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너무나 맹목적으로 믿는다.
이번 일기에는 내 삶에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종교에 대해서 쓸 거다. 종교와 그 교리에 대한 나의 생각과 감정에 대해서 쓸 것이기 때문에 지극히 개인적인 사변으로 이루어진 글일 테지만, 공개적인 공간에 올라간다는 상황을 고려해 보았을 때 내가 믿는 종교와 교리에 대해서 변호하지 않고서는 이 글을 시작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래서 각주를 단다.
1. 나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는다.
2. 죄로 인해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으로서 죄사함을 받는다는 말씀을 믿는다.
*또한 예수그리스도 외에는 하나님께 나아갈 길이 없음을 믿는다.(이 문제는 단순하면서도 아주 어려운 이슈다. 예수를 그리스도라 믿는다는 것은 단지 언어로 고백하면 끝인지, 아니면 나 자신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존재는 없으니 예수를 심적으로 의지한다는 것인지, 언어로는 고백하지 않아도 마음으로는 믿는 바가 있으니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을 섬기며 삶을 살아가는 것인지, 아주 복잡 미묘하면서도 단순한 의미가 ‘예수님을 믿는다.’라는 말에 담겨 있다. 이 내용은 이 글에서 다룰 만한 게 아니다. 또한 내 머리로는 빙산의 일각 정도만 다룰 수 있을 뿐이다.)
3. 예수님이 구원자가 되시며, 부활하셨으며, 나 또한 예수님을 믿어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됨을 믿는다.
이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복음의 골자이며, 나는 앞서 말한 세 가지를 진리로서 믿는다.
그 외에 율법이나 여러 교리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신학자를 찾아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제 내가 진리라고 믿는 바를 이야기했으니, 나의 뒤틀린 신앙과 종교의식이 어떻게 공황과 연결되는지 분석해보겠다.
나는 모태신앙인이다. 내 이름도 우리 부모님이 다니시던 교회 목사님께서 지어주신 것이다. 나는 태어나기 전부터 교회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고,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 청년기 때도 교회에 열심히 다녔다.
일요일만 교회에 나갔던 것이 아니다. 수요예배와 금요예배에 빠진 적이 없었으며, 토요일에 예배나 모임이 있다면 꼭 나갔다. 새벽예배도 나갈 때가 있어서 어떨 때는 일주일 내내 교회에 갔던 주도 있었다. 자신 있게 말하건대, 나는 웬만한 교인들보다 더 열성적인 교인이었다. 우리 아버지도,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교회와 목사님으로부터 받은 영향이 얼마나 컷을지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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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교인들 중에 목사님을 마치 ‘사람 이상의 존재’로 떠받드는 사람이 있다.(우리는 얼마나 쉽게 사람을 떠받드는가?) 나와 우리 가족이 그랬다. 목사님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으로 여겼고, 그래서 목사님의 말씀을 거의 ‘신탁’으로 받아들였다.
이제 와서 깨닫게 된 바는, 목사의 직책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도 모르는 것이 많고, 도리어 일반 성도들보다 사회생활 경험이 적고 상식에 있어 무지할 때가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달랐다. 내게 목사님이란 세상의 모든 비밀을 아는 사람, 절대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악마적으로 교만하거나, 천사적으로 순결하지 않다면, 사람들의 높임과 칭송에 마음이 기쁘지 않을 사람은 없다. 거기에 더해 마음이 높아지지 않을 사람 또한 적을 것이다. 목사님이라고 신부님이라고 스님이라고 예외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교회의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빙자하여 던져지는 무분별한 메시지는 때로는 진리를 담고 있지 않을 때가 많았다. 하지만 나는 그 말들을 하나님의 말씀이라며 받아먹었다.
교회와 세상을 분리하고(교회가 세상 한 가운데에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교인들과 바깥사람들을 분리하며(그리스도인은 사랑을 들고 세상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우월의식으로서 믿으면 천국가고, 안 믿는 세상 사람들은 지옥에 간다는 단순 이원론적 분리를 나 또한 우월의식을 느껴가며 믿었다.(말은 단순히 할 수 있지만, 이건 결코 절대로 단순히 설명되어지는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구원을 믿으면서도, 학교 친구들과 나를 구별해내며 내가 더 특별하다고 믿으면서도, 그 믿음의 뿌리가 애매한 곳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구원에 대한 나의 믿음은 그날그날 감정에 따라, 목사님의 말씀에 따라, 부모님의 반응에 따라 이리저리 요동쳤다.
하지만 나는 어렴풋한 천국보다 지옥의 지옥 같은 실체(뜨겁고, 칼로 찌르고, 목마르고, 짓눌리고)를 더 크게 믿었고,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공포심은 지옥에 대한 나의 공포를 부풀렸다.
나는 평생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해왔다. 그것도 두려움에 떨면서 고백해왔다. 솔직히 나는 지옥에 가고 싶지 않아 예수님을 믿었다. 나는 지옥의 이미지에 대해 누구보다 쉽게 그려낼 수 있었고, 그 고통과 공포를 단 몇 초의 생각만으로 자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 안에 깊게 새겨진 공포는 내 가치관을 형성한 신앙과 교리와 뒤섞였다.
집에서 나는 정서적으로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었다. 기쁨도 슬픔도 웃음도 장난도 눈물도 억압당한 존재였다.
나의 내면에서는 교회에서 들었던, 인간을 쉽게 지옥으로 내치는 것만 같은(절대 그렇지 않음에도) 무시무시한 교리가 나를 옥죄었다. 무슨 생각을 해도 다 죄로 느껴졌고, 어떤 감정이나 마음을 품어도 다 지옥으로 떨어질 만한 잘못처럼 여겨졌다.
나는 지옥에 가고 싶지 않으면서도 내게는 지옥에 갈 만한 죄로 가득한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기댈 곳이 없었다. 그래서 종교로도 결코 온전한 평안을 누리지 못했다. 예수님이 나를 대신하여 죽었다는 말씀을 믿어도 두려웠다.(우선 그 '믿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배우지 못했고, 결국 내게는 죄에 대한 정죄의식만 가득하여 정말 내가 할 수 있는 일, 일상과 삶의 순간순강에서 순종할 수 있는 작은 일들이 어떤 것이 있는지 배워보지 못했다. 내 마음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해서는 안 되는 일'들로만 가득차 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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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잘못을 했을 때 잘못을 인식하는 능력은 삶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다. 그러지 못하면 그 사람은 사회에서 쫓겨나거나, 아니면 짐승이 되어 주변 사람들을 도망치게 만들 것이다.
하지만 잘못된 행동을 하기도 전에 앞서 내면에서,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생각과 감정들이 모두 다 스스로를 지옥으로 밀어낼 만한 악한 것이라 치부하며, 무의식중에 생각도 감정들도 다 죄로 여기고, 내면에서 불쑥불쑥 일어나는 모든 활동들을 무시하는 것을 넘어 죄책과 공포와 신앙으로 억눌러버린다면,
공황이 와 버리는 것이다.
그는 어느 곳에서 누굴 만나더라도 긴장으로 경직돼 있고, 손가락에 힘을 주고, 이를 갈며, 잠자리에서 잠들지 못하고,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