 못 잤단다. 그런데 이 언니, 꼴랑 2박 3일 여행에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왔다.
"아니 왜 이렇게 큰 캐리어를 가져왔어?"
"너는 왜 짐이 이거밖에 안돼?"
캐리어 끌고 다니는 걸 굉장히 싫어하는 나는 웬만하면 배낭+보조가방 수준으로 모든 짐을 최소화하려고 애쓴다. 하물며 난 이제 더 이상 기념품을 돌려야 할 팀원이 없다. 게다가 지금은 가벼운 여름이니 짐이 많을 필요가 없다.
"너와 서윤이 줄 선물도 있고, 짐이 많지."
아니 이 언니는, 어제 분명히 셋이 만나지 못한다고 대화를 마무리 지었는데도 서윤언니 선물까지 가져왔다는 게 아닌가? 희박한 가능성까지 고려한 이 파워 J 같으니라고. 근데 우리는 이 희박한 가능성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그럼 중국으로 가보자!"
우리의 목적지는 중국 선전의 푸텐역. 경로는 홍콩국제공항 → 구룡역 → 서구룡역 → 푸텐역 되겠다.
새벽에 급하게 미리 구매한 AEL(공항고속철도) 티켓으로 구룡역으로 향했다.
"근데, 난 언니가 중국 통행증을 가지고 온 게 더 웃겨."
"혹시나 하고 가지고 있던 거지. 내가 중국에 가게 될 줄이야..."
난 고등학교 2학년 때 수학여행으로 중국 베이징에 가본 적이 있는데, 이 대만 언닌 이번이 중국 첫 방문인 것이다. 언니는 남편이 알면 놀라겠다고 말했다. 중국, 홍콩, 대만. 이 나라들의 복잡한 관계란!
구룡역은 공항 고속철도, MTR, 버스/기차 터미널, 호텔 셔틀, 대형 쇼핑몰 엘리먼츠 등이 한데 모여있는 교통의 허브인 역이라 유동인구도 많고 길을 잃기 쉬운 곳이기도 하다.
복잡한 표지판들을 보며 나는 순간 뇌정지가 왔지만, 다행히도 중국어를 하는 대만인 언니가 있어서 서구룡역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서구룡역의 고속열차터미널에 도착하자 정말 많은 중국인들이 있었다. 매표소에서 짜쉬안 언니가 직원과 중국어로 소통하며 표를 구입했다. 대만 중국어를 쓰는 언니는 홍콩사람들이 쓰는 광둥어를 모두 알아듣지는 못한다고 했다. 그래도 언니가 있으니 모든 것들이 비교적 쉽게 진행되고 있었다.
열차를 탑승하기 위한 별도의 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여권이 곧 표라고 직원이 말했다. 여권을 찍고 나니 여느 공항처럼 짐 검사를 해야 했다. 짐검사를 하고 나왔더니 많은 사람들이 급하게 입국 심사장으로 서두르는 게 아닌가?
단순히 기차만 타는 줄 알았던 나는 아차 싶었다. 그래, 이건 국경을 넘는 거였다.
짐검사를 끝낸 인파가 계속해서 밀려들고, 대만인 언니와 다르게 나는 외국인으로 별도의 줄에서 입국심사를 받아야 했다. (대만인 언니도 당황한 부분이지만, 중국은 대만 사람들은 자국민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입국심사를 엄격하고 복잡했다. 외국인들은 입국신고서를 써야 했고, 입국신고서에는 머무는 곳의 주소, 지인의 연락처 등 상세한 질문이 가득했다. 정작 홍콩 공항에 도착할 때까진 쉽게 왔는데 계획에 없던 중국에 가려니 빡센 느낌이 들었다.
중국 입국심사 분위기는 작년에 내가 미국 입국심사 했던 것처럼 뭔가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 서구룡역까지만 해도 환한 하얀 조명이었는데, 이곳으로 넘어오니 공산국가 느낌이 드는(?) 누런 조명과 칙칙한 시설이 무섭게 느껴졌다. 내 차례가 되고 얼굴 스캔과 지문 등록을 했다. 우리나라나 다른 나라에선 보통 엄지와 검지 지문만 등록만 했던 것 같은데 중국은 열 손가락 지문을 모두 등록하는 것도 뭔가 낯설었다.
입국심사를 마치자 또 짐검사가 이어졌다. 아니 짐검사는 아까도 했잖아? 입국 심사에서 시간을 많이 잡아먹은 탓에 내 앞의 사람들이 훨씬 더 늘어났다. 가끔 유튜브에서 중국사람들의 인파를 보면 신기했는데, 지금 딱 그랬다. 이렇게 시간이 지체되니 아까 사람들이 막 새치기 하면서 뛰어갔던 것이 이해됐다.
와중에 자기 기차 시간이 다됐다며 소리치며 새치기하는 사람들이 계속 끼어들며 앞에 섰다. 우리도 기차 시간에 쫓기기 시작하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새치기는 하기 싫었다. 여자처자 짐검사를 마치고 배낭과 캐리어를 이끌고 헐레벌떡 달려서 간신히 열차에 올랐다.
"휴 드디어 탔네. 근데 서윤언니랑 어디서 보지?"
열차가 출발하자 서윤언니에게 연락하기 위해 인스타그램을 켜는데... 인터넷이 안된다. 내가 가져온 이심은 홍콩 전용이다. 안 되는 건 짜쉬안 언니도 마찬가지였다. 와이파이가 되는 곳이라도 중국은 해외 서버와의 접속을 제외하기 때문에 구글, 유튜브, 인스타그램, 카카오톡 등 많은 해외 서비스가 차단된다.
아.... 산 넘어 산이군.
열차는 정말 15분 만에 푸텐역에 도착했다. 기차를 찬 모든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고 퇴근길 지하철처럼 긴 줄이 장사진을 이뤘다. 잠도 못 잔 언니와 나는 인파 사이에서 무거운 짐을 들고 계속 이러고 있으니 기절할 것만 같은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다. 눈을 감으면 접착제를 붙인 것마냥 다시 떨어뜨리기가 힘들었다. 서윤언니는 어디서 찾아야 하는 걸까.
홍콩에 11시 50분에 도착했는데, 어느덧 시간은 4시가 넘어 있었다. 짜쉬안 언니는 하루 종일 한 끼도 먹지 못했다고 했다. 아침 기내식을 먹은 나도 배가 이렇게 배가 고픈데 언닌 오죽할까.
흐릿해지는 정신을 붙잡고 푸텐역 에스컬레이터를 올라왔다. 인파가 떠나가고 난 텅 빈 대합실에 한 여자가 보였다. 서윤언니였다.
"오느라 고생했어!!"
배는 고프고 목은 마르고 피곤해 죽겠고, 짐은 무겁고.
"언니 너무 배고파..."
"그래 밥 먹으러 가자!! 지하철로 20분 가야 돼. 여기는 식당이 2시 반이면 문을 닫아."
아니 2시 반에 문을 닫는 식당이 세상에 어디있단 말인가.......
지하철에도 인파의 물결은 계속됐다. 게다가 중국은, 지하철에 들어갈 때마다 짐검사를 해야 했다. 다시 줄을 서서 짐검사를 하고, 지하철을 타고, 갈아타고, 우리는 한 대형 쇼핑몰에 도착했다.
그 대형 쇼핑몰에도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짐 보관소에는 짐이 넘쳐나 우린 짐을 맡길 수도 없었고 화장실에는 놀이동산에서 놀이기구 줄을 스듯 긴 줄이 펼쳐졌다.
여기가 말로만 듣던 중국이구나...
그리고 나는..
그날 밤 대만으로 돌아가겠다는 짜쉬안 언니의 말을 듣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