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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지 Jan 08. 2024

단식투쟁으로 얻은 <하이디>

그렇게 책과 만났지

어린 시절, 난 무언가를 얻어내야 할 때 여의치 않으면 밥을 굶었다. 엄마를 향한 단식투쟁이다.

엄만 밥을 안 먹으면 큰일 난다고 생각하는 분이라, 밥맛이 없다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최소한 몇 술이라도 떠야 한다.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식사 거부는 초등학교  2, 3학년 무렵이었을 것이다. 담임 선생님이 몇몇 친구들에게 책을 사라고 했다. 지금 생각하니 강매였다. 자유교양문고라 이름 붙은 시리즈였다. 여섯 권이었던가.

그런데 생각보다 비쌌던 모양이다. 엄마가 단칼에 안 사준다고 했다. 교과서만 보면 되지 책은 무슨…. 이렇게 생각하셨을 수도 있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독재가 심화되던 그때는 하다못해 책 읽기도 이렇게 강제로 시켰던 모양이다. 당시 기사를 찾아보니 이렇다. 본래의 취지와 달리 교사에게까지 이른바 필수교양도서를 팔도록 했던 모양이다.  


“문교부는… 지난 68년부터 자유교육협주관으로 실시해 온 자유교양대회를 사실상 중단시키고… 각종 우량도서를 반드시 교직원회의 자문을 거쳐 교장이 선정, 시중서적상을 통해서 구입토록 하라고 각 시도 교위에 지시했다. 이는 자유교양대회가 고전읽기를 장려하기 위한 본래의 취지와는 달리 학생들에게 과열경쟁심을 유발, 고전독본 강매, 학부모 부담가중 등 각종 부작용을 빚어왔기 때문이다.” (중앙일보, 1975.10.1)


선생님이 사랬는데 안 산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한 나는 밥을 안 먹겠다고 했다. 엄마는 “먹기 싫으면 말라”고 했지만 결국 못 이기는 척 사주셨다.

그때 만난 책이 <하이디>이다. 다른 책들은 생각나지 않고 유일하게 그 책만 기억에 남아 있다. 책 디자인은 조잡하고 표지도 ‘새마을 운동’을 상징하듯 초록빛 커버였다.


당시만 해도 우리집엔 내가 읽을 만한 책이 없었다. 아버지 가게에서 일하는 아저씨들이 보는 <썬데이 서울>과, 한자 투성이 신문만 굴러다닐 뿐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감동적인 이야기라니. 딱 내 취향이었다. 명랑하고 마음 따뜻한 하이디는 내가 닮고 싶은 아이였고, 츤데레 할아버지는 꼭 우리 아버지 같지 않나. 푹신한 마른풀 침대의 느낌은 어떨까. 바람이 불 때마다 쏴~ 소리를 내는 전나무라니 어떻게 생겼을까. 내 맘대로 상상한 이미지는 오래도록 나를 행복하게 했다. 무엇보다 책이 이렇게 재밌는 건 줄 처음 알았다. 책을 읽으며 소리와 향기까지 느끼게 될 줄 몰랐다.


책을 잘 읽는 내가 기특했던지 엄마는 초등학교 5학년 어린이날, 어린이 세계명작 100권을 선물해 주셨다. 아마도 큰맘 먹고 사셨을 것이다. 나무 책장에 담긴 미니 사이즈 책은 보기만 해도 뿌듯했다.

초저녁잠이 많은 엄마가 방문을 열어보고, “아직도 안 자니?” 하며 책 읽는 나를 바라봤던 기억이 난다. 조용한 저녁, 혼자 책 읽는 시간이 좋았다.




결혼한 뒤 우리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책을 가까이해주고 싶었다. 되도록 좋은 그림책을 읽히고 싶었다. 어떤 책이 좋은 책인지 공부하고 메모했다.


아이가 잠자기 전, 무릎에 앉히고 그림책을 읽어 주었다. 어서 하루치 육아가 끝나기를 바라는데 그것도 모르는 아이가 더더!!를 외칠 땐 타협을 보기도 했다. 아이가 글씨를 모를 땐 내 맘대로 내용을 바꿔 읽기도 했다. 더 교육적인 내용으로.


그때 아이들이 좋아했던 그림책들은 내게 보물이다. 아이들은 잊었지만 나는 또렷이 기억한다. <구리와 구라의 빵 만들기>에서 부풀어 오른 카스텔라에 와~ 하고 반응했던 소리, <무지개 물고기>에서 반짝거리는 비늘을 만져보던 작은 손가락, <코끼리왕 바바의 모험>에서 바바가 백화점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락내리락할 때 안 돼요!라고 혼낼 때 움찔했던 표정, <콩콩이는 오늘따라 공차기도 재미없습니다>를 읽으며 “그림책도 다 본거야!”라고 함께 읽던 목소리가 아직도 선명하기 때문이다.


돌아보니 그 시절이 행복했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 책을 고르다 내가 그림책의 매력에 푹 빠져들었다. 막연하게 그림책 작가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물론 ‘나’를 생각하면 답이 없었기에 늘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긴 했다.

전업주부, 독박육아를 하다 어느 세월에 ‘내 일’을 하겠나, 아이들은 나날이 진보하는데 나는 나날이 퇴보하는구나, 이번 생은 끝났다….  

아이들과 나를 번갈아 보며 일희일비했다.

그러나 결국 다시 일을 시작했고, 뒤늦게 출발했으므로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한 때, 박수 칠 때 떠난 것이었다.


며칠 전 잠시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무료한 일상 때문이었을까. 계속 흐린 날씨 탓이었을까. 하천길을 걸으며 생각했다.

경력단절을 깨고 다시 일을 시작했을 때 들었던 생각이 떠올랐다. 백수일 땐 산책하면서 만난 출근길 아줌마가 부럽더니, 막상 다시 일을 시작하니 산책하는 아줌마들이 부럽네. 사람 마음이란 참…. 그랬었지.


찬 바람을 맞고 나니 비로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내게 따뜻한 위로를 건넸다. 은퇴 후 4년 만에 돌봄 노동에서 벗어났으니 마음껏 행복해하라고. 무엇보다 읽고 싶은 책을 읽을 여유가 있으니 지금을 누리라고.

엄마를 졸라 책을 손에 넣었던 그 시절의 내가 여전히 책을 좋아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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