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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틀루이스 Apr 14. 2023

두 가지 능동적 죽음

*능동적 - 다른 것에 이끌리지 아니하고 스스로 일으키거나 움직이는 것

(표준국어대사전)


필자는 죽음, 특히 ‘자살’에 관심이 많다.

자살 유가족이라서 그렇기도 하고, 자살 유가족이 되기 이전에 자살을 많이 생각해서 그렇기도 하다.

 - 대학시절 사회학과에서 공부할 때, 그 많은 서적들 중에서 굳이 뒤르켐의 자살론을 읽고 리포트를 작성하기도 했다.


글의 제목처럼 ‘능동적 죽음’이라 하면 아마 자살이 가장 먼저 떠오르지 않을까.

제목의 두 가지 중 첫째는 자살을 의미한다.

(하지만 필자는 엄밀히 말해 자살을 능동적 죽음이라 생각하지 않고 ‘자아에 의한 타살’이라 여긴다. 자살을 ‘순전하고 전 인격적인 자기 존재로서의 선택’이라 생각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글은 추후 더 정리가 되면 쓰려 한다.)


그러면 나머지 하나는 무엇일까?

2차 세계대전 때 미 군함에 돌격하던 카미카제? 아니다.

뒤르켐의 자살론에 의하면 카미카제는 사회적 의무감이 강할 때의 ‘자살’로(실제 카미카제 중에서는 강제로 떠밀려 출격한 소년병도 있다고 하지만..) ‘이타적 자살’이라 불린다. 그러니까 카미카제는 ‘자살’의 일부로 볼 수 있다.

- 다만 이 글에서 다루고 싶은 능동적 죽음으로서의 자살은 <자살론>에서 다루는 자살 중 ‘이기적 자살’의 의미만을 뜻한다. 향후 이 글에서 말하는 ‘자살’은 <자살론>의 ‘이기적 자살’의 의미라는 것을 염두에 두기를 바란다.



 

오늘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자살 외의 또 다른 능동적 죽음에 대해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의 능동적 죽음에 대해서는 최근에 ‘아주 조금’ 깨달은 바다.

 

이 죽음의 두드러지는 특징은, 당사자가 자신이 죽음을 택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데에 있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이 능동적 죽음을 택하여 사는 사람이(자신이 그것을 택한 것을 모른 채) 때와 시기를 막론하고, 지역과 문명을 막론하고 늘 존재해왔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필자도 이제 와서 눈에 조금 보이는 정도지만, 이 능동적 죽음을 택한 사람들이 우리 사회 곳곳에 있으며, 과거에는 더 많았음을 본다.

 

다만 개인적으로 안타깝게 여기고 있는 것이 있다.

능동적 죽음을 택하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능동적 죽음이란?


필자가 쓴 에세이 <증오는 감옥이다>의 서론에서 ‘사람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인 인간은 없다’고 말했었다.


우리는 물리적이든, 정서적이든, 물리와 정서를 넘어서는 것이든,

사람과 연을 맺고 살아간다.

그리고 과거에는 사람과 연을 맺는 관계가 지금보다 더 깊었다. 아주 더 깊었다.

(최근에는 관계의 깊이가 얕아진 대신에 범위가 넓어졌다.)     


가족, 이웃 할 것 없이 관계가 깊고 두터웠으며 서로 얼굴과 이름을 넘어 각자에게 어떤 이야기들이 있는 것까지도 알았고, 더 나아가 그것으로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했다. 그것 때문에 서로가 서로의 일상에 관여되는 관여도도 지금보다 훨씬 높았다.


서로가 이렇게 가까운 것은, 현시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분명 ‘득’만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구에게는 그것이 지나친 개입과 억압으로 보일 것이며, 그것은 그에게 부자유스러운 행위로 느껴질 것이고, 종국에는 분쟁과 반목과 단절의 원인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깊게 관여되는 집단에서 분쟁과 반목과 단절이 상대적으로 적은 집단도 존재하는 것을 보았는데, 거기에는

능동적 죽음을 택한 사람이 한 두 사람 존재하고 있었고

그들은 그 능동적 죽음의 행위를 집단의 일원에게도 전염(좋은 의미에서)시키고 있던 것이었다.




능동적 죽음의 구체화1


서로가 서로에게 깊게 관여되는데 분쟁과 반목과 단절이 발생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느 한 쪽의 양보, 포용, 인내와 온유함이 필요하다.


양보, 포용, 인내, 온유함 등은 특히 가족에서, 그 중 부모가 자식에게, 그 이전에는 부부가 서로에게 잘 베푸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기질적으로 양보, 포용, 인내, 온유함이 다른 사람들보다 잘 나타나는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어찌됐든 누가 되었든지 간에 양보와 포용과 인내와 온유함은


‘내 자아의 목소리를 물러서게 하는 의지와 선택’을 필요로 한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은, ‘자식에게 모든 것을 다 허락해주는 것’과 ‘양보, 포용, 인내, 온유함’은 다르다는 것이다. 자식을 자기 고집대로 내버려두는 것은 오히려 인내가 아니라 자신이 편하기 위해 부모가 자녀를 방임하는 것이며, 그것은 자녀를 응석받이로 만들거나 타인과 사회적 교류를 하지 못하도록 ‘작은 독재자’를 만드는 행위이다.


부부관계든, 부모와 자식 관계든, 친구들 사이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됐든지 우리는 각자의 뜻과 바람이 있으며

그 사이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우리는 서로에게 ‘더 깊게’ 관여되게 된다. 그리고 그 더 깊어지는 관계에서 ‘내 자아의 목소리를 물러서게 하는 의지와 선택’이 없다면,

양 측에서 모두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국 끝이 만나지 않는 갈림길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능동적 죽음의 구체화2


사람의 삶의 방향은 두 가지다.     


1. 다른 사람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갈 줄 아는 사람으로 성숙되어져 가는 것 

2. 나 자신이 중요하기에 타인이 내 욕구를 충족하는 도구로만 여겨지는 삶으로 가는 것


능동적 죽음의 삶을 사는 사람은 1번의 삶을 산다.

그러나 그들 중 대부분은 2번에서 시작했다.


우리들 모두가 2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혹은 2번에 거하다가 가끔씩 1번에 발을 담그는 정도다.)

지식이든, 권력이든, 돈이든, 인기든지 우리들이 추구하는 것을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2번의 삶에서 벗어나기가 훨씬 어렵다.

자신의 자아의 목소리를 물러서게 하지 않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따라주기 때문이다.

   

지식, 권력, 돈, 인기가 부족한 우리도 2번의 삶을 살기 쉽다.

나 자산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외치는 자아의 목소리를 듣고 살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증오하고, 용서하지 않으며, 그들이 먼저 다가와 사과하기를 원한다.

우리에게 빚을 진 사람들, 그것이 돈이든, 사람들 앞에서의 머쓱함(자존심 상함)이든, 빼앗긴 성취가 됐든, 그것을 잊지 못한다.


우리를 불편하게 하고, 우리 계획을 망치고, 우리가 가진 것(혹은 가지게 될 것)을 잃어버리게 만든 사람들에게 지독한 앙심을 품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2번의 삶을 산다.


여기서 C.S루이스 소설의 한 장면을 인용하고 싶다.

  

“그 망원경으로 보면 수백만 마일 떨어진 곳에 옛날에 왔던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집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 보입니다. 우리가 사는 곳에서도 수백만 마일 떨어져 있지만, 자기들끼리도 수백만 마일씩 떨어져 있어요. 지금도 계속 서로에게서 더 멀리 옮겨 가고 있는 중이구요. 아쉽군요. 당신이 흥미로운 역사적 인물들을 만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나 절대 못 만납니다. 너무 멀리 있거든요.”
...
“글쎄요, 이론적으로는 그렇지요. 하지만 몇 광년은 걸릴걸요. 그리고 지금은 별로 그러고 싶은 마음들도 없을 겁니다.
...
그나마 옛 사람들 중에서 제일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이 나폴레옹입니다.
...
나폴레옹은 프랑스 제정시대 풍으로 어마어마한 저택을 짓고 살고 있다더군요. 줄줄이 늘어선 수십 개의 창문에서 불빛이 뿜어 나온답니다. 제가 사는 곳에서는 작은 점 하나로만 보이는데 말이지요.
...
그냥 왔다 갔다 하더랍니다. 내내 방 안을 왔다 갔다 하더래요. 오른쪽, 왼쪽, 오른쪽, 왼쪽, 한순간도 쉬지 않고요. 그 두 사람이 일 년쯤 지켜봤는데 정말 한 번도 쉬지 않더랍니다. 그리고 내내 혼자 중얼거리고 있더라는군요. ‘다 술트 잘못이었어. 네이 잘못이었어. 조제핀 잘못이었어. 러시아인들이 잘못했어. 영국인들이 잘못했어’하면서요.”

<<The Great Divorce>>

상기 글은 사실이 아니라 소설이기에 은유적으로 바라보아야 하지만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우리 또한 삶의 방향이 2번의 모습으로 상정되어 있다면 소설에 나온 나폴레옹의 모습에서 크게 달라질 수 없을 것이다.


상기 내용에서의 상황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능동적 죽음의 특성 중

‘자비로움, 양선(선을 베풂), 충성됨, 화평(문제적 상황에서 평화를 이룩함)’이다.


이제는 왜 이 글에서 다룬 덕목들을 ‘능동적 죽음’이라 지칭했는지 감이 올 것이다.



  

내 자아의 죽음

내가 좋아하는 사람, 호감이 있는 사람에게조차 양보, 포용, 인내, 온유함, 자비, 양선, 충성, 화평을 이루기란 어렵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 위엣 것들을 행하기란

‘나 자신이 죽는 것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어렵다.

   

내가 미워하고 증오하는 사람을 용서하고 화목하게 지내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은’ 혹은 ‘그 사람을 죽여 버리고 그 사람 없는 세상을 살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바로 이 마음은 2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마음이며,

우리가 이 마음을 계속해서 지니는 한 우리는 세상에 있는 언어로는 형용할 수 없는 지독한 외로움과 괴로움의 수렁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일찍이 능동적 죽음의 삶을 사는 것이 2번의 삶을 사는 것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낫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은 일제히 말하고 있다.


‘자아가 죽는 것이 낫다’고.     


혹자는 그럼에도 자기를 존중해야 한다고, 자신의 뜻을 따르겠다고, 그게 더 좋다고 주장할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한 번 생각해주기를 바란다.


단 5분 만이라도(5분은 낼 수 있지 않겠는가?)


그 ‘자기’란, ‘자신의 뜻’이란 정말 본인 스스로의 뜻인지,
아니면 어디서부터, 누구로부터 얻었는지 모를 바람인지, 누가 좋다고 해서 따르는 것은 아닌지, 그냥 느낌이 좋은 것일 뿐인데 그것이 옳고 선하다고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꼭 그렇게 해야만 절대적으로 그렇게 해야지만 삶이 행복한 것인지
그리고,
삶은 꼭 행복해야만 하는 것인지(행복은 또 무엇인지)
그리고,
행복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행복하지 않다면, 그러면 삶은 정말 의미 없는 것인지
그리고,
행복에 대한 개념이 없던 시절을 살던 사람들이 한 평생을 살면서 감사하고, 즐거워하고, 슬퍼하고, 힘들어하고, 고됨을 소중히 여기고, 때론 분을 내고, 때론 용서받음을 멋쩍어하면서 왜 삶을 계속 살았는지를




누군가 타인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삶을 살 때 그 사람 주변에는 풍성한 관계가 맺어진다.

그것을 악용하는 사람이 더러 존재하지만, 그 악용에 맞대응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삶을 살 때(능동적 죽음의 삶을 살 때), 악용하는 자가 자기 안에 영원히 갇혀버리지 않고 자아라는 동굴 속에서 밖으로 나올 수 있는 빛을 볼 수 있게 해준다.(그가 그 빛을 보고 바깥으로 나오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다.)


하루하루 능동적으로 자아의 죽음을 마주하는 삶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숫자로 셀 수도 없고 그러기에 더더욱 통계화 할 수도 없는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살아간다.


그 삶은, 그 삶을 살지 않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손해 보는 삶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기를 내어주는 삶을 사는 사람은, 이미 ‘내어주는 것’ ‘내어줄 것이 있는 것’ 그자체가 그 사람에게 복이고 성취이고 재산이다.

  

필자는 'Only for myself'의 현대의 시류가 'Unconditionally for each other'의 흐름으로 바뀌기를 소망한다.


하지만 우리들의 생각으로는 그리고 우리들의 의지로는 불가능하다. 

옆에 있는 사람 미워하는 마음 하나 못 바꾸는 게 우리들이고, 사회를 생각하겠답시고 공포정치나 해대는 것이 우리들이다.


우리는 더 높고 깊은 곳에서부터 능동적 죽음의 의지를 발견해야 한다.

    




PS.

이 글을 보고 있는 독자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다.

물리적인 시간이 독자에게 얼마나 지나왔으며, 또 얼마나 남아있는지는 모른다.

현시적인 시점으로 그대는 ‘삶’ 가운데 있는 것 같지만,

시간의 관점으로 보면 ‘태어남’과 ‘죽음’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것이다.

독자는 태어남을 지나왔듯이 죽음 또한 지나게 될 것이다.


혹자는 죽으면 끝날 인생 즐기자고 말하지만,

그 말은 사실 어떤 말을 붙여도 다 되는 말이다.


죽으면 끝날 인생 열심히 살자

죽으면 끝날 인생 타인을 위해 살자

죽으면 끝날 인생 내 맘대로 살자

죽으면 끝날 인생 타인의 인생 망치면서 살자

 

내 맘대로, 편하게, 즐겁게 사는 것이 불편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런데,


삶에서 뭔가를 이룩하기에 불편하지 않았던 적이 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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