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세계유산축전의 프로그램으로 병산서원에서 2박 3일을 보낼 참가자를 모집한다는 공지를 보자마자 불쑥 호기심과 용기가 치솟았다. 호기롭게 참가 인원수에 1인이라 적어내고 기다리길 며칠. 참가자로 확정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이십 년 전, 이 땅의 산 좋고 물 좋은 곳이라면 모조리 빠삭한 미대 교수님들에 이끌려 병산서원을 처음 찾아갔더랬다. 눈이 채 영글지 못했던 시절이라 그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진 못했을 땐데도 푸르른 병산과 낙동강 물을 마주 보고 느슨하게 긴 허리를 드리우고 누워있던 만대루의 처마 곡선과 각양각색으로 구부러진 서까래의 도열, 앞머리를 시원하게 흩날려주던 바람은 오래오래 마음에 남아 문득문득 그리워지곤 했다.
그리움은 몇 번이나 나를 안동으로 불러 세웠고, 세 시간이 넘는 장거리 운전을 감수해야 함에도 병산서원은 내가 가장 자주 찾은 여행지가 되었다.
이십 년 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보호를 이유로 더 이상 만대루에 오르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
결혼과 출산 이후 한 번도 혼자 여행을 떠나본 적이 없었는데 그 행선지가 병산서원이라니! 다시금 만대루에 올라볼 수 있지 않을까 그 기대 하나로 옷가지와 세면도구, 기차에서 읽을 책 한 권을 작은 캐리어에 담고 바퀴를 돌돌이며 안동으로 향했다.
하회마을 무렵부터 갑자기 길이 좁아지고 차가 달달거리기 시작한다. 작년까지만 해도 도로 전체가 비포장이었다. 옛 선비들이 걷던 옛길의 모습을 지키기 위해 문화재위원들이 끝끝내 수호했기 때문이라고. (위험하고 불편하다는 민원이 폭주해 결국 작년 말 부분적으로 포장되었다.) 병산서원을 들를 때마다 도랑에 바퀴가 빠져 구조를 기다리고 있는 차를 몇 번 마주치곤 했지만;; 나 역시 속세에서 학문의 세계로 차원 이동을 하는 듯한 타임루프 시골길을 참 사랑했다.
서원에 머무는 3일 동안 틈 날 때마다 시골길을 걸었다. 특히 흑요석처럼 새까맣게 떠있던 하늘과 풀벌레 소리로 자욱하던 밤 산책길은 영영 잊고 싶지 않다.
서원 입교 동기는 열아홉 명. 그중 다섯이 한방에 배정되었다. 전국의 이름난 문화재라면 척하면 척인 50대 자매, 서원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자기소개를 하는 20대 딸과 소녀감성 넘치는 60대 어머니가 나의 동방생이 되었다. 낯가리는 성격 탓에 멋쩍은 웃음만 짓고 있던 내게 동방생분들이 먼저 말을 붙여주시고 묻지도 않은 얘기도 척척 늘어놓아 주신 덕에 그 어느 때보다 즐겁고 편안했다.
사는 지역도 나이도 하나 겹치지 않았는데 아름답다, 좋다 여기고 달려가는 발걸음이 일치하는 사람들과의 대화는 다디달았다. 오히려 걸어온 길이, 시선의 높이가 달랐기에 더욱 풍성했다. 아마도 옛 서원이,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분위기가 이와 비슷했을 테다.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아 나는 이런 자리에 오고 싶었구나.'
서원은 향촌에 필요한 교육을 제공했던 고등교육기관으로 현재의 사립대학교에 해당한다.
2019년에 한국의 서원 아홉 곳 - 경북 영주 소수서원, 경남 함양 남계서원, 경북 경주 옥산서원, 경북 안동 도산서원, 전남 장성 필암서원, 대구 달성 도동서원, 경북 안동 병산서원, 전북 정읍 무성서원, 충남 논산 돈암서원 -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보편적이고 탁월한 가치를 지닌 문화재를 보존하기 위해 마련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서는 서원의 등재 이유를 '교육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교육체계와 유형적 구조물을 창조' 했기 때문이며 그 교육의 목적이 '세계에 대한 이해와 이상적 인간형을 만들기 위함'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학교 건물이 그곳에서 행해졌던 교육의 목적까지 아울러 세계적인 문화재로 지정되었다는 것은 곱씹어봐야 할 이야기다.
서원에서 지내는 2박 3일 동안 낯선 이들과 얼굴을 맞대고 복닥거려야 하는 방 안에 머무는 대신 틈나는 대로 만대루에 올라 멍한 고요를 즐겼다. 바람소리, 새소리, 물소리에만 귀 기울이고 가지런히 척추뼈를 세워 앉던 그 시간은 먼 훗날 내 삶을 되돌아볼 때 빠지지 않을 하나의 지점으로 콕 찍혀있다.
기숙사라는 곳이 다섯 명이 꼭 붙어 자도 다리 하나 차 올릴 여유가 없을 정도로 자그마한데 비해, 휴식과 강학의 공간이었다는 만대루는 병산만큼이나 넓게 뻗어놓은 설계자의 의도를 내 안위를 챙기며 편히 다리 뻗고 잠드는 삶보다 산과 물로 대변되는 그 어느 세계를 한가득 가슴에 품으라는 뜻으로 읽는다면 너무 거창할까?
4백 년 뒤쯤이면 지금 우리가 지은 건축물 중 몇몇도 문화재로 지정될 것이다. 어쩌면 학교도 하나쯤 들어갈지 모른다. 4백 년 뒤의 후손들은 우리의 학교 건물에서 무엇을 읽어낼까? 우리를 어떤 삶을 추구했던 사람들로 해석하고 기억할까?
과연 우리는 어떻게 기억되고 싶은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