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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틀루이스 Oct 18. 2024

용서란

이상형을 만났을 때

나에게 상냥하고, 나를 존중하고, 내게 유익한 것을 주는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을 좋아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 사람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많은 이야기를 만들고, 더 깊이 친해졌을 때

만약 그가 나를 속이고 배신한다면,

그 사람을 용서하는 일은 쉽지 않다.


누군가를, 뭔가를 좋아하는 일은 대체로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용서하는 일은 시간이 많이 걸릴뿐더러 쉽지도 않다. 


오늘은 그 차이로 용서에 대해 말해보려 한다.




우리는 평소 싫어하던 것을 단번에 좋아하지 않는다.


지금 필자는 글쓰기를 좋아하지만,

학창시절부터 20대 중반까지 글쓰기를 혐오했다.

왜냐하면 ‘내 평소 습관, 평소의 기호’하고 맞지 않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복잡한 내면에, 충동적이고, 무절제하고, 감정적이었던 필자는

스포츠가 좋았고, 게임이 좋았고, 음악이 좋았다.


새로운 게임, 새로운 악기에 금방 매료됐다.

학교 수업 중에나, 길을 걸을 때도 그것들을 생각하며 걸었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일은 ‘내 평소 습관, 평소의 기호’가 맞물린 결과다.

(무조건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글을 이어가기 위해 위와 같이 주장하겠다.)

        

그렇다면 용서는 어떤가? 

용서는 우선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

길에서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다가와 “나를 용서해 주세요”하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이 지금 착각을 하고 있거나, 제정신이 아니라고 판단할 것이다.


왜냐하면 용서는 내가 뭔가 불이익을 당했을 때, 모두가 동의하는 도덕과 상식의 선을 넘어선 대우를 받았을 때, 그때 행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말인 즉, 용서는 홀로 있을 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한 사람의 상대방이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그 상대방이 세상을 떠났더라도 마찬가지다. - 이에 대해서는 결론에서 다루겠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용서가 말처럼 쉽게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왤까?


위에서 누군가(무언가)를 좋아하는 것은 평소의 습관과 기호에 맞는 것이기에 쉽게 가능하다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좋아하는 누군가(무언가)는 지금의 나 자신을 기쁘게 만들고, 나 자신이 수용하기에 적합하다는(때론 그 이상이기에) 뜻이다.


용서는 심하게 말하면,

내 안의 크로아상 빵처럼 겹겹이 층을 이룬 기호, 규칙, 가치 등으로 이루어진 구성물에 칼을 쑥 집어넣거나, 스크레치를 그어 버린 상대방에게

‘보복을 하는 것이 아닌, 보복과 반대 되는 일을 하는 행위’이다.

 

그 일이 어떻게 쉽게 되겠는가.


그래서 말로만 용서했다고 하고 마음의 상처와 짓이기는 내적 통증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이 얼마나 많던가.

용서했다고 하면서 몇날 며칠, 몇 년을 주위 사람들에게 ‘그 인간’을 욕하며 다니는 사람도 주변에 있지 않던가.

필자는 이들을 욕하지 않는다.

필자가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지금도 완전히 아닌 것은 아니다.)




용서가 되어야 하지! 

계속 힘든데, 계속 생각나는데, 얼마나 당했는데, 얼마나 피해 입었는데,
그 뒤로도 얼마나 손해를 입고 있는데.. 


위와 같은 생각에서 20년은 못 벗어났을 거다.


그러다 3년 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필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그 사이 읽었던 책들, 강의 등을 통해서 필자에게 주어진 것이다.)     


자기연민의 생각에 매여서 오히려 나만 계속 힘들어지는구나. 
이 끝나지 않는(용서하고 싶지도 않기 때문에) 고통을 어떻게 끊지?


필자는 자살은 더 이상 답이 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얻어서 자살을 할 수는 없었다. 

살아야 했다. 살아가면서도 계속 이런 식으로는 살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용서가 답이라는 것을 다시 깨달았다.


그 사람에게 호의를 베풀기 위해서 용서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고자 용서를 하자고 결정한 것이다.


안 그러면 내 안의 소용돌이에 나 자신이 빨려 들어가 메말라 버릴 거 같으니까.


그래서 용서를 하기로 했다.


우선 스스로에게 선포했다. ‘그를 용서한다.’고.

그러자 내 안의 온 존재가 반항을 해댔다. 

그의 죄목들을 내게 일일이 읊어대며 참소했다.


필자는 속으로 참소의 소리에 대해 답변을 해봤다.

‘그래 그 죄목들 20년 넘게 묵상해왔어. 그래서 뭐 어떡하라고. 나도 똑같이 하라고? 나 같은 피해자를 또 만들라고? 그건 싫다.’


침대에 누워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용서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런데 용서하지 않으면 필자가 죽을 거 같으니까.


그렇게 울면서 기도했다.

‘하나님 용서하게 해주세요. 용서하게 해주세요.’


나 자신이 이 피해의식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나더라도 난 자유롭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3년이란 시간이 지나면서

또 그사이에 여러 일들을 마주하면서 깨닫게 됐다.


용서라는 것을 어떻게 구성해나가야 하는지를.     

용서는 단회성이 아니었다.

용서는 도착해서 끝나는 목적지가 아니었다.


용서는     

방향설정이었다.


미운데, 싫은데, 증오하는데, 억울한데, 아픈데, 슬픈데

미워하고, 싫어하고, 증오하고, 억울하고, 아프고, 슬프지만  

상대에게서 돌아서지 않고, 하루 1mm라도 다가서 보려고 하는 거.

그게 어렵다면 0.01mm라도. 그것도 어렵다면 돌아서지만 말아 보는 거.

   

그리고 돌아서라는 ‘내 습성’으로는 여력이 안 되니, 선한 분에게 납작 엎드리는 거.


살려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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