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집의 추억
“동생~ 무더위에 잘 지내고 있나?”
외사촌 H언니한테 오랜만에 카톡 메시지가 왔다.
초기에 대장암 진단을 받은 외숙모는 수술하시고도 꽤 건강하셨는데 치매 증세가 있다 들었다. 어떻게 지내시냐고 물었더니 요양원에 모셨다 한다. 3월에 가셨는데 여전히 집에 가고 싶다고 하신단다. 우리 엄마도 그랬다고, 외숙모가 적응하시는 데도 시간이 필요하다고, 괜찮으실 거라고 위로의 말을 전한다.
엄마의 형제는 남동생뿐이다. 엄마가 정확하게 이름을 기억하는 외삼촌은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셨지만, 엄마는 치매 증상이 나타난 이후 유독 외삼촌을 찾았다.
1945년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그날, 엄마는 외할아버지를 잃었다. 드라마 <파친코>에서처럼, 이미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었기에 외할아버지는 온 가족을 히로시마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안전하게 대피시켰지만, 당신은 일터를 떠나지 않았다. 네 식구의 생계뿐 아니라 한국에 있는 형제들을 위해 돈을 부쳐야 했기 때문이다.
아홉 살에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은 엄마는 오래지 않아 외할머니와도 생이별하고 남만도 못한 작은아버지 집에서 눈칫밥을 먹게 된다. 엄마의 유일한 가족은 외삼촌뿐이었다.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모질 수 있는지, 돈줄이었던 외할아버지의 부재를 받아들일 수 없는 친척들은 남겨진 가족들을 괴롭혔다. 엄마는 끝도 없는 집안일에 아이 돌보는 일까지 떠맡아야 했다.
그 어린 날 엄마의 고된 삶이 어땠는지 나는 지금도 헤아리지 못한다. 그러나 엄마가 왜 두 딸들에게 집안일을 시키지 않았는지는 안다. 당신의 자식들이 귀하게 자라길 바라는 그 사랑은 안다.
그래서 난 소망한다. 엄마가 선택적으로 과거를 잊을 수 있다면 하루아침에 아버지를 잃었던 슬픔과, 친척들의 냉대를 받았던 그 시절들을 잊기를. 유일하게 엄마를 안쓰러워하셨던 외증조할머니의 사랑만을 기억하시기를.
외삼촌네 식구들과의 기억은 같이 살았던 영등포 집에 가장 많이 남아 있다. 아버지의 사업이 제법 잘 풀리면서 처음으로 장만한 집이었다. 외삼촌 네는 문간방에 살았다.
나는 그 집이 좋았다. 우리집에만 TV가 있던 시절. 일찌감치 저녁을 먹고 우리 식구와 외삼촌 가족, 그리고 안쪽 셋방에 살던 사람들까지 모두 둘러앉아 일일 연속극을 봤다. 누군가가 뚫어져라 장롱 거울을 보길래 왜 TV 안 보냐고 했더니, 거기가 더 잘 보인다고 해서 웃었던 기억. 나는 반짝반짝 윤이 나는 마루를 좋아했다. 새로 빤 홑청으로 이불을 꿰매는 엄마 옆에 누워 흘러가는 구름을 보았던 기억. 막내 동생이 태어났던 날의 분주함까지 생생하다.
외숙모는 늘 일감을 받아와 집에서 일했다. 그러면 난 외숙모 옆에서 스카프 홀치기 하는 걸 구경했고, 털실 감는 걸 돕기도 했다. 난 외숙모가 좋았다. 어떤 이야기도 재미있게 풀어내는 입담에 홀리듯 귀를 기울이다 보면 시간이 훌쩍 갔다. 작은 도움도 고맙다, 잘한다 말해 주는 착한 마음씨가 좋았다. 몇 해 지나지 않아 우린 다른 집으로 이사 갔고, 그 집은 외삼촌 집이 되었다. 거저 넘겨줬네 어쩌네, 작은 아버지들은 길길이 뛰었지만 엄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느이 외삼촌이 얼마나 머리가 좋은 줄 아니? 엄마는 외삼촌이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걸 늘 안타까워하셨다. 외삼촌 일이 잘 풀리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는 듯했다. 뒤늦게 외숙모가 생활전선에 나섰다. 호탕하고 성격 좋은 외숙모는 역시 장사 수완이 좋았다. 외숙모가 앞장서고 외삼촌이 거드니 일이 술술 풀렸다.
그러나 외삼촌은 피어나지 못한 자신의 꿈과 신세를 술로 달래더니 일찍 세상을 떠났다. 동갑내기 외삼촌과 늘 티격태격하시던 외숙모는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만날 구박만 했는데 이것저것 챙긴 일이 너무나 많았다고, 나를 만날 때마다 외삼촌 얘기를 하셨다. 외숙모는 요양원에 들어가실 때까지 예전 우리가 같이 살았던 그 집에 사셨다. 주변에서 그 집 팔고 아파트로 이사 갔으면 몇 배는 벌었을 것이라고 얘기해도 외숙모는 떠나지 않았다. 예전 집을 허물고 세를 줄 수 있는 다세대 주택으로 개조한 그 집이 편하다 하셨다.
엄마는 외숙모가 직접 만든 된장이나 짠지를 얻어오는 걸 좋아하셨는데, 선뜻 먼저 찾아가는 타입은 아니었다. 기다리다 연락이 없자 하나밖에 없는 형님을 챙기지 않는다고 서운하다는 말만 했다. 외숙모가 대장암 수술을 받은 이후, 혼자서 전철 타고 오시기 힘든 때부터 소원해졌던 것 같다.
외숙모가 요양원에 가시기 전, 고모 보고 싶다고 하셨는데 못 만나게 해 드려 죄송한 마음이 든다는 H언니 말에 가슴이 아려 온다. 그 전에, 엄마가 외숙모 얘기를 하실 때 내가 한번 모시고 갈 걸…. 자식들은 늘 게으르다. 이런 저런 핑계로 미루다 결국 두 분은 더 멀리 떨어지게 됐다.
외숙모가 보고 싶다. 구수하고도 따뜻한 음성을 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