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한 달 전, 나는 비장했다.
8월을 아낌없이 보내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여름을 끔찍이 사랑하는 나는, 8월만 되면 묘한 설렘과 긴장감에 휩싸인다. 8월만큼은 뭔가 달라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이제 꼼짝없이 연말입니다'하고 조용히 다가와 못질을 해대는 가을을 앞두고 매일같이 최후의 만찬을 즐겨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지글지글 끓어낼 듯 쏘아대는 햇볕은, 나의 열정과 열정을 가장한 집착, 열정이 남기고 간 미련, 열정과 헷갈리는 열망들을 교묘하게 가려준다. 그 그늘 아래서 나는, 한 밤에 복면을 쓰고 돌아다니는 아무개처럼 자유롭고 편안하고 나른했다. 그래서 내게 여름은 편안한 서늘함이 깃든 계절이다.
그렇게 8월은 지나갔다.
그리고 이것은 8월을 잘 보내주기 위한 나만의 간단한 작별식이다.
잔잔했지만 제법 꿈틀댔던 것 같아 다행이다.
8월 1일
두 번째 광주 여행.
첫 광주 여행이 더없이 좋아서, 마침 혼자 외근을 가는 남편을 따라 광주에 갔다. 남편이 업무를 보는 동안, 광주에 거주하시는 최근 막 알게 된 분을 만나 점심을 먹고, 커피와 디저트를 즐기며 기분 좋은 수다를 떨었다.
8월 2일
생일날.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익산에 하루 머물며, 추천 받은 <국립익산박물관>을 다녀왔다. 믿고 보는 고퀄리티 국립박물관. 백제 최대 불교 사원인 미륵사와 미륵사지 석탑 해체조사 중 발견한 사리장엄에 대해 알게 됐다. 사리장엄에는 백제 무왕과 부인, 그리고 백제의 보물이 담겨있었다.
백제의 여러 공예품을 관람하는데 오늘날에도 즐기는 비즈 액세서리 형태의 공예물을 보며 내가 누리는 공산품들이 그 시절의 형태와도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 사이의 교감은 시간이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람을 끝내고 공주에 들러 그 유명한 '김피탕'과 '밤빵'을 먹었다. 거리에 보이는 식당의 메뉴판 대부분에 밤이 포함돼 있었다. 밤냉면이라니!
8월 3일
올해 나의 생일에 좀 다른 점이 있다면, 내 책의 출간일을 내 생일로 정했다는 것이다. 출간한 책을 가지고 전국의 있는 독립서점을 발굴하며 입고를 제안하는 메일을 보냈다. 이번에 책을 스스로 만들면서 포토샵과 인디자인을 서툴지만 다룰 수 있게 됐다. 이제 모든 작업이 끝났나 했더니, 입고해 달라는 서점에서 스마트스토어에 올릴 책의 목업 이미지를 요청했다. 핀터레스트의 이미지를 뒤져보고, 책 이미지를 끼워 넣어보며 그럴싸한 이미지를 만들었다.
8월 4일
첫 입고를 하기 위해 후암동의 독립서점, <스토리지북 앤 필름>에 다녀왔다. 설레는 마음으로 갔는데 심드렁한 책방 분위기에 약간 당황. 사진과 영상으로 첫 입고를 기념하고 부모님 댁으로 갔다. 내 생일을 위한 아이스케이크를 사들고 가서 부모님께 책을 보여드리며 나의 뉴욕 이야기를 처음으로 말씀드렸다.
8월 5~7일
입고를 위해 독립서점 세 곳을 다녀왔다. 독립출판을 한 이력이 있는 남해에 사는 대학 선배 부부의 곧 태어날 아이를 위해 배내가운과 함께 책을 보냈다.
8월 8~10일
뉴욕에서 만난 친구들과 만나기 위해 홍콩으로 향했다. 그런데 홍콩 공항에서 급 계획이 변경돼 홍콩은 구경하지 못하고 중국 선전을 둘러보고 왔다. 여행이 주는 뜻밖의 즐거움과 온갖 이슈에 정신을 못 차렸던,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여행이었다.
8월 11~14일
입고 제안 메일을 보내고, 입고 요청이 온 전국의 독립서점에 배송을 하는 일들을 계속했다. 투명 OPP봉투에 별도로 제작한 엽서와 메모지를 함께 동봉하여 포장하고 뽁뽁이로 여러 겹 감싼 후 배낭에 책을 넣었다. 햇볕을 요리조리 피해 종종걸음으로 걸어서 15분 거리의 우체국에 가서 테이프로 여러 번 감싸며 박스작업을 하고 보냈다. 우체국이란 참 신기하고 감사하다. 뉴욕에 있을 때 남편이 보낸 내 물건이 단 4일 만에 내가 사는 숙소로 도착했고, 국내는 단 하루 만에 안전하게 배송된다. 우리나라 우체국 만만세. 우체부 직원들 존경합니다.
8월 15일
신영동&청운동 데이트를 갔다. 검색해서 처음 가보는 독립서점에 갔는데 분위기에 취해 이리저리 좋은 책들을 보고 왔다. 이후 걸어서 부암동을 따라 걷다가 청운동 부근에서 추어탕과 추어튀김을 먹었다. 삼계탕 대신 먹는 여름 보양식.
8월 16일
업힐 러닝을 시작했다. 원래 코스는 20분을 걸어 홍제천에 도착해 러닝을 하고 돌아오는 약 1시간 20분 소요되는 여정인데, 이번에는 홍제천에 가는 20분의 오르막길 구간을 뛰어서 가보기로 했다.
처음 뛰어본 업힐. 심장에 쇠맛이 나는 듯했고 평지와는 비교도 안되게 숨이 가빴다. 하지만 하고 나니 심장이 단련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도 한 시간씩 트래킹 러닝을 하는 날이 올까?
8월 17일
여름 내내 바짝 묶고 있었던 머리를 슬슬 풀고 싶어졌다. 바짝 묶은 머리는 작년 가을부터 작별을 고했었는데, 삼복더위에는 잠깐 예외였다. 작년 가을부터 주기적으로 방문하는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잘라달라 했다. 내 맘에 들게 기가 막히게 잘 잘라줬다. 맘에 들어!
8월 18일
아침 러닝 후 요 며칠 먹고 싶었던 부리또를 해 먹었다. 주말 아침 운동 후 먹는 맛있는 아침. 가장 사랑하는 순간이다. 제일 기분이 좋다.
8월 19일
첫 '매입' 입고를 위해 방화동의 한 북카페에 갔다. 잠깐 검색해서 본 매장 분위기가 좋아서 근처에 사는 친구와 이곳에서 급만남을 가졌다. 하지만 아쉽게도 만석이라 머물 수 없었다. 잠시 둘러본 큐레이션 책들과 소품, 인테리어가 맘에 쏙 들었다. 카페 주인께서 미안하다며 테이크아웃 커피 2잔을 주셨다. 커피를 들고 딱히 갈 곳이 없었는데, 한때 이곳에 살았던 친구가 근처 아파트 단지 안의 그늘진 벤치에 데려갔다. 나무 그늘 아래, 할머니들 옆에서 우리는 이런저런 수다를 떨었다. 친구는 좋은 소식을 전달해 주었다. 그래, 결국 시간이 대부분 해결해 주는 건가 보다.
"여름이었다."
8월 20일
밀린 입고를 위해 책 포장 후 우체국에 다녀왔다.
8월 21일
카페에서 오랜만에 그림 작업을 했다. 한 달 푹 쉬었는데 다시 하려니 또 손에 안 익는다.
8월 22일
그림 작업을 위해 카페에 갔는데 마음이 어수선하여 글을 썼다. 몇 시간 집중하니 마음이 차분해진다. 지난 시간들 속 내가 얻은 소중한 마음 습관 두 가지는 '언제든 쓰려는 마음'과 '숨을 헐떡이는 게 두렵지 않은 마음'. 작년 이맘때까지 꿈도 꾸지 못했던 것들이다.
고등학교 동창들을 오랜만에 만났다. 눈코 뜰 새 없이 끌려가는 삶에서 벗어나 눈코 뜰 새 없이 사는 친구들을 바라보니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8월 23일
남편의 제안으로 <F1 더무비>를 봤는데 너무 재밌어서 영화가 끝나고 자동차 게임이 있는 오락실에 가서 여운을 즐겼다. 아!!! 시원한 뚫린 도로를 미친 듯이 달려보고 싶다!!!
8월 24~26일
글과 그림작업에 몰두했다.
8월 27일
수원 나들이. 버스를 세 번 타는 여정의 중간중간에 제법 건조한 바람이 느껴지자 8월 말이라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마지막 세 번째 버스를 타고 행궁동을 향해 들어가는 길에서 버스 차창 밖 수원화성과 푸른 녹음이 아름다웠다. 좋은 배경, 좋은 공간에서 좋은 분과의 만남. 엄청난 수다쟁이가 되었던 감사한 시간.
8월 28~29일
영상 작업. 할 때마다 어렵고 시간이 많이 걸리고 답답하다.
8월 30일
몇 년 만에 아웃백에서 외식. 치킨 텐더 샐러드, 스테이크, 투움바 파스타, 갈릭 슈림프 플레이트 모두 맛있었다. 그야말로 '와구와구' 먹었다. 기분 좋은 배부름을 느끼며 어둑해지는 여름 저녁을 남편과 걸으니 행복했다.
8월 31일
연희동&북촌 데이트
연희동 독립서점 <유어마인드>에 진열된 수많은 미니북과 진들을 보며 호기심이 생겨 집에 와 북바인딩을 해봤다. 밥을 먹고 돌아다닐 때까지만 해도 연희동이 주는 느낌이 딱히 좋지 않았는데, 찾아간 어느 카페의 분위기, 인테리어, 커피 맛에 기분이 확 좋아지는 걸 느끼며 공간이 주는 특별함을 생각해 본다. 아. 인간에게 환경과 공간이 이토록 중요하다.
9월 1일
위탁 서적 첫 정산 메일!
내 책이 팔리긴 할까? 싶었는데 팔리긴 팔렸다. 누가, 왜, 어떤 마음으로 샀고 어떤 마음이 드셨는지 물어보고 싶다. 일단은, 너무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