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여행지는 싱가포르였지
요즘 살짝 들떠 있다. 여행이 다가오고 있다. 딸 S와 단둘이 가는 여행은 9년 만이다.
그래서일까. 얼마 전부터 2015년 시애틀 클램차우더 맛집에서 찍었던 사진 한 장이 떠올랐다. 기억은 생생한데 컴퓨터 어느 폴더에 있는지도 모르는 그 사진. 햇살이 내리쬐는 마켓플레이스 창가 테이블 자리. 살짝 눈이 부신 듯한데 내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밝다. S는 늘 행복해하는 내 표정을 카메라에 담아 주곤 했다. 난, 만날 사진 찍기 싫다고 하곤 사진이 잘 나오면 엄청 좋아하는 타입이다.
S와 처음 여행을 떠난 건 2010년이었다. 아주 멀지 않고 자유여행하기 안전한 도시를 찾다 우린 싱가포르로 가기로 했다. 사실 어디라도 좋았다. 우리에겐 여행 전후로 나뉠 새로운 출발의 기운이 필요했다.
S에게 “너는 말을 하거라, 나는 계획을 짜마”라고 했지만 나도 자유여행은 처음이었다. 간신히 에어텔을 예약하고 여행블로거 글을 찾아 읽은 정도였다. 싱가포르 공항에서 택시를 타자마자 멘붕이 온 건 S도 마찬가지였다. 도저히 기사 아저씨의 영어 발음을 알아들을 수 없단다. 그래도 초짜들의 여행 치곤 괜찮았다. 일부러 먼 길을 돌아가고 거스름돈도 덜 준 택시기사의 행태는 괘씸했지만, 블로거의 조언대로 출국하기 전에 예약해 둔 칠리크랩 맛집은 만족스러웠다. 당일치기로 갔던 센토사섬, 루지를 타겠다고 스카이라이드에 오르던 순간 두근댔던 기억도 난다. 날씨가 더워 힘들긴 했지만 거의 계획대로 돌아다녔던 것 같다.
여행을 마치고 S가 말했다. 대학 가거든 또 여행 가자고, 자신이 일정 다 잡을 테니 걱정 말라고. 말만 들어도 행복했다.
늘 그렇듯 약속은 힘이 세다. 5년 후. S는 일정상 안 된다는 나를 꼬드겨 결국 미뤄둔 안식월을 쓰게 하더니, 무려 한 달 꽉 차는 여행을 제안했다.
우린 가족들이 사는 미국 서부와 밴쿠버를 중심에 두고 시애틀을 첫 여행지로 잡았다. S도 처음 가는 도시인데, 나는 자꾸만 채근했다. 여기가 맞냐, 확인해라, 지나친 것 아니냐, 저쪽으로 가는 게 아니냐…. 여행 초반, 도움이 되지 않는 잔소리로 힘들게 했다. 아직도 십대 그 시절의 딸인 양 불안해했던 것 같다. 그 마음을 내려놓으니 한결 편안해졌다. 볼 것 없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난 시애틀이 좋았다. S가 이끄는 대로 일몰이 아름다운 케리 공원의 기다림도, 맛집 순례도. 예술가들의 손길이 깃들어 있는 거리와, 시장 •도서관 같은 공공시설들도 참 부러웠다.
워낙 땅덩어리가 넓은 대륙인지라 밴프/재스퍼 일정과 옐로스톤은 패키지 여행에 합류했다. 효율적인 동선으로 최대한 많은 곳을 둘러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아침형 인간이 아닌 우리들이 매일 새벽에 일어나 출발하는 건 고역이었다. 레이크 루이스에 가서 30분밖에 머무르지 않은 것도 너무나 아쉬웠다. 우린 단체 여행이 맞지 않는 유형이란 걸 다시 깨달았다.
밴쿠버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이동할 때 S가 포틀랜드에 들르자는 걸 너무 힘들다고 말린 건 두고두고 원성을 들었다. 포틀랜드가 그렇게 매력적인 도시라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무리가 되더라도 가는 건데…. 나중에 <포틀랜드, 내 삶을 바꾸는 도시혁명> 책을 읽고 후회했다. 암튼 S가 제안하는 건 무조건 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S는 나의 베스트 여행파트너이다. 다시는 못 올 것처럼 점을 찍으며 바쁘게 돌아다니는 여행이 아니라, 현지의 일상을 느끼는 여행이 뭔지 깨닫게 해줬다. 좋아하는 여행지가 어딘지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사이, 맘에 드는 장소를 발견했을 때 제일 먼저 생각나는 소울 메이트이기도 하다. 언젠가 함께 하는 여행이 버거울 날이 오겠지만, 최대한 안 그런 척 그 시간들을 늦추고 싶다.
S가 유일하게 까다롭게 구는 건 사진이다. 다시, 다시…. 특히 인물사진에 취약한 나는 몇 번씩 퇴짜를 맞아야 했다. 아마도 이번 여행에서도 고된 훈련이 예상된다. 부디 그 교육이 날마다 리셋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