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행복이 낯선 이유

불행을 마주할 때 행복이 시작되지 않을까?

by 작은인간

“넌 생각보다 밝아”


그렇다. 난 밝은 사람이다. 그것도 생각보다 밝기까지 한다. 사람들이 말하는 ‘생각’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구태여 묻지 않아도 그것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아차릴 정도의 눈치는 있다. 그래서 난 어릴 적부터 밝은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언제나 한번 자리 잡은 버릇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 법. 씩씩하고 용감한 어른인 체하는 아이가 채 자라나지 못하고 내 존재 어딘가에 늘 숨어 있다.


그 아이는 ‘나의 삶은 불행하다’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자신만의 생각이 아니라는 확신까지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 그 불행감은 여지없이 질투, 우울, 무력감, 원망, 외로움과 같은 감정들을 불러일으키는데도 그것을 다룰 여유 따위는 없다. 이런 감정마저 자신이 떠안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정말로 무너질 게 뻔하다. 고작 그따위 감정들에 휘둘리는 유약한 인간이 되지 않는 것이 그 아이의 최후의 자존심이었다.

어쩌면 이것이 최선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수많은 감정들을 그저 ‘불행’이라는 단어로 치환시키지 않고서는 감당해 낼 힘이 없었을 거라는 말을 건네본다. 이것이 그나마 겉모습은 커버린 내가 몸속 어딘가 숨어 있는 어린 나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위로이다.


그 아이는 매일 밤, 잠에서 깨야 했다. 밤에 미처 청하지 못한 잠을 낮에 청하려 해도 밤에 느꼈던 비슷한 기분 때문에 푹 잘 수 없었다. 잠을 자다가도 베개 아래에서 ‘쿵쿵’ 소리가 들려오면 번쩍 눈이 떠졌다. 그 소리의 정체는 계단을 올라오는 발걸음이었다. 난 결국에는 아주 미세한 진동만으로도 나를 불안에 떨게 하는 소리의 정체를 분간해 낼 수 있었다. 다른 발걸음들과는 확실히 구별되었다. 내 아버지는 그만의 속도와 진동이 있는 발걸음이었다.


발걸음이 멈춘다. 곧 열쇠들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온다. 한층 내 불안은 고조된다. ‘철컥’ 문이 열리고 닫힌 안방의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아버지가 끌고 온 공포가 내 온몸을 뒤덮는다.

“아버지가 왔으면 일어나서 인사를 해야지!”

나는 애써 자는 척했지만 소용없었다. 비틀비틀, 알코올의 독한 냄새가 내 곁으로 다가온다. ‘퍽’ 그의 둔탁한 손이 내 뺨으로 아주 빠르게 부딪힌다. 이제 아버지의 손과 내 뺨이 만나 슬레이트가 쳐진 그 순간부터 새로운 시퀀스로 장면이 전개된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주인공 행세를 하는 아버지, 장애인으로 태어난 것으로 그 원인을 제공한 나, 우리를 떠나 배신한 악역 어머니. 아버지가 만든 이 영화의 레퍼토리는 밤마다 반복됐다.


이런 삶에서 행복을 말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렇다고 이 불행을 드러내면,
정말로 사람들이 나를 떠날까 두려워
그 아이는 애써 행복한 척 웃음을 지었다.
타인을 속이기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을 속이기 위해서였다.


이제야 나는 밝음 뒤에 감춰진 그림자를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애초부터 갖지 못한 삶에 대한 질투였고, 남들에게 평범한 것들이 나에게는 너무도 큰 도전이 되는 현실에서 느낀 우울이었다. 그 우울은 결코 바꿀 수 없는 장애라는 정체성 앞에서 무너진 무력감이었고, 사랑을 주지 않은 부모를 향한 원망이었다. 웃음으로 애써 감추려 했던 그 모습은 폭력에 짓눌려 겁에 질린 어린아이의 외로운 구조요청이었다.


나에게 행복이 낯선 이유는 아마도 한 번도 행복을 있는 그대로 마주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불행을 견디느라, 불행을 감추느라 정작 행복이 어떤 느낌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나에게 행복이란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한 연극의 일부였고, 진짜 내 것이 아니었다. 행복은 언제나 먼 이야기였고, 내게는 낯설고 어색한 단어로만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조금씩 다르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행복이 내게 낯설었다면, 그것은 내가 행복과 진정으로 마주할 기회를 아직 갖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금이라도 행복이라는 단어 앞에 솔직해지고 싶다. 낯설어서 머뭇거리더라도, 두려워서 떨리더라도, 이제는 행복을 나의 언어로 천천히 배워보고 싶다. 더는 행복을 연기하지 않고, 진짜 행복을 만날 용기를 가져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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