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두에 먼저 언급하고 싶은 것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제대로 아는 사람에게는 “네 인생을 살아라”고 말하는 것에 전혀 문제나 거리낌이 없다는 것이다. 십수년간 농사를 지으며 풍작과 흉작을 맛보고, 농사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풍부한 농부에겐 “당신의 방법대로 농사하십시오”하는 것보다 적절한 말은 없는 것처럼.
하지만 인생이 무엇인지, 무엇보다 ‘잘 사는 인생’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특히 어리고 젊은 사람들에게) “네 인생을 살으라”고 말하는 것은 함정 가득한 미로 속에 지도나 지팡이도 없이 어린 아이를 집어넣는 꼴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 글은 필자의 개인적인(주관적인) 견해로써 특정 대상을 연구하여 얻은 결론이 아니다.
필자가 “네 인생을 살아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말처럼 필자 본인만의 인생을 살기 위하여 평생을 발버둥쳐 보고 정말 본인이 생각하는 ‘본인의 인생’대로 삶을 살아본 다음에 깨달은 결론을 적은 것이다.
그렇기에 필자의 결론이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는 사람에게는 약간의 팁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과학이나 학문 또한 약간의 단서들이 모여서 만들어지는 것 아니던가.
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 연구가가 있고, 필자가 쓴 이 글의 내용을 주제로 하여 연구를 하고 싶다면 기꺼이 이 글을 인용해도 좋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이 무엇인지 당췌 알지 못한다.
요즘 심심치 않게 ‘위로’ ‘휴식’ ‘여가’ ‘자기연민’에 관한 영상이나 에세이나 책을 접할 수 있다. SNS는 말할 것도 없다. 자기가 어디서 잘 놀았는지, 잘 쉬었는지, 잘 먹었는지 보여주는 곳이 SNS 아니던가.
위에서 언급한 영상, 에세이, 책, 게시물 등에서는 직/간접적으로 전하는 메시지가 있다. ‘이 모습이 좋은 삶이다’ ‘이렇게 사는 것이 행복한 것이다’ ‘스트레스는 피하는 것이 좋다’ ‘너의 기분을 좋게 하는 것은 선한 것이고, 너의 기분을 잡치게 하고 마음을 무겁게 하고 너를 피곤하게 만드는 일은 악한 일이다’하는 것들이 그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이것이 정말 좋은(옳은) 일일까?’를 생각하기에 앞서 그것이 내 기분을 좋게 하는 일이라면, 특히 다른 사람들이 좋은 것이라고 보여주는 것이라면 자연스레 그것을 좋은 것으로 여기게 된다.
달달하고 짭짜름한 과자가 출시 됐을 때 그것을 먹는 것이 즐거운 일이라고 사람들이 보여주기 시작하면 우리도 그것을 먹는 일이 좋은 일로 여겨지고, 달짭(달달하고 짭짜름한)과자를 먹지 못하게 하는 방해물(부모님, 편의점의 경쟁자 등)을 맞닥뜨리면 그들을 악하게 여기는 것이다. 악하게는 아니더라도 내 기분을 잡치는 나의 반대자로 여기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달짭과자를 정말 먹어야 할까?’ ‘다른 일들을 제끼고 달짭과자를 구하려고 하는 일에 문제는 없을까?’에 대한 고민을 하지 못한 채, ‘어디를 가야 달짭과자를 구할 수 있을까’ ‘달짭과자를 구하지 못하게 하는 저 사람의 포위망을 벗어나 어디서 달짭과자를 구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되고 그 고민을 행동에 옮기는 것이다.
과한 일반화 같아 보일수도 있지만(필자의 설명이 짧은 탓이다.), 우리가 자기 인생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위와 마찬가지다.
그것이 옳은 것인지 아닌지 따져보기도 전에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답을 어느새 내면에 지니고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네 인생을 살라’는 말은 제대로 정립되지도 못한 우리의 인생관에 달려 있는 트리거를 걸어 당기는 말이 되게 된다.
- 그렇게 우리는 쪼그라들고 작아지게 된다.
필자는 본인과 본인 주변에서 “내 인생을 살 거야”하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서 그 말이 타인과 상생하고 그들과 잘 어울려 살겠다는 의미를 지닌 경우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필자가 경험이 짧아서 그런 걸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자기 인생을 살겠다는 말이 함의하고 있는 바는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기’이다. 그 불편하게 하는 것이 상황이든 사람이든 자기 자신이 지니고 있는 어떤 특정한 것이든 모든 것을 불문한다.
그 중에는 물론 필자나 타자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실제로 아주 바람직한 경우들도 더러 있다. ‘늘 타인에게 비겁하고 비굴하게 구는 자신의 모습’을 탈피하겠다는 의미로 자기 인생을 살겠다 말하는 사람도 있고, ‘바쁘고 분주하게만 살아가는 일상 가운데서 무의미함(혹은 공허함)을 느끼고는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자기 인생을 살겠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위의 두 가지 예시의 상황 말고도 우리가 공감하고 이해할 만한 자기 인생을 찾아가는 사람과 상황들이 있다. 필자는 이것을 나쁘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독려하고 싶다.
여기서 문제는, 예시와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 결국 택한다는 것이 본인을 더 작은 틀에 가둬놓는 사고틀과 그에 따른 행위라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 인생을 살겠다고 가족과 분리되고, 자기 인생을 살겠다고 교제를 갖던 연인과 친구와 갈라서며, 몸 담고 있던 회사, 그룹, 모임, 지역과 사회를 등진다. 혹은 등지지는 않지만 자신의 목소리를 우선 내세우고 자기 자신의 유익을 우선시 한다.
자신의 목소리를 우선 내세우고 자기 자신의 유익을 우선시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냐고 묻는다면, ‘우선’이란 단어에 초점을 두었으면 좋겠다. 물론 사람은 자기 목소리를 지닐 수 있다.(지녀야만 한다. 어떻게든 갈고 닦은 자신의 목소리를 지니는 것이 몹시 필요하다.) 하지만 모든 상황 가운데서 자신의 목소리만 ‘우선’ 내민다면, 그 사람은 아주 지독하게도 외로운 처지에 처하게 된다.
필자는 자기 인생을 찾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의 모임에 수개월간 함께 했던 적이 있었다. 그들은 각자가 본래 있던 자리(가족, 회사, 지역 등)에서 벗어난 사람들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그 집단은 문제없이 늘 하하호호 웃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보였다. 그 집단에서는 모두가 서로를 존중하는 문화를 암묵적으로 지켜왔던 것이다.
그들은 다투지 않았다. 서로 험한 말도 하지 않았다. 질투도, 반목도 없이 늘 웃는 일들만 평화로운 일들만 오가는 것처럼 보였다. ‘보였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들 가운데는 막중한 책임도, 가슴 깊이 스며드는 잔잔한 애정도 없었다. 그들은 서로 말을 조심하고 행동을 조심하는 문화를 지니고 있었지만, 그 채로 관계가 더 깊어지지는 않았던 거다.
무엇보다 그들은 외로워하고 있었다. 누군가를 갈망하고 있었다. 집단 가운데 있던 몇몇의 사람과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눠보며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찾고 있는 그 누군가는 각자가 만들어낸 ‘자기에게 딱 알맞은’ 사람이었다. 필자도 본인에게 딱 맞는(내게 다 맞춰주는, 내가 별로 힘들이지 않아도 내게 톱니바퀴처럼 완벽하게 맞물리는) 그런 사람을 찾아왔었다. 오랜 시간 찾아오며 다양한 관계의 사람들을 만나고서 내린 결론은 ‘이 세상에 그런 사람 없다’는 것이다.
(한 문장 더 덧붙이고 싶다. ‘이 생각을 했던 나도 당신도 그런 완벽한 사람 아니다.’)
자기 인생을 산다는 명목으로 기존에 있던 것들로부터 벗어나고, 자기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 사람들하고만 어울리게 되면,
우리는 사람들과 진정으로 어울리고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잊어버릴뿐더러
평생 그렇게 살지 못하는(타인과 진심으로 어울리지 못하는)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혼자 있는 것이 편해서’가 아니라 ‘혼자 지내는 방법 밖에 몰라서’ 혼자 살아가며
‘이것이 행복한 삶이지, xx와 함께 사느니(그런 지옥에서 사느니) 차라리 이게 낫지’하며 합리화 하면서 사는 것이다.
-지금 독자가 인지하고 있는 ‘나의 인생’에 대한 개념을 버려라.
그것이 현재 당신을 더 불행하게 만들고 있고, 종국에는 당신을 당신이 만든 감옥 안에 우겨넣어 당신을 걷잡을 수 없이 작아지게 만들 테니.
대신에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삶을 마주하고 수용하라. 그러면 고통이 밀물처럼 몰려들 것이다.
때로는 부아가 치밀어 오르거나, 고통스러운 현실에 침울함을 넘어 통곡하고 오열하는 순간까지도 당도할 것이다.
그럼에도 참고, 견디고, 절제하고, 충실히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해나간다면,
그러니까, 상황이 당신을 흔들어 어떻게 해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신이 어떤 상황이든 견실한 존재로 서 있을 수 있게 된다면,
당신은 더 이상 당신의 인생을 찾기 위해 노력하려던 마음을 어느새 잊은 채로 제 할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인내할 줄 알고, 안절부절 하지 않으며, 묵묵히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은
타인의 약함을 이해할 줄 알고, 그들의 잘못은 용기를 내어 질책할 줄 알게 된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런 삶을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와 의미가 궁금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굳이 힘들여가며 편한 삶을 내치고 이런 고된 삶을 일부로 살아야 하는지를.
첫 번째 이유는 이 글에서 밝혔다.
편한 삶을 살려 하는 태도가 인생을 더 나락으로 이끈다고
그리고 첫 번째 이유보다 더 우선되는
‘왜 우리는 확장되고 타인과 어울릴 줄 아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 궁금하다면
신께 기도하여 물어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