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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틀루이스 Mar 22. 2022

두려운 것은 사람도 상황도 아니었다.

당신이었다.

나는 겁이 많은 사람이다.


어느 정도로 겁이 많으냐면 공황 때문에 버스를 못 탔었고, 벤쿠버행 비행기를 탔다가 비행기 문이 닫히기 직전에 비행기를 딜레이 시키며 내릴 정도로 겁이 많다.


직장에 들어갔을 때 전화를 자주 해야 하는 업무라는 것을 깨닫고는 ‘때려 치워야 하나’하는 생각부터 들었었다.

전화를 걸기 전에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되뇌며 바짝 긴장해 있었고, 몇 분 동안이나 수화기를 붙든 채 번호를 누르지 못하고 벙쪄 있던 때도 많았다.


결국 그 직장에서는 상사가 ‘윽박지르는 사람’이란 것을 깨닫자마자 곧 퇴사해버렸다.

무서웠기 때문이다.


겁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기본값’처럼 내게 장착돼 있었다. (게임으로 말하자면 겁은 내게 패시브 스킬이었다.)


그래서 내가 가장 싫어하는 수업은 발표가 있는 수업이었다.

대학에서는 토론이 있는 수업을 극도로 싫어했으며,

대학을 나와서는 면접이 잡히는 날이면 그 날부터 면접이 있는 날까지 잠을 설쳤다.

아무리 입사를 원하던 회사일지라도 면접을 보자는 연락이 오면 덜컥 가기가 싫어졌던 거다.          


오늘은 이와 관련한 생각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이런저런 사람이나 상황들 중에서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과 상황은 하나로 일축된다.

'억제'


이 억제의 뜻을 풀어내자면 이렇다

생각이나 감정을 마음대로 표현해서는 안 됨, 몸을 자유자제로 움직일 수 없음, 감시를 받고 있음, 명령에 따라야 함, 마음대로 나갈 수 없음.. 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어려서부터 기질적, 환경적 요인으로 이것들이 내 안에 자리 잡았다.)


위에서 말한 억제의 정도는 사실 가정과 사회 곳곳에서 약간씩은 요구되고 있다.


가정에서는 덜 하겠지만 어느 정도는 생각이나 감정의 표현을 제약 받기도 하고, 행동의 제약이 있을 수도 있고, 부모의 감시나 명령이 있기도 하고, 때론 집 밖으로 나가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학교는 가정보다는 규율이 조금 더 엄격할 수 있고(학교보다 가정이 더 엄격한 곳도 있다.)

직장에 들어가면 상사 혹은 직장의 문화에 따라서 억제의 정도가 다를 수 있다.     


정리하자면, 억제란 사람과 사람이 사는 어느 곳이든 있을 수 있으며, 그 정도만 다를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억제적인 상황을, 상사를(언행에 억제적 요소가 가득한 사람) 두려워했다. 지금도 두려워하고 있다.


그리고 이 두려움은 상황과 사람의 특성 중에서 ‘억제적’인 측면에 주의를 기울이게 만든다. 

‘아프리카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하면 코끼리에 대해 더더욱 생각하게 되듯이,


특정 상황이 나를 억압하고 내가 가진 자유를 빼앗는 것처럼 보이면, 나를 숨 막히게 만드는 요소에만 집중하게 되어 그것만 점점 더 커져 보이는 것이다. 그 상황이 지니고 있는 다른 요소들은 놓쳐버리고 말이다.

 

정말 딜레마다. 이 고통을 아는 사람은 공감할 것이다.

어느 사람이 무서워 보이면 그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괴물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어떤 상황이 무서워 보이면 그 상황은 상황이 아니라 짐승들이 득시글거리는 소굴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래서 바로 얼마 전까지 세상은 내게 지옥처럼 다가왔었다.

(사실 지금도 내가 만든 지옥에서 다 빠져나오지는 못한 것 같다. 그래도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는 믿고 있다.)


왜 얼마 전까지라는 과거형으로 표현했냐면, 최근 한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그 사람도 세상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당차게 이 사회 가운데,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이제는 꽤 긴 경력을 지니기까지 한 사람이다.


그는 내가 두려워하는 타입의 사람이다. 잘못을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잘못을 짚을 때는 그 어투가 정말 무섭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사람과 상황을 바라보고 진단을 내리고 곧 행동에 옮기는 용기 있는 사람이다. 화를 잘 내기도 한다.


나는 그를 만났을 때 무서웠다. 또 역시나 내 예상이 맞았다. 그는 내게 돌직구를 날렸고, 내 뼈를 때리고, 내가 자유분방하게 굴지 못하도록 했다. 그에 대해 알면 알수록 나는 그가 두려웠기에 그로부터 도망치려했었다.(내 눈에는 그가 지닌 좋은 점들도 많이 보였다. 하지만 내가 이제껏 지녀왔던 시선은 자꾸만 그 좋은 점을 가리고 두려운 부분들만 부각시켰다.)


결국 나는 그에게서도 도망쳤다. 하지만 그가 나를 붙잡았다. 붙잡으면서 ‘억제적’인 요소에 몰입하고 있는 나를 동굴 밖으로 끌어내 그 상황들을 어떻게 다루면 되는지 하나하나 알려줬다. 지금도 알려주고 있다.


그를 다시 바라보면서 깨달았다.


그는 상냥하기도 하고, 무뚝뚝하기도 하고, 때론 침울하고, 때론 쾌활하고, 때론 매섭기도 한 사람임을. 하지만 나는 그의 매서운 면모만을 ‘그의 모든 모습’으로 쉽게 상정해버리는 습관을 장착하고 있었음을.


그에 대한 내 시선이 바뀌는 것을 확인하면서 이제껏 내가 지녀왔던 시야에도 변화가 이는 것을 느꼈다.

 

그가 내게 말했다.

당신 꽤 괜찮은 사람이다.
당신은 능력이 있다.
당신은 당신에게 맡겨진 일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신은 당신에게 맡겨진 일보다 몇 배나 되는 부담을 지려하고 있다.





그의 말을 듣고 나는 스스로 생각했다.

나는 내게 맡겨진 일 이외에도 내가 어찌해볼 수 없는 것들을 짊어지려 하고 있다.


나는 상대의 매서운 면모에 집중한 나머지 내가 내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사실과, 내 의지대로 행동하여서 갈등을 해결하고 그에 따르는 책임을 감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나는 상황의 억압적인 요소에 집중한 나머지 사실 내가 그 안에서 움직일 수 있고, 실수할 수도 있으며, 내 뜻과 의지를 관철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나는 지금 이 순간 내게 맡겨진 일들을 감당할 수 있다.

나는 지금 이 순간 내가 마주하고 있는 사람에게 내 목소리를 낼 수 있다.

내도 된다.

행동해도 된다.

그에 따른 결과는 그때 가서 또 마주하고 해결하면 된다.


나는 지금 이 순간 존재하고 있는, 혹은 나중에 있게 될 상황에서 내 의지로 행동할 수 있다.

그곳에는 규율이 있을 수 있다. 그곳에는 엄격한 상사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삶이란 것은 ‘법칙’으로 이뤄진 것이다.

살아있기에 자연의 법칙 아래 있는 것이고,

사회에 소속 되어 있기에 상호간의 규칙과 약속과 관행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다.

또 그 안에서 너무 억압 받는다면,

목소리를 낼 수 있다. 행동할 수 있다.

그것이 살아있다는 증거다.


목소리 낸다고 죽지 않는다. 튀는 행동한다고 죽지 않는다.

그것은 약간의 사고가 될 수는 있겠지만,

인생 망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러한 흑백논리를 타파해야 한다.

누구를 천사로 덜컥 믿어버리는 것이나,

누구를 악마로 덜컥 치부해버리는 습관을 걷어내야 한다.


특정한 상황을 완벽한 자유가 있는 상황으로 여기거나,

특정한 상황을 감옥처럼 여기는 습관 또한 걷어내야 한다.


그 사람의 이런 면모, 저런 면모,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하며

그 상황의 이런 장점, 이런 단점, 다양한 점들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사회에서 빠져나오면, 사람들로부터 피하면

사고도 나지 않고, 불편한 일도 없다.


그것은 자유가 아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그 삶은

죽음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상대방에게, 그리고 여러 상황에서

굴종이 아니라 목소리를 내고 의지대로 행동할 수 있음을 알고 그렇게 행해나간다면,

억압을 뚫고 새로운 시선이 열리게 될 것이다.


괴물 같은 인간에게도 부드러운 솜털이 달려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며

짐승들의 소굴처럼 보이는 곳에서도 보호를 받는 울타리와 안전한 잠자리가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짐승들 사이사이에 굳건하게 서 있는 선한 맹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서 “나는 절대 이렇게 해선 안 된다.”의 생각을 깨고

“해도 된다.” “괜찮다.” “죽지 않는다.”의 마음과 태도를 견지하고 있으면


당신도 언젠가 선한 맹수가 되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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