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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지 Oct 30. 2023

끝내주는 인생

이슬아, 디플롯, 2023

“달리기가 잘 되는 날에는 누가 나를 뒤에서 밀어주는 느낌이 든다. 그게 누구냐면 지난 며칠간 꾸준히 달려놓은 과거의 나다. 그런 날들이 쌓였을 땐 몸이 마음을 거뜬하게 이끌고 간다. 하지만 오랜만에 달리는 날에는 마음이 몸을 이끌어야 한다. 몸이 안 따라줘도 마음의 힘으로 살살 달래며 데리고 가는 수밖에 없다.”

- 끝내주는 인생, 이슬아, 디플롯, 162쪽


‘달리기’ 대신 ‘글쓰기’로 바꿔 읽으니 꼭 내 얘기 같다. 요즘 나는 스스로를 살살 달래며 글을 쓰는 중이다. 고작 일주일에 한 개의 글을 완성하면서 감히 ‘꾸준히’라 말하는 건 ‘사기’라고, 글이 안 써지는 건 당연하다고 몰아붙일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말자고 토닥이는 중이다.

 

엄마가 낙상하신 이후로 매거진 조금씩 천천히 작별을 써내려 가는 게 힘겹다. 이슬아가 만난 나이 든 언니는 “하나의 고생이 지나면 또 다른 고생이 있는 생이었다고 … 그렇지만 끝내주는 인생이었다고” 얘기했다는데, 난 아직 나이가 안 들었거나 철이 덜 들었거나 아무튼 그 경지에 오르지 못했다. 다만 그간의 삶이 비교적 안온했으므로 이 정도의 시련은 감내해야 한다고 다독거릴 뿐이다.  




이슬아 작가의 인스타를 팔로우한 지는 꽤 됐지만 요즘만큼 자주 들여다본 건 처음이지 싶다. 갑작스러운, 하지만 예측 가능했던(!) 이훤 작가와의 결혼식 피드를 보고 왜 그렇게 좋아했는지 모르겠다. 결혼식 풍경도 ‘이슬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딸의 결혼식에 훌라 춤을 추며 축복하다니, 복희씨의 등장도 반가웠다. 마치 내 아이들의 결혼식을 바라보듯 흐뭇해졌다.


이슬아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건 <일간 이슬아> 현상을 취재한 신문 기사를 통해서다. 아무도 안 청탁했지만 쓴다, 날마다 뭐라도 써서 보낸다, 재미도 감동도 없을 수 있다는 당찬 카피를 어디에서 보랴. 그 뒤로 그의 책을 몇 권 읽었고, 작년엔 <일간 이슬아>까지 구독했다. 매일 그의 글이 도착하길 기다렸고, 새벽녘까지 씨름했을 그의 문장들을 탐독했다. 자연스레 그의 팬이 됐다.  


최근작 <끝내주는 인생>엔 그의 가족, 친구, 애인, 그리고 이웃들이 등장한다. 부럽다 싶을 정도로 서로를 챙기고 돕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모여 사랑스러운 인간 이슬아가 된 듯싶다.

작가는 코로나로 잠시 문을 닫게 된 요가원 원장의 상황을 안타까워하고 그 마음을 전할 줄 아는 따뜻한 사람이다. 우연히 라디오 인터뷰를 듣고 저 멀리 시카고에 사는 이에게 영어를 가르쳐 달라고 청하는 용기 있는 사람이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체력을 키워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기꺼이 아이들만 바글바글한 동네 태권도장의 문을 두드리는 성실한 사람이다. 자신이 이렇게 글을 쓰고 노래할 수 있는 건 오래 전부터 이어져 온, “재주가 흐를 만한 통로”였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겸손해하는 사람이다.  


나는 무엇보다 전업작가라는 자신의 위상이 언제든 삐끗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돈을 벌기 위해 어디론가 멀리 고속버스를 타고 이동하며 졸다 깨다 하던 그때를 잊지 않으며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 그가 계속 새로운 시도를 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건 아마도 과거를 잊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졸다가 깨어나면 해가 져 있고 검은 차창에는 희미하게 내 얼굴이 비쳤다. 그 얼굴이 과도기의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부디 누군가가 되어야 할 텐데. 지금보다 완성된 누군가. 그러나 아직은 아닌 나의 얼굴.

만약 전업작가가 된다면 나는 나를 덜 걱정할 것 같았다. 이젠 그것이 결코 완성이 아니란 걸 안다. 길고 긴 여정의 시작을 의미할 뿐이다. 이 돈벌이는 실력과 운이 따를 때 유지되는 한시적인 상태에 가깝다.


“부디 누군가가 되어야 할 텐데. 지금보다 완성된 누군가….”

이 대목에서 살짝 눈물이 났다. 차창에 비친 얼굴이 마치 내 모습처럼 그려진다. 객관적으로는 가능성이 없는 나이에 들어선 내가 새로운 누군가, 완성된 누군가를 꿈꾸는 건 욕심 아닌가. 아직도 희망이 있을까. 글 쓰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런 얘기를 꺼내면 고등학교 동창 J는 정색한다.

“당연하지. 나중에 책 내거든 서문에 꼭 내 얘기 써줘. 넌 꼭 해낼 거라고 말했다고, 고맙다고.”

자주 만나지도 못하지만, J는 내가 엄마를 돌보느라 힘겨웠을 때 일주일에 몇 번씩 전화로 위로해 줬다. 그리고 이젠 글 쓰는 나를 응원해 준다. 웃어넘겼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이렇게 허튼 에도 용기가 살짝 생긴다.  


누군가를 응원하는 말은 힘이 세다.

작가의 토크쇼에 참석한 나이 지긋한 어르신의 말대로 이슬아는 결혼을 했다. 결혼하고 애도 낳아 계속 달라지는 작가의 이야기를 오래오래 듣고 싶다는 그분의 바람과 찬사 덕분인지도 모른다.

나도 브런치라는 플랫폼에서 구독자의 좋아요! 응원을 받으며 천천히 나아가는 중이다. 그렇게 흘러가다 보면 나도 언젠가, 그 길에서 만난 인연과 삶의 순간들을 돌아보며 ‘끝내주는 인생’이었다고 회고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내공이 깊어가는 진짜 언니가 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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