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응급실행으로 짜쉬안 언니가 대만으로 돌아가고, 나는 서윤언니의 가이드를 받으며 선전을 둘러보기로 했다.
서울의 인사동, 중산공원지구
언니가 처음 안내해 준 곳은 선전의 중산공원지구였다. 공원을 중심으로 역사적 건물과 다양한 소품샵, 미술관, 식당이 어우러져 있었는데 마치 서울의 인사동 거리를 연상케 했다.
우리는 이곳의 한 가게에서 광둥음식을 먹었다.
광둥음식은 중국 남부의 광둥성(중국의 '성'이란 행정 구역상 최상위 지역 단위로 현재 중국에는 22개의 성이 있다. 우리나라의 경기도의 '도'와 비슷한 개념으로 보인다.) 지역의 음식이다. 선전은 광둥성 내의 경제특구 도시이니, 선전에서 다양한 광둥 음식을 즐길 수 있다.
광둥성은 역사적으로 스페인, 포르투갈 등과의 국제 무역이 활발한 지역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유럽식 음식의 영향을 받았고, 남부 해안가의 지리적 특성으로 해산물 요리가 발달했다. 맵고 짜기보다 담백하고 살짝 기름진 맛이 특징이다.
선전의 식당에서는 기본적으로 레몬조각이 들어간 물을 제공한다. 기름진 음식을 먹기 전후 입안을 개운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음식 주문은 서윤 언니에게 맡겼다. 상추 무침, 닭 요리, 두부조림, 생선구이가 차례로 나왔다.
음식은 모두 맛있었다. 간장을 베이스로 하지만, 일본 음식의 간장 맛보다 깊고 풍부한 감칠맛이 느껴졌다. 여행지에서 먹는 음식이 너무 익숙한 맛이면 즐거움이 없고 너무 생경한 맛이어도 거부감이 드는데 익숙한 맛 70% + 새로운 맛 30%의 적절한 이 조합이 여행자의 입맛을 제대로 만족시켰다. 특히 생선 구이가 참 맛있었다. 적당히 간간하면서도 고소한 풍미가 일품이었다.
식사 후 공원을 산책하니 하늘에 닿을듯 거대하고 울창한 용수나무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용수나무는 홍콩, 마카오, 선전, 대만 등지에서 볼 수 있는데, 땅에 닿을 듯한 긴 뿌리와 수십 명의 사람을 거뜬히 품을 듯한 넓은 풍채가 신비로우면서도 편안한 느낌이었다.
용수나무를 영어로 하면 반얀트리.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반얀트리 호텔에 쓰이는 그 이름이다. 내가 느꼈던 편안한 듯 장대한 분위기를 호텔 주인도 좋아했던 걸까?
서울의 성수동, 화차오청창의 문화원
다음 목적지는 화차오청창의 문화원이었다. 원래 공장지대였던 이곳은 도시재생을 통해 예술 공간으로 거듭난 곳으로 갤러리와 상점, 카페가 모여 있어 서울 성수동의 분위기와 닮아 있었다.
걸어가는 길에 사탕수수를 파는 카트가 보였다. 사탕수수는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기계로 바로 짜낸 신선한 사탕수수의 기분 좋은 달콤함이 여행의 즐거움을 더해주는 듯 했다.
하지만 살갗을 태울듯한 강렬한 햇볕과 온몸을 짓누르는 무거운 습기에 금세 내 체력은 바닥나기 시작했다. 요 몇 년 한국의 더위도 강력해졌지만 아열대기후의 위력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그런 강력한 더위에도, 거리엔 여전히 멋지게 차려입은 커플과 젊은이들이 가득했다. 노출 콘크리트 카페, 건물 벽면의 그래피티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면, 여기가 중국인지, LA인지, 홍콩인지 알 수 없었다.
이곳에는 아주 유명한 서점이 하나 있다. 'Old Heaven Books'. 내부 촬영이 금지여서 사진에 담을 순 없었지만, LP, 카세트테이프, 의류 등 각종 굿즈와 진열된 서적의 모습이 홍콩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매력적이었다. 서점 안쪽에 별도로 마련된 카페 공간까지 완벽했다. 사진을 남기지 못해 아쉬울 따름이었다.
홍콩을 마주한 곳, 서커우 항구
마지막 코스는 서커우 항구였다. 이곳에서 페리를 타면 홍콩 국제공항까지 바로 갈 수 있어 편리하다. 접근성이 뛰어나 고급 호텔과 식당, 쇼핑몰이 들어서 있다.
쇼핑몰 옥상에 올라가니 저 멀리 홍콩이 보였다. 홍콩에 가려다 선전에 와서, 결국 멀리서나마 홍콩을 바라보고 있는 이 상황이 웃겼다.
옥상에는 승마체험장이 있었다. 땅에 있어야 할 말들이 옥상 위에 지어진 마굿간과 트랙에 있는 풍경이 다소 괴기스럽게 느껴졌다.
핸드폰이 없어졌어
"이제 집으로 돌아갈까?"
한국에서든 여행지에서든 나의 에너지는 6시를 넘기지 못한다. 서윤언니의 말에 나는 잔뜩 땀에 절여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하철과 연결되어 있는 쇼핑몰 지하로 내려 가기 위해 에스컬레이터를 타던 중이었다.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찾는데... 없다. 핸드폰이 없다.
"언니. 나 핸드폰 어디에 두고 왔나 봐.. 아무리 찾아도 없어. "
근처 벤치에 앉아 가방을 다시 뒤져봤지만 노란색 핸드폰 케이스가 보이질 않았다. 이럴 수 없어. 이러면 안 돼.
기억을 되짚어보니 의심스러운 곳은 화장실밖에 없었다. 쇼핑몰에 왔을 때도 핸드폰을 쥐고 있었는데, 중간에 한 번 들른 화장실 말고는 두고 올만한 장소가 없다.
언니와 나는 곧장 화장실로 되돌아갔다. 화장실 칸을 들여다봤지만 없다.
"일단 침착해. 내가 여기 분실물 센터에 전화해 볼게."
놀란 서윤 언니도 최대한 침착해보려 애쓰며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나는 핸드폰 없이 집에 도착한 내일의 내 모습을 상상했다. 핸드폰에 저장한 정보들은 어쩌지.
그때였다. 통화하는 서윤언니 뒤로 청소 아주머니가 지나갔다. 곧 쓰러질 것처럼 기침을 계속하며 느릿느릿 지나가시는데, 좀 전에 내가 화장실을 쓸 때 세면대를 청소하시던 그 아주머니였다.
"언니!! 저분에게 물어봐. 아까 화장실에 계셨어"
"아 그래?"
언니가 서둘러 아주머니께 뭐라 말을 건다. 그러다 아주머니가 깜짝 놀라신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저 표정은 내 핸드폰을 안다는 그 표정이다. 됐다. 됐다. 이제 됐다!!
알고 보니 아주머니는 내가 화장실을 떠나자마자 화장실 칸에 있는 핸드폰을 발견하셨고, 바로 분실물 센터로 전달하셨단다. 5분 정도 기다리자, 분실물 센터 직원이 내려왔다. 내게 잃어버린 핸드폰을 묘사해 보라고 하며 몇 가지 확인을 하더니 돌려주신다.
"아..... 다행이다."
핸드폰을 잃어버린 걸 깨닫고 찾고 받기까지의 그 20분간 언니도 나도 폭싹 늙어버린 기분이었다. 언니와 나는 의자에 앉아 잠시 놀란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나, 그 짧은 순간에 네가 한국으로 떠나고 어떻게 네 핸드폰을 찾아야 할지 생각하고 있었어"
"ㅋㅋㅋㅋ 난 이미 찾을 생각은 포기했고 털린 내 정보 어떡하지 생각했어."
통행증 문제, 짜쉬안 언니 대만 귀국 그리고 핸드폰 분실까지...
짧은 2박 3일 동안 계속 생겨나는 이슈에 정신이 없었다.
"언니 이젠 내일 한국 돌아갈 일만 남았는데 별일 없겠지?"
"없을 거야. 그래도 감사하게 다 좋은 쪽으로 잘 풀린다"
다음날 아침, 언니는 실수로 내 핸드폰 보조 배터리를 떨어뜨려 부쉈고, 나는 남은 배터리를 아껴가며 간신히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언니 이번 여행은 꼭 써야겠다. 이런 일이 또 있을까 싶어."
"정말! 우리 많이 성장했다 ㅋㅋ"
그래서 이렇게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