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틀루이스 Aug 04. 2024

이해는 용서가 아니다.

요즘 활동하는 밴드에서 자주 받는 글귀가 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다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또는

“상대방을 이해하면 그를 향한 분노가 줄어들 수 있다”는 말이다.


상단의 글귀를 보며 용서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상단의 글귀 내용이 용서와 직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연관이 아주 없지는 않다. 무엇보다 최근 필자가 용서에 대해 생각할 일들이 좀 있었다.)     



 

이해한다는 것은 특정 사건이나 사람의 특정 행위에 대한 ‘인과관계(원인과 결과의 관계) or 작용기전 or 매커니즘’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깨닫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그 사람이 그렇게 행동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있다.

우리가 ‘그 사람이 그렇게 행동한 이유’를 이해했다고 해서 ‘그 사람’ 자체를 이해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보이는 모습의 동기와 동기를 만들어낸 원인과, 동기가 불러일으킨 과정과 결과를 분석하여 깨달아 아는 것이다.


그렇게 세종대왕을, 이순신 장군을 이해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앞서 말했지만 그렇다고 우리는 세종대와과 이순신장군을 이해한 것이 아니다.

이해했다고 여기는 것이지.

(우리는 특정 사고, 사건들을 이해하듯이 사람을 이해하려 하고 있다. 그것은 틀린 것이다. 특정 행위의 일부 동기와 결과를 유추해본 정도지.)


인간 안에는 수도 없이 많은 변수가 있다.

필자는 생각하건데,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달해도 인류는 그 변수를 다 헤아릴 수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보이지 않는 변수가 훨씬 많기 때문이다.


한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변수들을 다 헤아리고(몇 개나 될는지 모르겠다. 최소 한 100경 이상은 되지 않을까?), 분석이 끝나고, 결과 값을 얻었을 때에야, 조금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해하는 것이 용서가 아닌 이유는 아래와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우리는 세종대왕과 이순신장군을 이해하듯이, 

히틀러와 스탈린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할까.


다시 말하면, 세종대왕, 히틀러, 이순신장군, 스탈린이 행한 행위들의 동기, 과정, 결과를 우리는 분석하여 인과관계를 찾고 깨달을 수 있다.


그들을 이해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행한 ‘행위들’을 이해하는 것뿐이다.


용서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 쓰려 한다.




글을 매듭지으면서.


근래에 서론에 말한 글귀들과 같은 것들을 자주 받는 이유가 뭘까 하고 생각해봤다.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다툼이 일지 않는다. 상대를 이해하면 그를 향한 분노가 줄어든다.’와 같은 글귀 말이다.


필자의 주관적인 추측은 이렇다.


‘나 자신이 가장 중요하니까.’

‘내가 상처 받는 게 싫으니까’

‘내가 받고 있는 고통과 부담에서 얼른 빠져나오고 싶으니까’


그러니까 저런 글귀가 나오고, 사람들에게 많은 공감을 받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여기서 하나 나누고 싶은 생각이 있다.


물론 나 자신은 중요하다. 상처는 아프다. 고통과 부담은 힘들다.     

하지만 나 자신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정말 가장 중요할까?’

‘상처는 아프니까 무조건, 될 수 있는 한 무조건 피해야 할까?’

‘고통과 부담은 얼른 내려놓는 것이 내게 가장 유익할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