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에 어디 안 가고 집에 머무는 게 아직도 낯설다. 2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형제들과 함께 설을 보내고 우린 또다시 뿔뿔이 흩어졌다. 요양원에 계신 엄마께는 가급적 명절 전후에 다녀오곤 한다.
명절의 번잡함과 피곤함이 그립다니 늙어가나 보다. 아님망각의 동물이 되었거나.
난 시어머니께 늘 늦게 온다고 타박을 들었다. 부부 둘 다 느려터진 데다 아침형 인간이 아니었으니 명절날 애를 쓴다고 했는데도 이제 오느냐는 소리를 들었다. 게다가 나름 곱게 자란 탓에 부엌살림은 잘하는 게 없었다. 아직도 잊히지 않는 ‘말들’ 때문에 오랜만에 돌아가신 시어머니 생각을 했다.
다들 타국에 살고 있어 손주들이라곤 우리집 애들뿐인 친정 부모님은 또 얼마나 기다리셨을까. 역귀성이라 우리가 조금만 일찍 출발하면 수월할 텐데, 그걸 알면서도 우린 미련스럽게 교통체증을 겪었다. 아버진 손주들 세뱃돈 준다고 일찌감치 은행에 가서 빳빳한 신권을 준비하시곤 했다. 그러고 보니 아버진 돌아가시기 직전에도 지갑을 털어 손자에게 마지막 세뱃돈을 주셨다. 설날을 보름쯤 앞둔 때였다.
명절이 뭐 대수냐고 했는데 올해는 왠지 허전했다. 그래서 J가 여행 가자는 말에 선뜻 오케이 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갑자기, 설 연휴 마지막 자락을 걸치고 전주에 다녀왔다.
전주는 내가 좋아하는 도시다. 비빔밥 먹으러, 막걸리한상 먹으러, 한옥마을 둘러보는 재미로 가곤 했다.
요즘엔 어느 도시를 가도 우리 애들이랑 언제 왔는지 기억하는 게 첫 번째 일이 됐다. 그때 뭐 먹었더라, 어딜 갔더라, 어느 호텔에 묵었더라….
첫 번째 행선지는 전주국립박물관이다. 박물관 마당에선 아이들이 민속놀이를 하고 있다. 모처럼 날씨도 풀려 따뜻하다. 엄마 아빠와 줄넘기를 하고 투호, 버나 돌리기, 연날리기하는 아이들 모습을 바라본다. 우리 아이들 모습이 겹쳐 보이는 듯하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을까.
천천히 전시공간들을 둘러보고 2층으로 올라가니 대형 LED 화면이 맞는다. 요즘 박물관은 ‘실감영상’이 대세라더니 옛 그림 속 풍경이 환상적으로 펼쳐진다. 화사한 꽃잎이 떨어질 듯하고, 시간여행을 하듯 그 시절로 빨려 들어가는 듯하다.
오늘의 볼거리를 마쳤으니 이제부턴 본격 먹을거리 차례다. 초저녁에 오원집에 가서 상추쌈에 김밥과 돼지불고기를 얹어 가볍게 소주를 마시고, 천천히 시내를 통과해 수제 맥줏집 노매딕비어템플에 들렀다. 내가 좋아하는 IPA를 마시니 기분이 좋아진다. 왕년의 우리라면 살라미플레이트 안주 하나로 다양한 맥주 맛을 탐닉했을 텐데, 다음을 기약하기로 한다.
다음날 아침은 비빔밥. 처음 전주비빔밥을 먹고 우리 아이들이 좋아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늦은 점심 때라 배고프기도 했지만, 놋그릇에 담긴 비주얼에 반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었지. 감동적인 맛은 아니지만, 이 많은 나물을 만들려면 손이 많이 갔겠다 생각하며 감사히 먹었다.
한옥마을을 패스한 대신 서학동예술마을에 가보기로 했다. 명절연휴 다음날이라서인지 동네는 한산했고, 예술가들의 공방도 대부분 문이 닫혀 있었다. 입구에 있는 도서관이나 구경하고 가자고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섰는데, 와~ 감탄이 절로 나왔다. 내가 딱 좋아하는 풍경이 펼쳐져 있지 않나. 좀 전에 J랑 투닥대던 마음이 눈 녹듯 사라진다. 앤서니 브라운의 <우리는 친구>라는 큰 그림책을 펼치고 끝까지 있으니 저절로 웃음까지 지어진다.
이 귀여움을 어쩌지? 아, 그동안 그림책을 멀리 했었네.
천천히 도서관 내부를 둘러본다. 붉은 벽돌 외벽과 어울리는 목재로 구석구석 아기자기한 공간들이 연출돼 있었다.
“여기가 시에서 운영하는 도서관인가요?”
“네, 맞아요.” 자원봉사하는 분이 공간 구석구석을 안내하며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예술을 주제로 큐레이션 하고,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을 수 있는 곳. 책을 빌려주는 도서관이 아니라 책과 함께 머무는 공간.
“아, 여기에 산다면 매일 오고 싶을 것 같아요!”
그야말로 공공건축물의 변신이다. 건물 모양만 봐도 딱 시립도서관 같은 건물들만 짓는데, 이곳은 기존에 카페였던 건물을 매입해서 리모델링했다고 한다. 주변 예술가들이 힘을 모아 디자인한 덕에 여느 도서관보다 아늑하다. 곳곳에 예술가들의 재치가 담긴 작품이 설치돼 있다. “조심해!”라고 말해주는 듯, 단차가 있는 계단에 물구나무 서기한 아이 그림이 걸려 있고, 바깥 담장 바닥엔 구슬통을 쏟은 듯 바닥에 반짝반짝 구슬이 박혀 있는 작품이 연출돼 있다.
도서관과 연결된 옆 건물에선 서학마을에 상주하는 예술가들의 작품이 전시 중이다. 봄이면 더 예쁠 작은 마당도 정성껏 돌본 흔적이 엿보인다. 2백 년 된 팽나무와 어우러진 도서관을 다시 한번 눈에 담으며 발길을 돌렸다.
마지막으로 들른 덕진공원의 연화정도서관도 이색적이었다. 커피 한 잔 마신 다음 산책할 겸 들른 곳이었는데, 한옥 건물에 이런 도서관이라니. 이 역시 상상하지 못한 공간이었다. 덕진공원 호수가 한창 공사 중이라 뷰는 아쉬웠지만, 다음 여행 땐 전주의 작은 도서관들만 들러봐도 좋겠다 싶다. 그야말로 도서관에 진심인 도시, 많이 부러웠다. 덕분에 이번 여행의 콘셉트는 전주의 재발견. 가볍게 떠난 여행이었지만 여운은 길게 남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