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하면서 책 읽고 글 써야지, 했는데 겨우 브런치 글 한 편만 완성했다. 예상치 못한 풍경을 만났을 때의 탄성과 맛있는 음식을 마주했을 때의 행복감. 그런 생생한 느낌이 담긴 글을 원했으나 키보드에 손을 얹는 순간 어렵겠다 싶었다. 완성하기까지 적어도 3~4시간은 걸릴 텐데 내가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글쓰기의 감옥에 갇힌단 말인가. 난 언제쯤 가볍게 술술 글을 잘 쓸 수 있을까 생각하며 훗날을 기약했다.
11박 13일간의 그리스 여행.미세먼지 없는 하늘과 건강한 식재료로 만든 음식들이 나를 활기차게 했다. 잘 먹고 잘 자고, 시차 적응도 가뿐히. 순식간에 여행 모드로 전환하는 내 몸이 대견했다. 얼마 전부터 근육 운동을 한 게 도움이 된 걸까. 비행시간을 제외하곤 하루도 피곤하다, 힘들다, 식욕이 없다는 얘기를 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딸 S는 이런 나를 신기하게 바라봤다. 아마도 그간 이런 일상 탈출을 간절히 원했던 모양이다. 내가 식사준비 하지 않고 집안일을 하지 않아도 맛있는 식사와 깨끗한 방을 누릴 수 있는 시간들을.
본격적인 여행이 시작되는 둘째 날. <알쓸신잡>에서 유시민이 추천한 대로 아크로폴리스 박물관부터 갔다. 이 박물관에서 본 파르테논 신전의 위용이라니. 게다가 야외 테라스 카페의 뷰는 놀라웠다. 압도적인 풍경을 바라보며 와인 한 잔을 마시니 행복이 따로 없었다. 이 장면만으로도 아테네에 올 충분한 이유가 있다 싶었다.
그리고 필로파포스 언덕을 올랐다. S나 나나 산에 오르는 걸 싫어하는데 아크로폴리스 야경이 멋진 작은 언덕이라기에 힘을 냈다. 난 이곳이 너무 좋았다. 정상에 오른 다음에도 저 멀리 피레아스 항구에 닿을 듯한 오솔길을 더 걸었다. 시간이 어중간해서 오후에 올랐는데 오히려 더 좋았다.
셋째 날, 드디어 아크로폴리스에 갔다. 이곳을 포함, 총 7곳의 고대 유적을 둘러볼 수 있는 통합권(30유로)을 산다면 디오니소스극장에서 구입하는 걸 추천한다. 우린 미리 정보 검색을 하지 않아 아크로폴리스 티켓부스 긴 줄에 서 있었다. 게다가 아크로폴리스를 관람한 뒤에 밖으로 나와 디오니소스 극장으로 갔더니 이미 한번 들어왔기 때문에 입장이 안 된다고 해서 황당했다. 다행히 티켓 판매소의 멋진 언니가 우리의 읍소를 받아줘서 겨우 들어갔다.
파르테논 신전은 언제 끝날 지 알 수 없는 보수 공사에 들어갔지만 더없이 푸르른 하늘 덕에 비현실적인 풍경을 연출해 줬다. 고층건물이 없는 아테네 시내를 빙 둘러볼 수 있는 그곳에 서 있으니 기원전 5세기 건축물이라는 게 불가사의하게 느껴진다.
넷째 날엔 케라메이코스와 하드리아누스 도서관, 로마 포룸, 아테네의 아고라 등을 둘러봤다. 사실 통합권을 사지 않았다면 케라메이코스 묘지까지 둘러보진 않았을 테지만 나름대로 호젓한 산책 코스였다. 이 날은 토요일이라 이 일대가 무척 혼잡했다. 게다가 4시 40분이 되자 곧 마감이라며 서둘러 내보내는 바람에 아고라에선 오래 머물지 못했다. 헤파이토스 신전에서 내려오면서 자꾸만 뒤돌아봤다.
다섯째 날. 호텔에서 나와 익숙하게 트램을 탔는데 한 정거장 가더니 되돌아간다. 우리가 잘못 탄 건가 싶었는데 시내에서 마라톤 대회가 있어 못 들어간단다. 하는 수 없이 지하철로 갈아타고 시내로 들어가니 거리가 축제 분위기다. 이제 막 끝났는지 메달을 목에 건 가족 단위 참가자들이 많았다. 국립 정원을 가로질러 제우스 신전으로 향했다. 이곳 역시 보수공사 중. 기둥 하나는 누워 있어 단면을 볼 수 있다. 저렇게 조각조각을 이어 올려 기둥을 만드는 모양이다.
그다음엔 최초의 현대적인 올림픽 경기장인 Panathenaic Stadium으로 갔다. 한국어 오디오가이드가 있어 생각보다 오래 머물렀다. 마지막 하이라이트는 역시 아크로폴리스 뷰. 그걸 보려고 가파른 경기장 객석 계단을 올랐다. 이제 파르테논 신전이 보이면 안도하게 된다. 아테네 사람들도 그런 마음이지 않을까.
아테네를 여행한 사람들이라면 “아니, 이걸 닷새 동안 봤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S와 난 딱 적당한 일정이었다. 호텔에서 조식을 든든히 먹고 느긋하게 출발해서 오늘의 관람 코스 둘러본 다음 이른 저녁을 먹고 다시 숙소로 돌아가는. 욕심 같아선 세끼를 먹고 싶었으나 불가능했다. S가 고른 식당의 메뉴는 하나같이 만족스러웠고, 어느새 그리스식 샐러드와 하우스 와인은 필수가 되었다. 난 놀랍게도 우리나라 음식이 그립지 않았다. 아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러갔나? 중반으로 향하는 일정이 아쉬울 뿐이었다. 그렇게 아테네에서의 5박이 저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