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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틀루이스 Oct 02. 2022

감정은 정답이 아니었다.

실컷 부서지고 난 다음에야 깨닫게 된 삶을 살아가는 방식

일전에 <<감정은 글자가 아니다.>>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감정은 글이나 말로 표현되는 것보다, 슬프면 정말로 울고, 기쁘면 정말로 소리치는 것이 더 낫다]는 이야기를 썼다.

그리고 그 글의 마무리는 ‘여러분의 삶을 살라’는 말로 맺었다.


오늘은 위엣 글과는 결이 좀 다른 글을 쓰려 한다.

심지어는 위엣 글을 내리누르거나 무시하는 내용일 수도 있겠다. 

아직 쓰여지지 않은 글이라서 그 판단은 나중에 해도 될 것 같다.


일단 최근에 깨닫는 바를 글로 정리해보고 싶다.




‘감정은 정답이 아니다.’는 것이 최근의 깨달음이다.


일을 다시 시작한지 7개월이 조금 넘었다. 그 7개월 사이에 변화가 제법 컸다.


예전에 일하던 곳으로 다시 돌아왔는데, 끔찍이도 두려운 기억이 있던 곳이었다.

그래서 직장을 생각하면 쉽사리 공포에 사로잡혔었다. 그래서 절대로 직장에 돌아가지 않으리라고, 사람에 질리기도 했으니 사람들과 일절 연락을 끊고 살리라고 마음먹었었다.


정말 얼마나 두려웠는지 모른다. 평생 피하고 싶었다.

그 상황을, 그 상황과 연관된 사람들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었다.

연락처도 다 지웠고(카톡을 아예 삭제해버리기도 했었다.), 전화기도 끄고 살았다.     


불안, 두려움, 공포의 떨림.

때로는 나의 상황에 대한 자기 연민과 물밀 듯 밀려드는 슬픔 그리고 침울함.

죽음, 삶의 끊어짐에 대한 갈망


그것이 2년간 나를 뒤덮었던 감정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2년의 시간 내내 그랬던 것은 아니다. 아무도 없는 시골로 숨어들어간 나는 아무런 일이 없을 때는 평화로움을 느꼈다. 하지만 그 평화로움은 고통의 시간에 대한 생각이 들이닥치는 순간 ‘일순간에’ 깨져버리고 말았다.)


감정에 사무쳐 있을 때는 상기 감정들이 ‘나를 지배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나는 감정 ‘그 자체’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두려우면 웅크렸고, 두려운 일들을 생각하지 않기 위해 성인물을 보거나 술을 마셨다. 그렇게 두려운 일들을 보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그것은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감정이란 것은 잠잠해지더라도 문제를 마주할 시, 혹은 문제를 상상할 시에는 다시금 요동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고통스러움에도 나는 오랜 시간 감정을 중심으로 살았었다.

감정이 상하는 일, 불쾌한 일들을 몹시도 견디기 어려워하였으며, 기분이 좋고 들뜨는 일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겼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래왔다. 감정대로 살아가는 일상이 옳은 것인지 아닌지 판단해본 적은 없다. 그냥 그렇게 살아왔다.

그러다보니 좋은 감정을 만드는 일이 내게는 곧 ‘선한 일’ 혹은 ‘좋은 일’로 여겨졌다. 어느새 내 일과의 우선순위는 ‘내가 좋은 감정을 느끼는 것’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반대로 내 감정을 어렵게 하는 일, 내 기분을 잡치는 일은 ‘악한 일’로 여겨지던 것이었다.


<<불행이란 무엇일까2>>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을 써놓았다.

‘이상적인 삶’을 ‘평온과 안락함으로 채워진 삶’이라 상정하면 삶은 불행해진다고 말이다.


물론 평온함과 안락함, 쾌활한 기분과 들뜬 기분 그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삶의 전반을 차지해야 한다고, 그것들로 가득한 상태로 삶의 방향이 설정돼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것이 왜 잘못인지는 다음 글에서나 그 내용이 등장할 것이다.)


나는 은연중에 내 감정이 좋은 상태로 가득 차있는 삶을 갈망해왔던 것이다. 최근까지 그래왔었는데, 지금 글을 쓰면서 나의 배경을 떠올려보니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자라왔던 배경을 보면 그렇다.


가정 내부의 억압, 반목, 폭력, 그로부터 발생했던 자유를 향한 갈망이 있었다.(여기에서의 자유는 어느 것에도 결속되지 않는 ‘~로부터 도망치는 자유’를 의미한다. 자유의 여러 측면 중에서 단편적인 측면만 담긴 자유였다.)

또 그 와중에 바깥으로부터 내 안에 내재된 것들도 있었다. TV, 인터넷, 책, SNS,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 등등.. 심지의 대학의 강의에서까지 ‘느긋하고 태평한 삶’ ‘감상적이고 아름다운 가득한 삶’이 행복의 궁극점이란 메시지를 받아왔고, 그것 외에 것이 ‘삶의 방향’이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는 거의 받아봤던 적이 없었다.


충분히, 정말 충분히 위와 같이 생각할 만도 했다. 내 과거의 배경은 이제껏 불편한 감정을 일으키는 상황을 회피하는 내 모습을 정당화하는 충분한 핑곗거리가 된다.


하지만 ‘그보다 더 나은 삶의 방향’을 알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는 핑곗거리가 될 수 없다.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 글에 쓰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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