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데이지 Dec 26. 2023

가짜 노동

데니스 뇌르마르크&아네르스 포그 옌센, 이수영, 자음과모음, 2023

가끔 생각한다. 난 왜 그렇게 바빴던 걸까.

사실 그때도 현타가 오는 순간들이 있었다. 내가 뭐 하는 짓인가 하고….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책임자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들 했다. 새로운 여성 리더를 주시하며 말하기 좋아하는 이들에게 흠 잡히기 싫었다.  

사람들을 만날수록 안부전화, 경조사, 가벼운 접대, 술자리를 해야만 하는 시간들이 늘었다.   

집을 나서며 오늘은 약속 없다고, 일찍 들어올 수 있겠다고 한 말은 번번이 깨졌다.

“바쁘시죠?” 하는 얘기를 하루에도 몇 번씩 들었고, 늘 피곤한 표정으로 그렇다고 답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중요한 ‘진짜 일’을 하려면 야근을 하거나 주말에 쉴 시간을 써야 했다.   




“가짜 노동은 그냥 텅 빈 노동이 아니다. 바쁜 척하는 헛짓거리 노동, 노동과 유사한 활동, 무의미한 업무다. … 예를 들어 모두가 시간 낭비라는 걸 아는 큰 프로젝트를 상대적으로 어린 직원에게 그저 뭔가 할 일을 주기 위해 맡긴다면, 이것이 가짜 노동이다. 이미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해 듣는 회의도 가짜 노동이다. 프로젝터가 꺼지자마자 잊어버릴 프레젠테이션, 일이 잘못되는 걸 막지 못하는 감시나 관리도 가짜 노동이다. 또한 할 일이 없다는 걸 가리거나, ‘나는 일하는 사람’이라는 기분을 지키고 자존감을 유지하기 위해 서류 정리를 전부 다시 한다든지 하는 일도 가짜 노동이다.” - <가짜 노동> 중


문명의 이기들이 생겨나는데 왜 우리의 노동시간은 줄지 않는가. 컨베이어 벨트가 돌아가는 공장에 다니는 것도 아닌데 왜 우리는 아직도 9시 출근 6시 퇴근 시간을 고수하는가. 내가 하는 노동의 실체를 들여다보자. 텅 빈 노동, 가짜 노동은 아닌지. 덴마크에서 출간된 <가짜 노동>은 우리에게 화두를 던진다.


실없는 소리일 수 있다. 우리나라는 퇴행의 노동 역사를 써나가고 있으므로. 며칠 전 대법원은 주 52시간 노동시간만 지켜진다면 연속 밤샘 노동도 가능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에너자이저 건전지도 아니고 사람 몸이 몰아서 일하고 쉬는 업무에 얼마나 적응할 수 있을까.


아무튼 <가짜 노동>을 읽으면서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한 쓸데없는 일, 내가 시킨 헛짓거리가 생각났다.

마흔이 넘어 다시 일하게 된 직장에서 첫 번째로 한 일 복사기로 문서를 출력하고 신문기사를 스크랩하는 일이었다. 아뿔싸 잘못 들어왔구나 싶었다. 제대로 된 시스템이 없는 곳이었다. 수습만 견디자 했는데 결국 발을 빼지 못했다.


세월이 흘러 내가 책임자가 되었을 때도 크게 바꾸지 못했다. 늘 예산이 없었고 사람이 부족했다. 몸으로 때워야 하는 허드렛일에 젊은 친구들의 열정을 소진시켰다.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음에 괴로웠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회의를 위해선 전차 회의록과  풍성한 회의 자료가 필요했다. 설사 “프로젝터가 꺼지자마자 잊어버릴 프레젠테이션”이더라도 말이다. 누구를 위한 행사인지 모를 이벤트들에 지쳐다. 때때로 재충전하며 의지를 불태웠으 서히 지쳐갔다. 이른 퇴직은 어쩌면 그렇게 몸을 갈아넣은 결과인지도 모른다.  


그 지긋지긋한 일들에서 벗어난 지금, 나는 홀가분한가? 행복한가?

글도 쓰고, 책도 읽고, 피아노도 치고, 맛있는 요리도 하고, 가끔 영화도 보고, 못 만났던 친구들도 만나고, 엄마도 돌보고….

어느 때보다 충만한 노동을 하는데도 나는 여전히 불안하다. 은퇴한 지 4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바쁘지 않은 일상에 부적응하고 있다. 가짜 노동이 아닌 중요한 내 일이 아무런 대가를 받지 못하므로 무용하다고 느낀다.


정말 필요하고 중요한 일만 하는 시대가 열릴까. 많이 일하지 않고도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세상이 올까. 벌써 한물간 듯한 ‘기본 소득’의 시대가 과연 올까.

매거진의 이전글 끝내주는 인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