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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나연 Jan 25. 2021

병은 사랑

이 선생의 병 치료기


 모처럼 여유시간이 생겼다. 책 한 권 들고 카페를 갈까 잠시 고민하다 한의원으로 차를 돌렸다. 병원 문턱을 드나들기엔 좀 이른 축이지만 선생님과 허물없이 인사를 주고받을 만큼 나는 꽤 단골손님이다.


"잠은 잘 자고 변은 잘 봅니까? 생리주기나 양도 순조롭고?"

"가슴이 막 두근거리고 머리 쪽으로 열이 오르는 것 같은 느낌은 없고?"

"목이 자주 마르진 않습니까?"

"병은 젊은 사람 늙은 사람 안 가립니다."


 손목을 내맡겼다, 혀를 내밀었다, 문진인지 염려인지 꾸중인지 분간 없이 한참을 듣다 침상으로 옮겨 눕는다. 가만 누워있으니 등부터 뜨뜻하게 데워진다.


 커튼이 촥 열리고 무심히 들어선 선생님의 손이 탁 내려앉았다 슉 빠져나가며 발, 다리, 손, 머리에 침을 꽂는다. 선생님의 솜씨가 신묘한 것인지, 데워진 몸 덕에 정신마저 노곤해진 탓인지 빵빵하게 부풀었던 배가 꾸룩 꾸룩 소리를 내며 편해지고, 뻣뻣하던 뒷목이 녹아내리고, 차갑던 손끝에 피가 돈다.  


'아 좋다.'


 허여 멀 건한 천장에 달린 스프링클러와 백열등을 올려다보며 멍하니 머리를 비워간다. 커피 향 대신 한약재 냄새 속에 드러눕기를 선택한 내가 기특했다.  

 



 어려서부터 골골했다. 딱히 무슨 병이 있는 건 아닌데 툭하면 머리가 아프고 배가 아팠다. 이만큼 자라며 겪어보니 몸이 약한 게 아니라 작은 일에도 지나치게 옭매여 몸까지 축나게 하는 병약한 심정이 문제였다.


 어른들 눈에는 그게 보였던지 아빠는 내가 아픈 배를 그러쥐고 누울 때마다 '가슴을 펴고 크게 심호흡을 해라, 한 번씩 눈을 감고 마음을 가라앉혀라'는 처방을 반복적으로 내렸는데 어린애 귀에 그런 참소리가 들어갈 리 만무했다. (지금은 종종 아빠의 처방이 들어 먹힌다.)


 아빠가 이론가라면, 우리 할머니는 행동가였다.

우리 할머니는 시대를 잘못 만나 그저 나의 할머니가 되었지만 어찌나 아는 것이 많은지 어떤 문제나 할머니 앞에 가져가면 도깨비방망이로 두드린 듯 답이 나왔다.


 할머니는 우리 식구 중 지구에 가장 오래 살아온 사람인만큼 아는 '그 이', '저 이'도 참 많았는데 내가 아프다면 안방 문갑 서랍에 들어있는 작고 얇은 검은색 수첩을 꺼내 뒤적여 전화 다이얼을 실컷 돌리고는 그이들이 있는 곳으로 나를 데려갔다.

 





 평소엔 언덕 아래 버스 정류장 앞 <성일 소아과> (지금은 건물조차 흔적도 모르게 사라진 곳들이니 추억을 새길 겸 상호를 밝힌다.)를 다녔다. 성일 소아과 원장 선생님은 굉장히 연세가 많으셨는데 자글자글한 주름의 개수와 반비례하는 낭랑한 음성과 절대 시들지 않을 것처럼 풍성하고 검은 머리를 갖고 계셔서 어린 마음에 '영생불멸의 비법이라도 알고 계신 게 아닐까' 의문을 품었었다.  


 불사의 목소리를 지닌 원장님의 병원에는 재미있는 것이 많았지만 (빙그르르 돌아가는 진찰 의자와 차디찬 청진기가 가슴에 올려지는 순간, 종이가 빼곡한 선반에서 정확하게 쏙 뽑혀 나오는 내 차트...)  내가 가장 좋아했던 곳은 약제실이었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약사 언니가 어찌나 빠르게 약종이를 접는지 (그렇다, 나 어릴 땐 약을 약포라는 얇은 종이에 둘둘 말아 싸주었다.) 종이 접기에 한창 빠져있던 내가 홀딱 넘어가고도 남았다. 약봉투에 소복이 담긴 세모난 약을 풀어보는 재미에 쓴 약도 냉큼 삼킬 정도였다. 이러한 이유로 병원 가자는 소리만 듣고도 울기 시작하는 내 동생과 달리 나는 소아과에 가는 것을 꽤 즐겼다.  





 할머니의 수첩 속 '그 이'들이 운영하는 병원은 좀 달랐다.


첫 번째 그 이는 <동서 한의원> 원장님이었다.


 동서 한의원은 지금의 강북삼성병원 옆 골목쯤에 있었는데 좁은 골목에 들어서면 한의원 간판보다 '접골원' 글자가 크게 눈에 들어왔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혀를 입천장에 붙였다 또 냅다 굴려야 겨우 그럴듯하게 발음되는 그 어려운 단어가 묘하게 신경 쓰였는데 참으로 그로테스크한 시술을 받을 운명을 직감했던 거였나 싶다.


 나는 어른들 말로 '비위가 약했'는데 밥상머리에서 똥, 방귀 얘기만 해도 웩주거리를 하며 밥맛을 잃고 자주 속이 울렁거렸다. 할머니의 침 잘 놓는 그 이는 숨겨둔 비기를 무림의 고수처럼 꺼내 들었는데 길이가 한자는 되는 듯싶은 장침이었다. 그 침이 나를 관통했는지, 포 뜨듯 베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후로 나의 비위는 급격히 좋아졌다. (그래야만 했다.)  



두 번째 그 이는 <미아리 체 내리는 집> 여사님이었다.


 할머니와 단 둘이 택시를 잡아타고 미아리 고개를 넘어 골목을 후비고 찾아간 곳은 그저 작은 대문이 달린 아주 좁고 허름한 가정집이었다. 간판도 표식도 아무것도 없었지만 할머니의 수첩에 '(미아리) 체 내리는 집'이라고 쓰여 있었으니 그런 게다.


 다 녹아내리는 문을 삐걱 열고 어둑한 현관을 들어서니 어찌 알고 찾아왔는지 이미 꽤 많은 사람들이 들어 있었다.  내 차례가 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데 저만치서 여사님이 빨간 플라스틱 바가지에 물을 채워 들고 다가온다. 여사님은 할머니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더니 내 턱밑에 바가지를 갖다 대곤 머리를 젖히곤 차가운 손을 목구멍 깊이 쑥 밀어 넣었다.

 이 기이하고 우악스러운 치료법에 적잖이 놀랐지만 목구멍에 남의 손이 들어와 있으니 소리도 낼 수 없고 황망하게 눈만 부릅뜨고 발만 동동일 밖에... 거북한 느낌에 이러다 죽겠다 싶은 것도 잠깐, 손이 휙 빠져나가더니 내 속에서 빠져나온 무언가가 바가지로 '첨벙' 떨어졌다. 고개도 들기 전에 여사님이 바가지를 냉큼 가져가 버려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나중에 할머니 얘기를 들어보니 애기 주먹만 한 고깃 덩어리가 내 속에 걸려 있었단다.


 소화제를 삼키고 열 손가락을 다 따도 속이 개운해지지 않을 때면 미아리 골목이, 여사님의 몸빼바지가, 빨간 바가지가, 뼈와 가죽으로만 이루어진 가느다랗고 주름진 손목이 떠오른다.


'아 딱 한 번만 훑고 지나가 주시면 딱 좋겠네...'



세 번째 그 이는  김 권사님이다.


 택시를 타고 멀미가 날 정도로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미아리에 다시 온건가 싶을 만큼 흡사한 외양에 내부는 좁고 어두웠다. 할머니 교회분이 소개를 했다며 기도의 은사를 받은 분이라 했다. 크리스천 가정에서 자란 덕에 기도하는 거라면 이골이 날 정도로 보고 겪었지만 어린 내가 느끼기에도 이곳의 기운은 범상치 않았다.

 어리둥절한 나를 김 권사님이 데려다 바닥에 꿇어 앉히니 뒤에 나앉아 계시던 권사님 몇 분이 더 합류했다. 머리 위로 묵직하게 손이 얹어지더니 처음 듣는 외국어가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힐긋 눈을 떠보니 저만치 떨어져 할머니도 무릎을 꿇고 기도에 열심이다. 무릎이 안 좋은 우리 할머니가 나를 위해 꿇어앉았다는 것이 찡했을까, 멀미 기운이 가시지 않아서였을까, 머리를 누르고 있는 손이 무거워서였을까 별안간 눈물이 쏟아졌다. 낯설고 뜨거운 것이 나를 꽉 끌어안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 할머니는 그 날의 후기를 엄마에게 나누었다. 길고도 뜨거운 기도가 끝나고 김 권사님이 내 등을 쓸며 '이 선생, 이 선생' 불렀단다. 애를 대하는 호칭으로는 생경하여 왜 선생이라 부르냐 물었더니 선생이라 선생으로 부른다고 하셨단다. 눈치라곤 가져 본 적 없는 나지만 그 말을 하는 우리 할머니의 얼굴에 스친 것은 분명 기대와 자랑스러움이었다.


 짐작컨대 기도를 받기 위해 우리 할머니는 꽤 큰 액수의 헌금을 하셨을 거다. 김 권사님이 예언의 은사가 있어 내가 시답잖은 선생 짓을 하며 살 거라는 것을 정말 미리 알았을 수도 있지만 혹 그것이 그저 간절한 이를 위한 최소한의 서비스였다 하더라도, 그 선언 앞에 기뻐하며 무릎 꿇은 할머니의 사랑이 나를 더 건강히 한 것만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할머니는 수십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이 선생' 스토리를 반복하여 읊곤 한다. 김 권사님 예언이 맞았다. 나는 꼼짝없이 우리 할머니를 위해 어디 자잘한 선생이라도 끊임없이 해야 할 운명이 되었다.




 이제 나는 할머니가, 엄마가, 아빠가 잡아끌지 않아도 툭하면 병원을 찾아간다. 속이 더부룩하면 위내시경에 피검사를 하고, 허리가 아프면 물리치료를 받는다. 긴 감기 끝엔 비타민 주사를 찾아 맞고, 몸이 잔뜩 부으면 한의원에 가 눕는다.


나라는 사람은 꽤 많은 양의 항생제와 온갖 한약재, 침술사와 물리치료사의 기운과 기술, 꾹꾹 눌러 채운 기도와 약간의 샤머니즘적 믿음, 엄마와 할머니 (가끔 아빠)의 약손으로 빚어졌다.


 이제와 보니 지긋지긋한 병의 이름으로 나를 끌어안은 그 모든 것이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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