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제어불가능한 변수 때문에 더 드라마틱한 게 아닐까. 사실 이런 문장은 모든 상황이 끝난 지금에야 쓸 수 있다.
그리스 여행의 중반, 딸 S와 난 이드라(Hydra) 섬에서 3박을 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크레타, 미코노스, 자킨토스 등의 후보군이 있었지만 피레아스 항에서 2시간이면 닿는 데다 자동차가 없는 섬이라니 궁금했다. 그리스 현지인들이 휴양하는 곳이고 관광객들은 그저 하루 코스로 들른다니 조용하겠다 싶었다.
다이렉트페리 사이트에서 오후 1시 페리를 예약했다. 호텔에서 체크아웃하고 이동하면 여유 있겠다 싶어서였다. 모바일체크인까지 완료하고 E8 게이트에서 기다리는데 아무래도 이상하다. 우리가 탈 배가 출항 준비를 하는 것 같지 않다. 감은 내가 잡고 현황 파악 및 문제 해결은 S가 해야 한다. 알아보니, 악천후로 오늘 운항이 모두 취소됐단다. 바람이 좀 불 뿐 쾌청한데 이게 무슨 날벼락일까. 아무튼 다른 방법이 없다. 게다가 이드라 숙소는 환불불가 예약이었다. 숙소 주인과 톡을 하니 이드라 날씨가 안 좋아지고 있단다. 하루치 예약은 취소해 줄 테니 걱정 말라는 말도 덧붙였다.
과연 내일 날씨는 괜찮을까? 2박도 못하면 어떻게 하지? 참 오늘은 어디에서 묵지? 걱정은 잠시일 뿐 조금만 숨을 고르면, 커피 한 잔을 여유 있게 마시면 차근차근 해결할 수 있다. 다행히 마지막 숙소로 예약해 둔 피레아스 호텔에 빈 방이 있단다. 우린 아시아 레스토랑에서 한식 비스무리한 음식을 먹으며 지친 마음을 달랬고, 목적 없이 피레아스 거리를 돌아다녔다. 잠들기 전, 내일은 꼭 이드라에 갈 수 있기를 기도했다.
출항이 취소된 다음날, 드디어 페리에 올랐다. 전날 10시 페리는 정상 운항했다는 소식에 무조건 일찍 떠나자고 했다. 상대적으로 작은 배라서 그런 걸까, 생각보다 많이 출렁댄다. 심상치 않은지 직원이 맨 앞으로 나와 승객들을 살핀다. 그리곤 익숙한 듯 비닐봉지와 휴지를 건넨다. 이럴 땐 일단 소음을 소거해야 한다. 에어팟을 끼고 음악에 빠져 든다. 꽤 괜찮은 선택이었다. 예정 시각보다 조금 늦게 이드라항에 도착했다. 와~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이드라의 첫인상을 보고 S와 난 여기 오길 잘했다고, 너무 맘에 든다고 탄성을 질렀다.
우린 집밥 같은 느낌을 준 Ostria의 음식과, 야트막한 언덕에서 본 일몰, 말로 표현할 수 없이 푸르른 바다를 보며 온전한 쉼을 경험했다.
마치 연출한 듯, 거실 창밖에 펼쳐진 아침 풍경도 평화로웠다. 우리가 여유롭게 책을 읽었던 파티오가 맘에 드는지 고양이가 단잠을 자고 있는 게 아닌가.
조식을 먹으러 항구 쪽으로 가니 배에서 온갖 생필품을 실어 나르느라 분주하다. 한편엔 당나귀가 대기하고 있다. 자동차 없는 섬의 대안이지만 동물보호 관점에선 짠하다. 먼 훗날엔 로봇이 그 역할을 할까.
작은 섬이라 해안을 따라 뷰포인트를 향하거나 숙소 뒤편 가파른 골목길을 오르는 데 얼마 걸리지 않는다. 사실 굳이 오르지 않아도 항구에서 본 풍경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마지막 날, 숙소에서 체크아웃을 하고 노천카페에서 책을 읽는다. 이럴 때 우린 각자의 시간을 즐긴다. 피레아스행 페리는 3시 반에 출발한다. 눈을 들면 쪽빛 바다와 엽서 같은 풍경이 들어온다. 쏟아지는 햇살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저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어도 행복한 마음뿐이다.
이드라는 오스트리아의 할슈타트 다음으로 다시 한번 가고픈 곳이다. 그땐 동생이랑 가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동생도 아마, 아니 틀림없이 좋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