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이 아파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때, 밥 한술 넘기기도 힘들 때, 아버지 생각이 났다. 식도암으로 투병하실 때 얼마나 힘드셨을까, 뒤늦게 눈물이 났다.
그래도 난 밥 차려줄 가족이 있어 다행인데, 혼자 사는 확진자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먹을 걸 제대로 챙겨 먹지도 못 했을 텐데….
코로나에 걸린 모든 사람들에게 연대의식이 생겼다. 몇 달 전 코로나에 걸린 친구들이 생각나, 단체 카톡방에 메시지를 남겼다.
“너희들도 이렇게 아팠겠구나.”
다행히 격리 5일 차부터는 목소리도 나오고 기운이 생기기 시작했다.
드디어 격리 해제! 이제 감염 위험은 없다지만 완벽히 나은 것 같지 않아 조심스럽다. 독한 약들을 먹어선지 입안은 여전히 쓰디쓰다. 후유증으로 기침이 오래간다는데 민폐를 끼칠까 걱정스럽다.
나 같은 백수야 별 문제없지만, 일주일 격리가 끝나자마자 출근해야 하는 사람들이 새삼 안쓰러웠다. 정상적인 컨디션으로 일하기 어렵겠다 싶었다.
코로나에 걸려서 제일 많이 한 생각은 ‘당분간 카페에서 글 쓰는 건 힘들겠구나’였다. 브런치 작가 도전 글과 네 편의 게시글을 썼던 공간들과 자유로운 시간들이 그리워졌다.
아침 8시, 집 근처 카페까지 산책하듯 걷는다. 거의 언제나 첫 손님. 커피와 샌드위치를 먹으며 글쓰기를 시작한다.
사실 글쓰기의 결과물은 빈약하기 짝이 없다. 두세 시간 동안 이것밖에 못 썼나 싶은 날이 많다. 기껏 썼던 글을 다시 고쳐 쓰느라 새 글은 손도 못 대기도 한다.
제일 먼저 ‘착한 치매’를 앓는 엄마 이야기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어쩌면 이 글쓰기야말로 엄마를 잊지 않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시작한 글에 댓글이 달린다. 너무도 많은 부모님들이 치매를 앓고 계셨다. 위로해 주신 분들의 마음이 따뜻하게 전해지는 경험을 했다.
본의 아니게 방구석에 갇혀 지내며 브런치 작가에 도전하고 들떴던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게 됐다.
퇴직하고 난 뒤, 내가 하고 싶은 '뭔가'의 1순위가 글쓰기였기 때문에 막연히 브런치 작가가 되고 싶었다. <작가의 서랍>에 생각날 때마다 내 생각들을 적었다. 그리고 지난해 9월, 별 맥락 없는 세 편의 글을 보내 놓고 결과를 기다렸다. 표현은 정중("안타깝지만 이번에는 작가로 모시지 못하게 되었습니다.")했지만 핵심("보내주신 내용만으로는 좋은 활동을 보여주시리라 판단하기 어려워")은 아팠다. 실의에 빠졌다. 누구도 알 리 없지만, 한동안 글을 접었다. 글 좀 쓴다고 생각했던 건 ‘자뻑’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긴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용기를 냈다. 여기를 통과해야, 이 실마리를 풀어야 앞으로 나아갈 것 같았다. 글쓰기가 절실했다.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기 위한 전환점이 필요했다.
6월 27일, 드디어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는 이메일을 받았다. 감사했다. 다시 시작할 힘을 받은 것 같아 기뻤다. 그리고 7월 7일 첫 글을 올렸다. 다음날, 뭔가 알림이 온다 싶었는데 계속해서 메시지가 들어왔다.
“라이킷했습니다.”
“돌파했습니다.”
“구독합니다.”
어리둥절했다. 브런치가 한 번씩, 처음 시작한 작가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기회를 준다던데, 난 지금인가 싶었다. 하루에도 수십 차례, 글은 안 쓰고 계속 브런치 홈만 들락날락했다. 브런치 조회수에 일희일비하는 나날들이었다. 부끄럽지만 즐거웠다^0^
그리고 지금. 내 브런치는 조용하다. 처음엔 내 글에 문제가 있나, 진정성이 덜 들어갔나, 제목을 바꿨어야 했나 별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현재의 상황이야말로 지극히 정상임을 받아들이고 있는 중이다.
며칠 전 내가 끄적인 글을 읽다 “나에게 글쓰기란 중심 잡기다”란 문장을 발견했다. 지금 필요한 말인 것 같다.
가끔 글을 쓰다 보면 뜻하지 않은 바람에 휩쓸리기도 하고 외로움에 삐걱대기도 하겠지만평정심을 잃지 않길, 마침내 제 자리로 돌아오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