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 했는데 집주인이 연락을 끊었다. 유일한 연락 수단이었던 카톡을 읽지 않는다. 전세계약을 연장하지 않겠다고 통보하고 부동산에 내놓겠다는 답을 들었는데, 몇 달이 지나도 집 보러 오는 사람이 없었다. 우려했던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2년 전 부모님 댁에서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 비교적 싼 새 아파트 전세 매물을 찾아 헤맨 끝에 지방 소도시로 이사했다. 거실 창으로 야트막한 산이 보이는 풍경이 좋았고, 무엇보다 조용한 동네가 맘에 들었다. 수도권에서 지방으로 내려간 뒤 두 번째로 정착한 곳이었다.
결혼하고 처음 살림을 시작한 곳은 수도권 다세대주택 3층이었다. 모아놓은 돈도 없이 결혼했으니 그 공간도 감지덕지였지만 프라이버시가 보장되지 않는 곳이었다.
안방 창 너머는 옆집 옥상이었다. 휴일 아침 늦잠을 자고 싶어도 널찍한 그곳에서 무언가를 만들고 씻는 생활소음이 그치지 않았다. 작은방 창문은 옆집에 물건을 건네줘도 될 만큼 가까이 붙어 있는 구조라 문을 열 수조차 없었다. 목소리 큰 아주머니는 하루가 멀게 누군가와 다퉜다.
큰 아이가 태어나자 무조건 아파트로 이사하겠다고 결심했다. 버스 종점, 언덕배기에 있는 아파트라도 좋았다. 병원에 가려면 한참을 걸어내려가 버스를 타고 다녀야 했지만, 꼬맹이들이 세발자전거로 누빌 수 있는 복도식 아파트와 단지 내 놀이터만으로도 행복했다.
작은 애가 태어난 뒤 신혼집 건너편, 현관문을 열면 보이던 ‘꿈의 아파트’로 이사했다. 처음 장만한 내 집이었다. 대규모 단지였고, 오래된 아파트라 나무들이 울창했고 산책로가 있는 뒷산도 훌륭했다. 그 집을 팔지 말았어야 했는데 나랑 같이 사는 이는 ‘부동산 비관론자’였다. 줄곧 서울에서 살았던 우리는 지방살이의 어려움을 모른 채 ‘탈 수도권’을 감행한다. 인생은 타이밍이라고 하던가. 우리에겐 ‘배드 타이밍’이었다. 맥을 못 추던 부동산이 가파른 상승세로 치고 올라가더니, 우리가 판 그 아파트가 재건축 흐름까지 타기 시작했다. 그 뒤론 정신 건강을 위해 부동산 시세 사이트에 들어가지 않았다.
누군가는 나이 들면 서울 아파트를 팔아 지방으로 지방으로 뒷걸음치면 노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던데, 우리는 너무 일찍 떠났다.
“아이들 교육을 생각해야지 왜 내려가느냐, 한 사람이라도 말렸어야지 어떻게 둘 다 똑같냐, 장사를 하더라도 수도권에서 해야 벌지 않겠냐, 연고도 없이 지방에서 살기가 쉬운 줄 아느냐, 그 집을 세 놓고 갔어야지 왜 팔았느냐….”
수도권에 사는 가족과 지인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한마디씩 했다. 지금은 그래도 다양한 삶의 선택을 존중하는 분위기이지만 그땐 그랬다. 나름의 소신으로 선택한 길이었지만 현실은 매서웠다. 다시 수도권으로 올라갈 수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아무튼 그렇게 정착한 지방도시에서 아이들을 키웠다. 막연히 마당이 있는 2층집을 꿈꿨지만, 아파트의 편리함에 길들여진 우리는 게을렀고 실행할 자신도 없었다. 세월은 속절없이 흘렀고 애들은 어른이 됐다. 한 아파트에서 오래도록 살았다.
집안꼴이 이랬던가. 퇴직한 뒤에야 수리도 하지 않고 십수 년을 산 살림의 흔적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코로나로 집안에만 갇혀 있는데 숨이 턱 막혔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알아본 리모델링 견적가는 터무니없었다. 혹시라도 집을 팔 생각이 있으면 수리하지 말라는, 인테리어 업자의 솔직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집을 팔 수도 없었다. 주변에 새 아파트가 쏟아지고 있는 터라 오래된 아파트의 시세는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결국 최소한으로 수리해서세를 놓기로 했다. 우리는 더 작은 도시로 이사했다. 그리고 다시 전세살이를 시작했다. 새 아파트에 살고 싶은 마음에 30년 만에 기꺼이 세입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