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동안이라는 말이 기분 나쁘다

쓸모가 사라진 자리에 채워지는 것

by 작은인간

나는 요즘 주위 사람들로 하여금 놀라움을 유발하는 중이다. 여러 모임에 기웃거리다 보니 그럴 일이 잦아졌다. 독서 모임, 글쓰기 모임, 이 외에도 다양한 활동을 하며 생긴 일이다. 내가 출몰하는 활동들은 나이가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어느 정도 친분이 쌓이면 조심스레 나이에 대한 정보를 꺼낸다. “아, 저 사실 90년생이에요.”라는 말을 하는 순간, 모두가 놀란다. 특히 자신보다 어린 줄 알았다는 동생들의 너스레를 듣고 있노라면, 왠지 모를 고양감에 취하기도 한다. 이런 반응에 내 기분이 들뜨는 걸 보니 이제 나도 나이를 먹었나 보다. 어느새 나는 마흔을 눈앞에 둔 세월을 맞이했다.


지금보다 어릴 적, 정확히는 20대 초반까지 실제 나이보다 어려 보인다는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어린 나이가 내게 유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 특유의 ‘나이’에서 오는 권력 관계와 나의 사회적 약자라는 정체성이 만나는 순간, 나는 더 작아졌다. 드러나는 몸의 약함은 곧 존재 가치의 유약함으로 대변되었다. 여기에 나이의 미성숙이 더해지면, 사람들은 여지없이 나를 절대적 보호가 필요한 존재로 읽었다. 나는 유약한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나는 매순간 보호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10대처럼 보이는 나이는 내가 가진 장애에 한계를 더했다. 그때 나에게 ‘동안’이라는 말은 수치였다.


지금에 와서는 어려 보인다는 말이 나에게 다른 기분을 선사한다. 그래도 속을 들여다보면 20대나 30대나 비슷한 마음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약해 보이는 것, 더 자세히 말하면 나의 쓸모가 없어지는 것에 대한 공포가 있다. 그 공포는 나이가 들수록 모양만 바뀐 채 계속 따라붙는다. 예전에는 ‘어리다’는 이유로, 이제는 “이제 나이도 있는데”라는 말로, 누군가는 나의 한계를 대신 정해 준다. 나이라는 숫자는 나를 가벼운 존재로 만들거나, 이미 기울어져 가는 사람처럼 보이게 만든다.


퇴행성 근육병을 가진 나에게 나이듦은 조금 더 잔인한 형태로 다가온다. 해마다 몸의 힘이 빠지는 것을 느낄 때마다, 머릿속에서는 하나의 도식이 자동으로 그려진다. 나이듦은 곧 노인, 노인은 곧 쓸모없음. 움직일 수 있는 범위는 좁아지고,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줄어들고, 누군가의 도움이 더 많이 필요해지는 미래. 그 미래의 나는 쉽게 “귀찮은 사람”, “이미 기울어진 인생”으로 요약될 것만 같다. 아직 도착하지도 않은 노년이지만, 나는 벌써 그 장면을 너무 선명하게 상상하고 있다. 생각보다 더 가까운 미래일 수도 있다는 마음을 매일 뿌리치는 중이다.


뉴스에서는 고령화, 돌봄 위기 같은 단어들이 쏟아진다. 노인을 ‘존재’로 보기보다, 복지의 대상, 조용히 비켜 서 있어야 할 존재로만 대하는 사회. 그런 사회 속에서 나이든 몸, 약한 몸은 곧 쓸모를 다한 몸이 된다. 나 역시 그 시선에서 자유롭지 않다.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기 싫다고 버티면서도, 내 미래를 떠올리면 어느새 그 틀 안에서 나를 보고 있다. 언젠가는 나도 아무 역할도 못 하고 남에게 민폐만 끼치다가 사라지는 사람으로 남을까 봐 두렵다.


그래서일까. 누군가가 내 얼굴을 보고 “동안이다”라고 말할 때, 그 말 안에 잠시나마 노인이 아닌 나, 아직은 ‘쓸모 있어 보이는’ 나로 읽히는 느낌이 든다. 부인하고 싶지만, 그 말에 괜히 안도하는 마음을 완전히 지우지 못한다. 동시에 그런 나를 바라보는 나 자신이 부끄럽기도 하다. 내가 싸워 왔던 시선과 똑같은 잣대를, 어느새 내 손으로 나에게 들이대고 있는 셈이니까.




그럼에도 나는 알고 있다. 쓸모라는 말이 결국 조건의 언어라는 것을. 돈을 벌 수 있는가, 생산적인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가 같은 기준으로 사람의 가치를 재단할 때, 가장 먼저 탈락하는 이들이 있다. 아픈 사람, 늙은 사람, 느린 사람들이다. 나이가 들수록 더 쓸모없어질 거라는 공포는, 어쩌면 이런 기준을 자신 안에 내면화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묻는다. 나이 듦보다 두려운 건, 사람을 조건으로만 보는 우리의 마음이 아닐까.


그래서 요즘 나는 조금 다른 상상을 해 보려 한다. 쓸모라는 말을 다시 정의하는 세상을 그려본다. 더 많이 벌고, 더 멀리 가고, 더 오래 버티지 못한다고 쓸모 없다 말하지 않는 세상 말이다. 우리의 쓸모는 그저 누군가와 하루를 나누고, 이야기를 건네고, 같이 웃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언젠가 진짜 노인이 된 나를 떠올릴 때, “쓸모없는 노인”이 아니라 “오래 사랑하고 오래 사랑받은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그게 허황된 소망일지라도, 나는 그 상상을 품고 지금의 나이듦을 통과해 보고자 한다. 2026년을 시작하는 나의 다짐 역시 사랑의 햇수를 채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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