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들어 가고 해석하는 나의 세계에서, 사랑과 행복을 말하다
행복하신가요?라는 말이 간혹 폭력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었다. 내 행복은 당신네들이 느끼는 류의 행복과 다른 것 같아서. 아니, 도무지 눈 씻고 찾아봐도 그대들이 행복이라 부르는 것들은 내 손에 없는 것 같아서 그랬다. 이 이질적인 삶이 '행복'이라는 잣대로 고스란히 드러날까 봐. 그게 난 겁이 났던 게다.
나에게 행복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다고 느꼈던 이유가 있다. 바로 사랑의 부재이다. 나아가, 사랑을 꿈꾸는 삶이 일면 이기적인 행태로 비치는 것이 나를 주저하게 만든다. 나는 내가 사랑을 주고, 받는 그런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세계에 속해 있다. 내 삶이라는 밭은, 사랑이라는 뿌리를 내리기 어렵기만 하다.
행복을 말하려다 사랑을 꺼내고,
사랑을 말하려다 결국 내 존재 전체를 마주하게 되는 삶.
나는 왜 이토록 사랑과 행복에 목말라하는 걸까.
나는 내가 충분히 사랑받을 만한 존재라는 걸 누군가에게 설명해야만 한다. 그저 있는 그대로 사랑받기엔 내 삶에는 설명이 너무 많이 필요하다. 내 존재는 늘 ‘이해받아야 할 것’이고, 나는 그걸 애써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기색을 살피며 자랐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언젠가부터 사랑을 ‘받는 일’보다 ‘증명하는 일’로 먼저 배웠다. 그리고 행복은 어쩌면 그것을 증명해 낸 사람에게 주어지는 보상처럼 느껴졌다.
그러니 나에게 사랑과 행복은 감정이기보다 통과해야 할 높은 문턱이었다. 그 문턱 앞에서 나는 참 오래 서 있었다. 넘지 못하면서도 돌아가지 못하고. 그렇게 서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나 자신에게도 질문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지금 행복한가?” 그 질문마저 나에게 사치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달라졌다. 이제 나는 행복을 누군가의 기준으로 묻지 않기로 했다. 사랑도 다른 이가 인정한 관계의 형태로만 말하지 않기로 했다. 누군가의 눈빛에서, 문득 웃음이 새어 나오는 조용한 순간에서, 나를 이해하려 애쓰는 한마디 말에서. 나는 사랑을 받았고, 행복했다.
내가 써 내려갈 글들은 그런 순간들에 대한 기록이다. 말하지 않으면 사라질 감정들, 사라졌다고 믿었던 감각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삶 안에서 조용히 피어난 빛들에 대한 고백이다. 나는 여전히 사랑과 행복에 목이 마르다. 하지만 이제는 그 목마름을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했다. 그 갈증이 나를 살게 했고, 그 갈증 덕분에 나는 더 자주, 더 깊이, 삶을 들여다보게 되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