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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지 Sep 30. 2024

언니에게

아픔 말고 사랑으로 기억해 줘요

내겐 언니가 없다. 있었는데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이번 추석에 문득 그 언니에 대해 생각했다.


엄마는 언니를 ‘잃어버렸다’고 했다. 어릴 적 그 얘기를 들으면서 엄마가 참 답답하다고 생각했다. 미아 찾기 센터에 신고라도 하시지, 엄마는 왜 적극적으로 언니를 찾는 노력을 하지 않는지. 그때가 언제였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아마도 초등학교 4, 5학년 무렵이었던 것 같다. 여느 날처럼 동생들과 둥그런 밥상에서 저녁을 먹던 날, 엄마에게 그 얘기를 처음 들었다.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도대체 왜 찾지 않느냐고 거듭 물었지만, 엄마는 아무 말 없이 눈길을 돌릴 뿐이었다. 얼핏 눈물을 보였던 것도 같다.


그 언니는 엄마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당신이 일생일대 결심을 하고 상경하던 날. 엄마는 오빠보다, 젖을 뗀 지 얼마 안 되었을 어린 언니를 바라보며 오래 눈에 담아 두었을 것이다.

박완서 작가의 책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를 읽으면서 엄마 생각이 났다. 박완서 작가의 어머니도 남편이 황망하게 세상을 떠나자 큰 아이(박완서 작가의 오빠)만 데리고 서울로 떠난다. 내 자식만은 아픈 사람 앞에서 푸닥거리나 하다 치료시기를 놓친 촌이 아니라 서울에서 공부시키겠다는 결심 때문이었다. 그 대목을 읽으며 엄마의 그때 그 마음을 헤아려 보았다. 어쩌면 엄마의 상경도, 내가 이제껏 짐작한 것처럼  ‘이 사람이랑은 더 이상 못 살겠어’가 아니라, ‘내 자식만은 이 두메산골에서 키울 수 없어’가 아니었을까 하고.   


오래지 않아 엄마와 아빠는 서울에서 재결합한다. 그러나 엄마는 언니를 다시 볼 수 없었다. 아버지 살아 계실 적에 그 언니에 대해 어렵사리 물었는데, 급체였던 것 같다고 짧게 말씀하실 뿐이었다. 아마도 가장 늦게 전깃불이 들어왔을 그 두메산골에서 체하면 고작해야 손이나 따줬을 것이고, 언감생심 의사를 부를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때문인지 엄마는 막장 드라마를 보시다가도 자식 버리는 것 아니다,라는 말씀을 혼잣말처럼 하시곤 했다. 그 말씀 속엔 단 한 번도 어린 딸에 대한 사랑을 저버린 적이 없다는 고백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늦어버렸다는 자책이 뒤엉켜 있으리라. 어쩌면 엄마와 아빠의 연결, 우리 가족의 재탄생은 언니 덕분이었는지도 모른다. 엄마에겐,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의 유일한 자식이 된 오빠마저 잃을 수 없다는 굳은 다짐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고등학교 때, 교회 친구집에 우르르 몰려간 적이 있었다. 그 아이 앨범을 보다가 새삼 집안 차이가 느껴졌다. 부모님이 해마다 사진관에 데려가서 찍어줬다던, 그 애의 생일 기념사진들 때문이었다. 새하얀 와이셔츠에 재킷, 멋진 모자까지 제대로 갖춰 입은 아이가 해마다 커가는 게 보인다. 어릴 적 내 사진이라곤 돌 무렵 엄마 아빠, 오빠와 찍은 가족사진뿐인 나는 그게 몹시 부러웠다. 그런데 철석같이 믿고 있던 그 사진마저 내가 아니란 사실을 몇 년 전에야 알았다. 사진 속 까까머리 그 아이는 너무 일찍 하늘나라로 떠나버린 나의 언니였다.


몇 해 전, 엄마 아빠 사진을 모아 새 앨범에 끼워 넣으면서 아버지랑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날이었다. 여태껏 나라고 믿어 왔던 사진을 보며 “아니 아빠, 난 왜 이렇게 놀란 표정이야, 머리는 또 왜 박박 밀어 줬대?”라고 했더니, 아버지가 폭탄발언을 하신다. “야. 그거 너 아니다.” 의아해하는 내게 아빠가 덧붙여 말한다. “늬 오빠랑 비교해 봐라. 너랑 일곱 살 차인데 오빠가 너무 어리잖니.”

맞네. 오빠가 초등학교 1학년 얼굴이 아니네. 난 당연히 오빠 다음엔 나니까 나라고 생각했던 건데, 엄마는 그동안 아픈 상처 때문에 사실대로 얘기해 주지 않았던 것이다.  


이로써 어릴 적 내 첫 사진은 여섯 살 무렵에야 등장한다. 유치원에 입학하기 위해 찍었던 증명사진. 두 살 터울 동생이 둘이나 생겨나고, 아버지 사업이 잘 되면서 번듯한 우리집도 생겼지만 카메라는 여전히 사치품이었던 모양이다. 우리 동네에 배경화면이 멋진 이동식 사진관(아마도 손수레를 개조한)도 자주 찾아왔건만, 엄마는 흔하디 흔한 그 사진마저 찍어주기 않았다.


내 사진이 아닌 게 돼 버렸지만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세상에 온 흔적도 없을 뻔한 언니 모습이 단 한 장의 사진에 남아 있으니 말이다. 온 가족이 장에 갔을 때였을까. 다 함께 엄마 친정에 다녀온 길이었을까. 아빠가 웬 바람이 불어 사진을 찍자고 했을까. 자 찍습니다, 하나 둘! 소리에 조명이 짝 하자 언니가 놀랐던 모양이다. 겁먹은 표정이지만 사진 속 언니는 이목구비가 뚜렷해 보였다. 언젠가 작은 아버지한테도 들었던 것 같다. 네 언니 예뻤다고, 그리고 첫 딸이라 온 가족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할머니가 아들만 내리 여섯을 낳은 집안에 드디어 여자 아이가 처음으로 태어났으니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데 선물처럼 왔다가 너무 빨리 가버렸으니 다들 얼마나 슬펐을까.


언니가 살아 있었으면 어땠을까, 가끔 생각하곤 한다. 언니는 분명 나보다 얘기도 잘 들어주고 살가웠을 것 같은데. 나는 사실 언니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놀랍게도 어린 시절 여동생을 챙겨주거나 놀아 줬던 기억이 별로 없다. 나는 점잖은 장녀 노릇을 했고 동생들은 자기들끼리 놀았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철이 든 후에야 우리 자매는 가까워졌다. 둘 다 까칠하지만 매일 서로의 수다를 받아줄 줄 아니, 이것만으로도 고맙고 소중하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언니를 떠올리며 언니 노릇에 대해 생각한다. 이제야 철이 드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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