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데이지 Apr 01. 2024

나른한 오후가 그리울 테지

이제 안녕~ 그리스!

그리스에서 돌아와 며칠 힘들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잘 쉬고 잘 먹었으니 일상으로 그냥 안착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내 몸의 약한 고리, 장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새 그리스 샐러드에 익숙해진 걸까. 오랜만에 먹은 김치가 맵게 느껴지더니 탈이 났다. 여행지에선 단 한 번도 아프지 않았는데 말이다.


왜 이렇게 힘들지? 이럴 땐 더 깔아지지 않도록 다독여줘야 한다.  

당연한 거야. 휴가 기간을 꽉 채워 여행 갔다가 출근했던 ‘왕년’ 때를 생각하면 안 되지. 왕복 비행시간만 30시간이 넘었잖아. 그리스에서 그렇게 잘 지낸 것만 해도 감사하게 생각해. 어쩌면 돌아와서 운동을 안 해서 그런 걸지도 몰라. 힘들다고 하지 말고 나가서 좀 걸어 봐.


꿈같은 여행이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매 끼니 뭘 먹을지 고민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그래도 그리스에서 찍은 사진들을 들여다보면 이내 기분이 좋아진다.




악천후 때문에 사라진 하루가 아쉬웠지만 이드라(Hydra)에서 2박 3일을 보내고 나니 뭔가 충만해진 느낌이 들었다. 이제 아무것도 안 해도 되겠다 싶을 만큼.

피레아스 항으로 돌아갈 땐 페리의 승선감이 좋았다. 파도가 잔잔하니 속이 울렁거릴까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전체 여행 중 이제 3박이 남았다. S와 난 아테네 시내로 들어가지 않고 피레아스에서 묵기로 했다. 이동의 편의성을 위해 항구에서 멀지 않고 지하철역이 가까운 숙소를 찾았다. 피레아스는 아침 일찍 떠나는 페리를 타기 위해 잠시 묵는 여행객들이 대부분인지라 호텔의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다음 날, 지하철을 타고 아테네 국립고고학박물관으로 향했다. 볼거리가 많지만 아크로폴리스 박물관보다 한산하다. 중정에 자리한 박물관 카페도 맘에 들었다.

박물관에 오디오 가이드가 있긴 한데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건 영어밖에 없어 아쉬웠다. 몇 분 듣다 포기한 내게 S가 간간히 설명해 준다. 이럴 땐 영어공부를 좀 해야지 싶은데 늘 마음뿐이다. 박물관은 오후 3시 30분에 문을 닫기 때문에 3시가 넘으면 벌써 정리하는 분위기다. 어디로 갈까 하다 타파스 같은 메제(Meze) 요리 전문 레스토랑을 찾았다. 사람 많은 플라카 지구 쪽으로 가지 않길 잘했다. 꽤 넓은 정원에 테이블들이 놓여 있다. 우리는 어느 정도 차광이 되어 있는 자리를 골랐다. 기분 좋은 바람이 살랑 불고, 담벼락 어디선가 투둑 소리가 나면 어느새 고양이가 가까이 와 있다. “빨리! 빨리!”에 익숙한 우리도 고양이처럼 나른한 오후를 즐긴다.

그다음 날, 오전 내내 카타르 항공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다. 돌아갈 때만이라도 편안하게 가자 싶어 도하-인천 구간의 엑스트라 레그룸을 예약했는데 모바일 체크를 하다가 뭔가 잘못 됐다는 걸 발견했다. 둘의 좌석이 떨어져 있는 데다 예약한 좌석번호도 아니었다. 이미 결제까지 완료됐는데 무슨 일인가 싶어 라이브 챗을 연결했는데 항공기가 바뀌어서 어쩔 수 없단다. 호텔 와이파이는 말도 안 되게 느려서 끊기기 일쑤였다. 세 번째 상담원을 만난 끝에 결국 엑스트라 레그룸 중에 떨어져 있는 자리로 다시 배정받았다. 그것도 이미 모바일체크인까지 완료돼서 안 된다는 걸 겨우 부탁해서 처리했다. (나중에 비행기를 타니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날도 S가 고생 많았다. 상담원 바뀔 때마다 똑같은 얘기를 다시 쓰느라.


느지막이 지하철을 타고 아테네 학당(아카데미)으로 갔다. 접근성 좋은 위치에 아테나 여신의 위용이 돋보인다. 국립도서관 - 대학 - 아카데미로 구성된 ‘건축 3부작’ 중에 하나라는데 공연이 예정돼 있어선지 내부 출입이 안 된다고 했다. 바로 옆 도서관은 어찌 된 영문인지 접근하기조차 싫은 정도로 방치돼 있었다.

지인에게 줄 소소한 선물들을 사고 무사카 맛집을 찾아갔다. 이렇게 복잡한 거리 한복판에서 식사하는 것도 그리울 테지. S에게 이번 여행 기간 동안 비가 한 번도 오지 않아 다행이라고 말한 게 잘못이었다. 식당 주변에 도넛 맛집이 있다고 해서 걸어가는데 갑자기 밀려오는 먹구름이 심상치 않았다. 도넛 가게 구석에서 소나기가 그치기를 기다리면서 괜한 말을 했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도 비가 곧 그쳤잖아. 사발면을 산 게 어디야.“ 우린 소울 푸드를 먹으며 그리스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11박 여정이 끝났다. 비행기는 오후 늦게 떠난다. 호텔에서 체크인을 한 뒤 캐리어를 맡기고 미리 알아둔 베이커리 카페로 향했다. S는 글을 쓰고, 난 책을 읽을 계획이다. 며칠 전 찾아간 피레아스 스타벅스는 테이블이 야외에만 있어 실망스러웠다. 다행히 호텔 가까이에 우리 일을 할 수 있는 카페가 있었다. 2층 창으로 얌전하게 정박해 있는 페리가 보인다. 지난 여행의 순간들이 유리창 앞에 슬라이드처럼 차례로 펼쳐진다. 부랴부랴 짐 싸서 바로 공항으로 향하지 않고 이렇게 멍 때릴 수 있는 시간이 있어 참 좋다고 생각한다.


이제 정말 안녕!

고마웠어, 그리스!!

매거진의 이전글 이보다 완벽할 수 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