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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지 Jun 05. 2023

집주인이 잠적했다(2)

갭투자의 희생양이 되다

“아, 임대인이 외국인이라 복잡하네요.”

“그래서 시세보다 싸게 내놓았잖아요.”

계약하기로 한 날, 부동산 사무실에 도착해 중개사에게 한마디 툭 던졌는데 옆에 있던 남자가 말을 받는다. 대리인이라는 사람이었다.

임대인은 약속시각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다. 30대 초반이라고 들었는데 나이보다 앳되 보였다. 우리나라 말은 잘 못하고 조금 들을 줄만 안단다.


사실 처음부터 불안하긴 했다. 계약자는 중국인이고, 실무는 사실혼 관계인 남자가 처리한다고 했다. 전세 계약도 대리인이 한다는 걸 당사자와 직접 하겠다고 요구해 겨우 만난 거였다. 수도권 A대학원에 다닌다는 중국인 유학생이 왜 지방도시 아파트 샀까. 대리인은 자기 명의로 된 집이 많아서라고,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중개인과 얘기 나누는 걸 들어보니 아파트 갭투자로 꽤 재미를 본 듯했다. 부동산 광풍이 지방 소도시까지 밀어닥친 때였다. 새로 분양한 인근 아파트에도 프리미엄이 엄청나게 붙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거기에도 투자했다 한다. 활동무대가 거의 전국구인 듯했다.  


어쨌든 내 관심사는 전세보증보험을 들 수 있느냐였다. 임대인이 외국인이면 아예 가입 자체가 안 된다는 곳도 있었는데 다행히 주택보증공사(HUG)는 가능하다고 했다. 조금 찜찜하긴 했지만 설사 문제가 생겨도 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있으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계약 당일까지도 불안했다. 임대인 측은 우리 전세보증금을 받아 분양 잔금을 치러야 할 상황이었다. 아직 등기도 안 된 아파트라 위험 변수가 많았다. 계약 전에 여기저기 문의해 보니 서울 쪽 신축 빌라에 전세금만 가로챈 사례가 있다고 조심하라 한다. 생각 끝에 우리가 직접 시공사에 입금하겠다는 조건을 걸었다. 사전에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문의하니 가능하다 했다. 이를 두고 몇 차례 고성이 오갔다. 상대는 우릴 못 믿느냐, 이런 계약 처음 해본다고 기분 나빠 했고, 우린 이렇게 해도 문제없지 않냐, 안전하게 가자고 버텼다. 결국 우리 요구대로 계약을 마무리했다. 대리인은 우리를 깐깐한 꼰대 취급했다.




그래도 아파트는 맘에 들었다. 오랜만에 살아보는 새 아파트의 편리함이 만족스러웠다. 사계절 다른 풍경을 보여주는 앞산 풍경도 좋았다. 이사하기 번거로우니 계약 갱신을 하고 더 살까 싶은 생각도 했다.

 

그러나 금리가 오르면서 부동산 경기가 얼어붙었다. 입주를 앞둔 아파트에서 매물이 쏟아지자 기존 아파트 전세가도 추락하기 시작했다. 역으로, 임대인에게 전세보증금 일부를 돌려받고 계약갱신을 하는 세대도 생겼다.


임대인이 불안했던 우리는 이사하기로 결정했다. 계약만료 3개월 전에 계약갱신 거절 의사를 밝혔다. 임대인이 부동산에 내놓겠다고 했으니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도록 집 보러 오는 사람이 없었다. 한국에 없다더니, 전화를 걸어도 고객님의 사정으로 착신이 정지됐다는 안내만 흘러나왔다. 유일한 소통 수단이었던 카톡으로 다시 연락해 봤지만 확인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계약 당시 만났던 대리인에게 전화했더니, 자신도 연락이 끊긴 지 오래됐다는 반응이었다. 사실상 대리인 주도로 이루어진 거래였지만 정작 문제가 생겼을 때 그 사람이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임대인 얼굴도 보지 않고 계약할 뻔 했던 2년 전이 떠올랐다.


지금 상황에서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따지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무엇보다 HUG로부터 전세보증금을 받는 게 중요했다. 갭 투자의 희생양이 제일 먼저 할 일은 어느 시점에 어떤 서류를 준비할 것인지 공부하는 일이었다. 그때만 해도 길고 긴 기다림의 과정이 있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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