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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서브론 못살아요” : 공격을 포장한 화법들

by 리틀 골드문트

선배님께 결례인 걸 알면서도

최근 KBS 아나운서의 무례한 발언이 화제가 됐다.

"선배님께 결례인 말일 순 있지만..."으로 시작한 이 발언은, 이렇게 시작하는 말의 대부분이 그렇듯 실례되는 내용으로 이어졌다.

"000 선배처럼은 못 살아요, 누군가의 서브로는 못살아요."


결국 그는 여론의 질타를 받고 SNS에 사과문을 게재했다. 말에 품위를 지켜야할 현직 아나운서의 언행이 문제가 된 사건이지만, 우리 역시 이런 오류를 범하고 있진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완곡어법의 함정

언어의 '완곡어법'이 있다. 불쾌하거나 민감한 주제를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부드럽게 돌려 말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죽었다"라는 표현 대신 "돌아가셨다"라고 말하거나, 불쾌한 질문 앞에 "실례되지만", "여쭙기 송구하지만" 등의 말을 붙이는 것이다.


본래는 상대방의 감정을 배려하기 위한 장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완곡한 언어는 때로 공격의 무기가 되기도 한다.


예시)

• "미안한데 그 보고서 별로야"

→ '미안한데'를 붙여 무례함의 책임을 줄이고, 비판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을 수 있다. "내가 이런 말 하는 건 미안하지만, 그래도 말해야 해"라는 마음이 있을 수도 있고, "나는 미안한 마음이 있으니 무례하다고 탓하지 마"라는 선제적 방어용일 수도 있다.


• "솔직히 말해서 000 팀장 별로지 않아?"

'솔직히 말해서'를 붙임으로써 실제로는 개인의 주관적 평가인 것을 더 진정성 있고 정당한 것처럼 보이게 한다. 자신의 의견에 동의를 강요하는 화법이다.



간접화행의 함정

이처럼 발화의 형식과 목적이 일치하지 않는 화법으로 '간접화행' 있다. 간접화행은 문장의 형식과 실제 의도가 불일치하는 경우이다.


"오늘 회식 다들 괜찮지?"

→ 형식은 의문문이지만 사실상 "오늘 회식할거니 모두 참석해라"라는 명령에 가깝다. '괜찮지?'라는 말이 부정의 답변을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


•"편할 대로 생각해."

→ 언뜻 "네가 원하는 선택을 해"라는 배려로 보일 수 있으나 화자가 원하는 대답이 정해져 있을 가능성이 높다. 듣는 사람은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을 선택해도 될까?'라는 불안을 느끼게 한다.


이 화법은, 특히 한국처럼 위계질서가 뚜렷한 사회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도구로 작동하기도 한다.


또한, 간접화행은 듣는 사람 입장에선 직접적인 공격이 아닌 만큼 즉각적으로 대응하기 어렵다. 들었을 당시에는 아무 생각이 없다가, 뒤늦게 곱씹을수록 불쾌감이 남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때때로 “내가 너무 예민한 건가?”라는 생각에 빠지며, 관계 속에서 불필요한 에너지를 소모하게 한다.



은은한 불쾌에 대응하는 법

그렇다면 이런 은근한 불쾌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1. 속뜻과 의도를 구분하기

상대가 진심으로 배려하는 건지, 아니면 공격을 포장한 발언인지 먼저 파악해야 한다.

"실례이지만..."이라는 표현이 진심으로 조심스러움의 표현인지, 공격하기 위한 장치인 건지 구분하는 것이다.


2.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선 긋기

만약 상대방이 표현이 불편했다면 대화의 경계를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 도움이 된다.


"말씀은 이해하지만 대답하기 어려운 부분인 것 같습니다."

"지금 얘기할 주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3. 의중을 다시 한번 되묻기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는 말의 맥락과 상황, 상대의 미묘한 뉘앙스에 따라 달라진다.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단호하게 선을 긋고 정색을 한다면 분위기가 싸늘해질 수 있다.


만약 상대방의 말이 불쾌했으나 단호하게 말하기가 애매한 상황이라면, 상대방에게 되묻는 방식으로 나의 불편함을 은근하게 드러낼 수 있다.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인가요?"

"좀 당황스러운데요?"



상대방이 가스라이팅 & 책임 회피를 시도한다면

혹은, 나의 단호한 대응에 상대방이 잘못을 인정하기보다 오히려 나를 몰아가려고 할 때가 있다.

"농담이야~" "뒤끝 있네~"등의 대표적인 화법으로 가스라이팅하는 경우다.


이런 화법은 나의 감정을 문제 삼아 "네가 예민한 것이다"라고 몰아감으로써 문제의 초점을 본인의 무례함에서 내 반응으로 전환한다. 불편한 상황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기보다, 나를 '농담도 못 받아주는 사람'으로 프레임을 씌우는 책임 회피 전략이다.


그럴 때는 상대방의 프레임에 말려들지 않고 최대한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상대방이 즐거워야 농담이 아닐까요?"

"뒤끝이 아니라 예의의 문제인 것 같은데요."

"뒤끝이 아니라, 네가 한 말이 불편했던 거야."



완곡어법과 간접화행은 상대를 위한 배려에서 시작되었다. 다만, 중요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태도다. 언어의 품격은 기교가 아니라 태도에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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