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생을 사는 방향
정상에 오르는 것만이 목적이 되어버리면 길가에서 마주하는 이벤트는 '문제'로 다가온다. 그것이 무릎의 통증이든, 정면에서 굴러 내려오는 돌덩이든, 혹은 동행자의 신발끈이 풀리는 일이든 모두 장애로 인식되기 마련이다. 내부적 요인이든 외부적 요인이든 관계적 요인이든 간에 그 상황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기란 참으로 어렵게 된다.
그렇게 그는 무릎통증이 오면 우울감을 느끼고, 돌덩이를 보면 공포에 사로잡히며, 멈춰 서서 신발끈을 묶는 동행자를 보면 짜증이 나고, 심지어는 동행자와 다툴 수도, 그를 뒤에 남겨두고 홀로 산을 오르게 될 수도 있다.
이와 반대로 정상에 오르려는 목적을 상실당한 사람은, 길가에서 마주치는 이벤트들에 '과장된'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그러한 행위는 자칫 이벤트들의 실제 의미를 극대화하여 그것을 궁극적인 가치를 지닌 것으로 상정하는 우를 범하게 될 수도 있다.
그는 무릎의 통증을 분석하여 치료하고 관리하며 '정상에 오르기 위한 무릎 관리'가 아닌 '무릎을 건강하게 오래 유지하는 관리를 위한 관리'에만 집중할 수 있으며, 돌덩이의 방향을 인식하여 돌을 피하고 또한 돌을 맞지 않을 만한 자리를 마련하는 것에만 치중할 수 있고, 동행자의 신발끈이 왜 풀렸는지 분석하다가 그냥 신을 벗는 것이 가장 편하다는 결론에 이르러 그 자리에 눌러앉아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정상에만 올라가려고 하는 것과, 길가에 있는 것들에만 관심을 갖는 것 두 모습 다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렇다고 정상에 오르려는 의지를 버려서도 안 되며, 길가에 있는 것들에 완전히 무관심해서도 안 된다.
위와 같은 딜레마를 타개하는 방법은, 존재의 가치를 '산을 오르는 것'에 두는 것이다. 내가 산을 오르고 있음을 인지하며 그때그때 마주하는 이벤트들이 나중에 산을 다 오른 '총체적인 이야기'의 구성을 이룰 수 있도록.
2. 아래부터는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다.
정상은 어떤 모습일지 알 수 없다.
정상에만 오르려고 하는 사람이 상상하는 정상의 이미지는 김이 빠지고 미진하기 짝이 없다.
그는 그가 상상하는 정상에 도달하면 '또 다른 정상'을 갈망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우리들이 만들어낸 성공의 수준이다.
길가에 있는 것을 분석하는 사람도 그것을 아무리 분석해봤자 '자신이 왜 이 길에 서 있는지' 알아낼 수 없다.
결국에는 모두가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고 고백하게 될 것이다.
정상의 모습은 산을 오르는 일을 충실히 이행한 사람만이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정상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결코 정상의 모습을 볼 수 없다.
그 정상의 모습이 정확히 어떠한지 알려준 사람은 인류 역사 가운데 '아무도' 없었다.
오직 비유로만, 은유로만 알려져 있을 따름이다.
충실히 걷는 사람도 어렴풋하게만 볼 수 있을 따름이다.
충실히 걸어간 자들에 대해 생각하건데, 그들은 정상에 도달한 영광으로 기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산을 오르는 자의 마음을 품고 그 뜻을 겸손히 행함을 더 큰 영광으로 여기지 않을까>> 싶다.
여전히 낮은 마음으로 자신과 이웃과 주변 상황을 살피며 자신이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 일을 해나가는 그 모습을.
헌신과 사랑이 넘치며, 그것이 자기 자랑이 아니라 이젠 '너무도 자연스럽게' 나오는 모습이기에 기꺼이 순종하는 그런 모습을. 그래서 정상에서도 여전히 산을 충실히 오르는 모습을 견지하고 있지 않을까.
3. 결론으로. (결론은 내게 주어진 신앙으로 말할 수밖에 없다.)
현재 길을 오르고 있는 이들이 그 길을 충실히 걸어야 하는 이유는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의미는 이미 주어져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발견해낼 따름이다.
그 의미는, 위대한 외부와 거룩한 심연에서부터 왔다.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온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의미로서 주어진 삶을 충실히 살아냈다.
예수의 이름이 뜻하고 있는 '그 의미'로 말이다.
"Lord, our Lord, how majestic is your name in all the earth!"
Psalm 8:9
예수를 구주로 믿는다는 말의 함의는 그 깊이와 너비를 잴 수 없을 정도로 세밀하고 또 광대한 것이다.
우리는 그 고백의 의미를 표면적으로, 혹은 파편적으로만 알고 있을 따름이다.
물론 인자하신 아버지께서는 미약한 수준의 고백일지라도 그것이 진실하다면 기쁘게 받아주시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