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요즘엔 엔화 환전하시는 분들이 많아서 유로화는 오랜만이네요. 그리스 가시는군요. 너무 부러워요. 잘 다녀오세요.”
은행 직원이 진심 부럽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진다. 여행지 선택을 잘한 건가?
딸 S와 그리스에 가기로 한 건 둘의 취향이 얼추 맞았기 때문이다. 나는 대자연보다 도시를 좋아하는 것 같다. 분위기 있는 카페와 건강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식당, 독특한 건축물들이 많은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걸 좋아한다. 바짝 일하느라 진이 빠진 S에겐 무조건 힐링이 되는 여행이어야 한다. 이왕이면 물가가 비싸지 않고 춥지 않은 곳이면 좋겠다 싶었다. S가 여기저기 생각하더니 10년 전 아테네의 인상이 좋았다고 엄마도 좋아할 것 같다고 권한다. 그리스라니, 생각지도 못했는데. 설렘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허나 늘 그렇듯 별 준비도 없이 여행을 떠나게 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전집을 읽어 둘 걸. 책장에 얌전히 꽂혀 있는 5권 세트 책을 꺼내 들곤 엄두가 나지 않아 작가 이야기만 읽었다. 대신, 유시민이 쓴 <유럽도시기행 1> 아테네 편을 다시 읽었다. 그리고 <꽃보다 할배>와 <알쓸신잡> 그리스 편 영상을 찾아봤다. 내륙 여행은 아테네를 중심으로 델피, 칼람바카(메테오라 수녀원), 고린토스를 많이 찾는 모양이고 섬은 크레타와 산토리니, 미코노스 등을 많이 다녀오는 듯했다. 특별히 많은 곳을 보겠다는 욕심이 없으니 일단 아테네 숙소만 정하고 떠나기로 했다.
그런데 그리스가 이렇게 멀던가? 항공권을 예약하면서 그제야 알았다. 게다가 직항이 없다. 예전엔 있었는데 코로나 이후 사라졌다고 한다. 가성비와 출/도착 시각을 고려해 카타르 항공을 선택했다. 인천공항에서 카타르 도하까지 10시간 55분, 도하에서 아테네까지 다시 5시간을 날아가야 한다. 이탈리아나 독일을 경유해 그곳에서 며칠 머무르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느릿느릿 여행하는 우리에겐 버거울 듯싶었다.
카타르항공은 출발 48시간 전에 모바일 체크인이 가능하다고 했다. 앱 알림을 받고 바로 체크인을 하려니 안된다. 무슨 이유에선지 안 된다고 메시지 창이 뜬다. 좌석 지정은 가능했다. 덕분에 앞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불안하다. 인터넷을 검색하니 체크인 하지 않고 좌석 지정을 먼저 해서 그렇단다. 지정된 좌석을 해제하려고 해도 앱에서 바로 반영되지 않는다. 몇 차례 시도하다 내버려 뒀더니 한참 뒤에야 체크인이 열렸다. 그냥 시간이 해결해 주는 것이었다.
인천공항에서 출발하는 시각이 0시 15분이라 사실상 출국 전날 공항에 가야 한다. 밤 늦은 시각이라 기다릴 필요 없이 출국 수속이 바로 진행되니 좋다. 학기가 시작되는 3월이라 더 한산한 듯하다.
처음 타본 카타르항공 좌석은 3-3-3으로 배치돼 있다. 좌석 간 간격도 좁지 않다 싶었는데 앞자리 승객이 최대로 의자 등받이를 젖히니 숨이 막히는 듯하다. 게다가 첫 번째로 준 식사는 먹지 않았어야 했는데, 새벽 시간에 먹어선지 속이 좋지 않았다. 다행히 챙겨 온 소화제 덕분에 한 고비를 넘겼다.
예정시각보다 조금 일찍 도하 공항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장거리 비행을 하니 힘들긴 하다. 2시간여 쉬어 가니 오히려 다행이다 싶다.
카타르항공의 업무 속도는 느리다. 사람이 적은 건가. 한 시간 전부터 탑승수속을 한다기에 이상하다 했는데 그럴 만하다. S 말대로 줄 서지 말고 늦게 수속을 밟을 걸. 시도 때도 없이 끼어드는 사람들과 어느 줄인지 알 수 없이 뒤엉킨 줄에 서 있으려니 지친다. 게다가 버스를 타고 대체 어디까지 가는 거야 싶을 만큼 멀리 활주로를 누빈 끝에 비행기에 올랐다. 도하에서 아테네까지는 5시간. 이제 그 정도 비행은 가볍게 느껴진다.
드디어 아테네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호텔까지는 지하철을 타고 이동했다. 그런데 출구를 잘못 선택한 모양이다. 에스컬레이터가 중간까지밖에 없다. 무거운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꽃할배에서 보았던 풍경이 떠오른다. 이서진이 날랐던가. 지하철 역에서 호텔까지 10여 분 걷는다기에 그 정도면 괜찮지 싶었는데 힘들다. 동유럽 거리처럼 울퉁불퉁한 길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보도 포장 상태가 좋지 않다. 게다가 한 블록 지나 보도로 올라설 때마다 단차가 있어서 캐리어를 들어 올려야 한다. 빡세다. 신호등은 짧고 자동차는 양보하지 않는다.
지칠 대로 지친 끝에 호텔에 도착했다. 피곤하지만 그냥 잘 수는 없다. 저녁 식사를 하러 지하철역 근처 <Kalamaki Bar>에 갔다. 돼지고기, 닭고기, 양고기 꼬치를 주문하고 구글에서 본 이미지가 먹음직스러웠던 Dakos, 그리고 하우스 와인과 맥주를 시켰다. 구글 평점대로 나쁘진 않다. 그러나 테이블 위에 놓인 물이 2유로라는 건 계산서를 보고 알았다. 그리고 팁을 묻는다. 5%, 10% 중에 선택하란다. 그리스는 굳이 팁을 주지 않아도 된다고 하던데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식당이라 그런가 보다. 그리 비싸지 않으니 기분 좋게 내기로 한다.
첫날 그리스의 인상은 잘 모르겠다. 너무 피곤해서인지도 모른다. 지하철이 통과하는 벽마다 그래피티가 가득하고, 생각보다 아테네 도심은 쇠락해 보인다. 호텔로 걸어가는 길엔 우리나라 같으면 진즉 재건축했을 건물들이 즐비하다. 오랜 기간 경제 위기를 겪은 나라이니 그럴 법하다는 생각도 든다. 자, 천천히 마음을 열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