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데이지 May 31. 2023

집주인이 잠적했다(1)

얄궂은 아파트 이야기

뉴스에서나 듣던 HUG(주택도시보증공사)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다.

설마 했는데 집주인이 연락을 끊었다. 유일한 연락 수단이었던 카톡을 읽지 않는다. 전세계약을 연장하지 않겠다고 통보하고 부동산에 내놓겠다는 답을 들었는데, 몇 달이 지나도 집 보러 오는 사람이 없었다. 우려했던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2년 전 부모님 댁에서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 비교적 싼 아파트 전세 매물을 찾아 헤맨 끝에 지방 소도시로 이사했다. 거실 창으로 야트막한 산이 보이는 풍경이 좋았고, 무엇보다 조용한 동네가 맘에 들었다. 수도권에서 지방으로 내려간 뒤 두 번째로 정착한 곳이었다.   




결혼하고 처음 살림을 시작한 곳은 수도권 다세대주택 3층이었다. 모아놓은 돈도 없이 결혼했으니 그 공간도 감지덕지였지만 프라이버시가 보장되지 않는 곳이었다.

안방 창 너머는 옆집 옥상이었다. 휴일 아침 늦잠을 자고 싶어도 널찍한 그곳에서 무언가를 만들고 씻는 생활소음이 그치지 않았다. 작은방 창문은 옆집에 물건을 건네줘도 될 만큼 가까이 붙어 있는 구조라 문을 열 수조차 없었다. 목소리 큰 아주머니는 하루가 멀게 누군가와 다퉜다.   


큰 아이가 태어나자 무조건 아파트로 이사하겠다고 결심했다. 버스 종점, 언덕배기에 있는 아파트라도 좋았다. 병원에 가려면 한참을 걸어내려가 버스를 타고 다녀야 했지만, 꼬맹이들이 세발자전거로 누빌 수 있는 복도식 아파트와 단지 내 놀이터만으로도 행복했다.


작은 애가 태어난 뒤 신혼집 건너편, 현관문을 열면 보이던 ‘꿈의 아파트’로 이사했다. 처음 장만한 내 집이었다. 대규모 단지였고, 오래된 아파트라 나무들이 울창했고 산책로가 있는 뒷산도 훌륭했다. 그 집을 팔지 말았어야 했는데 나랑 같이 사는 이는 ‘부동산 비관론자’였다. 줄곧 서울에서 살았던 우리는 지방살이의 어려움을 모른 채 ‘탈 수도권’을 감행한다. 인생은 타이밍이라고 하던가. 우리에겐 ‘배드 타이밍’이었다. 맥을 못 추던 부동산이 가파른 상승세로 치고 올라가더니, 우리가 판 그 아파트가 재건축 흐름까지 타기 시작했다. 그 뒤론 정신 건강을 위해 부동산 시세 사이트에 들어가지 않았다.

 

누군가는 나이 들면 서울 아파트를 팔아 지방으로 지방으로 뒷걸음치면 노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던데, 우리는 너무 일찍 떠났다.

“아이들 교육을 생각해야지 왜 내려가느냐, 한 사람이라도 말렸어야지 어떻게 둘 다 똑같냐, 장사를 하더라도 수도권에서 해야 벌지 않겠냐, 연고도 없이 지방에 살기가 쉬운 줄 아느냐, 그 집을 세 놓고 갔어야지 왜 팔았느냐….”

수도권에 사는 가족과 지인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한마디씩 했다. 지금은 그래도 다양한 삶의 선택을 존중하는 분위기이지만 그땐 그랬다. 나름의 소신으로 선택한 길이었지만 현실은 매서웠다. 다시 수도권으로 올라갈 수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아무튼 그렇게 정착한 지방도시에서 아이들을 키웠다. 막연히 마당이 있는 2층집을 꿈꿨지만, 아파트의 편리함에 길들여진 우리는 게을렀고 실행할 자신도 없었다. 세월은 속절없이 흘렀고 애들은 어른이 됐다. 한 아파트에서 오래도록 살았다.  


집안꼴이 이랬던가. 퇴직한 뒤에야 수리도 하지 않고 십수 년을 산 살림의 흔적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코로나로 집안에만 갇혀 있는데 숨이 턱 막혔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알아본 리모델링 견적가는 터무니없었다. 혹시라도 집을 팔 생각이 있으면 수리하지 말라는, 인테리어 업자의 솔직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집을 팔 수도 없었다. 주변에 새 아파트가 쏟아지고 있는 터라 오래된 아파트의 시세는 곤두박치고 있었다. 결국 최소한으로 수리해서 세를 놓기로 했다. 우리는 더 작은 도시로 이사했다. 그리고 다시 전세살이를 시작했다. 새 아파트에 살고 싶은 마음에 30년 만에 기꺼이 세입자가 되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