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 안보고 편하게 삽시다.
- 남 눈치 안보고 쿨하게 말하는 제 친구가 부러워요.
담당선생님은 내 하소연에 위와 같이 답했다. 처음에는 그 친구의 외골수적인 모습을 떠올리며 선생님 말에 수긍했지만, 집에 돌아와서는 다시 생각이 바뀌었다. 그리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공감능력 떨어져도 괜찮으니까, 눈치 안보고 편하게 살고 싶다.
지금 내 친구들이 들으면 기겁을 하겠지만, 사실 예전의 나는 센스쟁이였다. 이 말은 결코 ‘자칭’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불러준 것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센스쟁이라 불러준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학생시절 나는 거의 교회에서 살았었다. 교회는 예배 활동만 있는 곳이 아니다. 모임, 나눔과 같은 사교활동도 있다. 참여하는 활동이 많을수록 교회에 모이는 횟수가 잦아진다. 나는 친구들과 일주일에 5~6일을 교회에서 만나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때 당시 대부분의 활동은 다 내가 기획한 대로 이뤄졌다.
어떤 나눔을 할지, 어떤 놀이를 할지, 어떤 찬양(노래)을 부를지 등을 다 내가 정했다. 그렇게 우리는 시간을 보냈고, 나는 우리 그룹의 일원 개개인들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생일을 맞는 친구가 있으면 서프라이즈 파티를 기획해서 열어줬고, 아픈 친구가 있으면 몰래 찾아가 그 친구에게 필요한 것들을 전해주곤 했다. 다퉈서 사이가 나빠진 친구들이 있으면 각자의 하소연을 들어주며 화해시켜주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모든 친구들의 이슈를 일일이 다 꿰고 있었고, 친구들뿐만 아니라 교회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들의 소식까지도 기억해뒀다가 일요일에 만날 때면 세세한 안부를 묻기도 했다. 이래서 센스쟁이로 불렸던 거다.
당신은 어떤 센스쟁이인가?
위와 같이 나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갖은 에너지를 다 쏟아 부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내 마음은 무한리필 고기집이 아니었다. 나는 사람들을 만나면 과장되게 말하고 행동했기 때문에 금방 피로감을 느끼고 지쳤지만 내색하지 못했고, 그렇다고 누군가로부터 채움을 받았던 것도 아니다. (우리 집은 역기능적 가족이었고, 나 또한 영웅 행세를 하며 힘든 척 하지 않았기 때문에) 또 그렇게 지친와중에 센스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힘듦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얼마나 귀를 기울이고 얼마나 장단을 맞춰줬는지 모르겠다.
공허한 내면을 지녔으면서도, 사람들의 속사정에 관심을 가지는 행위는 내 습관이 됐다. 그렇게 내면에 아픔이 있는 사람들은 금방 나와 친해졌고, 그들은 내게 자신의 속 이야기를 거리낌 없이 했다. 결국 나는 지친 나 자신을 더 지치게 만들고, 타인은 내게 의존적이게 만드는 병적인 문화를 생산해내고 있었던 거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잘못된 것인지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10대와 20대를 보냈다.
나는 타인과의 ‘언어적’, ‘정서적’ 교제에 대한 올바른 기준이 없었다. 내가 가진 기준은 철저하게 ‘타인 위주’였다. 나는 상대의 모습에 따라 좌지우지 되는 일관성 없는 존재였던 거다. 상대가 기분이 좋아 보이면 나 또한 괜찮았고, 상대가 기분이 슬퍼 보이면 나 또한 침울했으며, 상대가 분노에 차 있으면 나는 불안해져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래서 나는 내 상황이나 감정과는 상관없이 타인의 비위를 맞추며 상대가 기분이 좋아지기를 바라는 광대 같은 인간이 되어 버린 거다.
결국 금이 가던 댐은 터져버렸다. 한 번에 쏟아져 내리는 어마어마한 양의 물이 댐의 하류 지역을 집어삼키듯, 내 안에서 꿈틀대며 조금씩 성장하던 진실과 가식 사이의 괴리감은 괴물이 되어 내 마음을 집어 삼켰다. 그렇게 나는 모든 연락을 끊었다. 아니, 연락으로부터 숨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다. 그냥 사람을 만나는 것 그 자체, 연락을 하는 것 자체가 싫었다. 전화가 오면 음소거 버튼을 누른 뒤 폰을 뒤집어 놨고, 문자가 오면 알림에 뜨는 이름만 확인하고는 내용은 몇 시간이 지나서야 읽었다. 물론 답장은 하지 않았다. 또 카톡 알림이 뜨는 것에 얼마나 거부감을 느꼈는지 모른다.
이런 잠수의 시기는 내 인생에 여러 번 있었다. 특정 집단이나 단체에서 활동을 열심히 하다가 갑자기 사라져버리는 ‘큰 잠수’는 3~4번 있었던 것 같다. 한 두 사람과 잘 연락하다가 끊어버리는 ‘작은 잠수’는 수도 없이 많았다. 이미 마음의 댐이 무너진 나는 조금만 불편해도 상대의 연락을 받지 않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나는 집단에게, 개인에게, 스스로에게 피해를 줘 왔던 거다. 그런데 문제가 더 있다. 앞서 말한 문제들이 비단 나와 연이 있는 대상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는 거다.
내가 잠수를 타기 전, 내게 속 깊은 얘기를 나누는 사람들에게 나는 ‘천사’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의 진짜 모습을 아는, 내가 내 모든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나와 가까운 사람들에게 나는 ‘악마’였다. 나는 내 엄마, 아빠, 누나, 연인에게 내 피로감을 다 털어놓았다. 때로는 침울함으로, 때로는 짜증으로, 때로는 분노로.
얼마 전 유튜브를 보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경험을 했다. 유튜버 ‘오마르의 삶’의 영상 <모두에게 잘해주는 사람이 최악인 진짜 이유>의 내용 때문이었다. 영상에 따르면 나는 ‘천사’이자 ‘최악’이었다. 처음에는 내가 최악임을 애써 부인하려 했지만, 내가 내 가족과 연인에게 했던 말과 행동을 생각할수록 오마르의 말이 백번 옳았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좋은 내용의 영상이니 공유하려 한다.
<모두에게 잘해주는 살마이 최악인 진짜 이유> - 유튜버 '오마르의 삶'
https://www.youtube.com/watch?v=YFOqDNwSsxs
나는 계속해서 이런 식으로 살고 싶지 않았다. 친절과 잠수가 쳇바퀴 돌 듯 지속되는 삶, 그리고 그 쳇바퀴를 내 가까운 사람들이 고통 가운에 돌리는 삶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변해야만 했고, 지금은 변화를 꾀하고 있다. 어떡하면 바뀔 수 있는지 나 자신만의 작은 방법을 알아내었고, 이제 그것을 나누고자 한다. 나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이 있다면 이 글을 통해 도움을 얻기를 바란다.
‘나쁜 사람이어도 괜찮다’는 말이 있다. 자신을 챙기고, 할 말을 하는 것은 상대에게 상처 또한 줄 수 있음을 뜻하는 말이다. 이것에 더해 ‘될 대로 되라지’는 말도 요즘 많이 들린다. 너무 신경 쓸 필요 없다는 의미의 말이다. 앞선 말들은 일상과 대인관계에서 부담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좋은 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타인의 눈치를 격하게 보는 센스쟁이들에게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이다.
왜냐하면 센스쟁이들은 ‘될 대로 되라지’를 아무리 외쳐도 신경 쓰는 일을 멈추지 못하기 때문이다. 말은 하더라도 마음의 습관이 따라주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나쁜 사람이 되고, 쿨한 사람이 되려는 의도로 행동과 말을 편하게 하고 싶어도 그렇게 하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센스쟁이들은 누군가 자신을 불편하게 만들면 웃으면서 괜찮다고 대답하고, 거기에 더해 부탁까지 하면 거절하지 못하고 도와준다. 듣고 싶지 않은 하소연을 들어주는 것도.
그래서 필자가 실제로 도움을 받았던 마음가짐을 소개해주려 한다. 바로 “내버려 두는 것이 상대에게 더 유익하다”는 생각이다. 만약 상대를 도와줘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상대를 챙겨주는 행위가 상대를 더 의존적으로 만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당신은 상대의 엄마가 아니고, 상대도 당신의 아이가 아니다. 따라서 일일이 신경써주거나 챙겨줄 책임이 없는 거다. 만약 계속해서 연락하고 챙겨주면, 상대도 그에 부응하여 당신에게 더욱 의존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타파해야만 한다.
상대가 계속 신경 쓰이고, 도와줘야 할 것만 같다면, 진정으로 상대를 위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자. 그를 내버려두어 자신의 문제는 알아서 해결하게 하자. 그게 장기적으로 훨씬 도움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도와줘야 할 것 같은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아니면 정말 도와줘야할 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내버려둠’이 잘 안되기 때문에 도와주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는 내면에 자신만의 기준을 정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설명하겠다.
현장일은 잘 하지만, 사무일은 젬병인 영업팀 직원이 있다. 그 사람은 서류작업을 할 때면 내게 도움을 요청한다. 처음에는 엑셀 작업을 한두 번 수정해주는 정도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내게 서류 전체를 맡기는 것이 아닌가. 그 직원과 나는 부서도 다른데 말이다. 불편한 내 감정은 표정으로 드러났지만, 눈치 빠른 그 직원은 도와달라고, 나중에 밥 사겠다며 애걸복걸한다. 결국 간절한 요청에 못 이겨 도와줘버렸다. 이제 그 사람은 매번 내가 만들어준 서류들을 가지고 들어가 결재를 받는다.
예시로 든 상황의 문제는 무엇인가? 도움을 준 것 그 자체를 문제라 할 수 없다. 일을 하다보면 도움을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는 거니까. 문제는 도움의 기준이 없었다는 것이다. 어느 선까지 도움을 줘야 하는지는 규칙이 있다면 규칙을 준수하는 것이 좋겠지만, 그런 규칙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일도 그렇고, 타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도 그렇고 어디까지 들어줘야 할지 자신만의 기준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타인이 그 선을 넘어오면 “여기까지 할 수 있어요”라고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당신은 그 이상을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 그 똑같은 도움을 과연 한 달 이상 줄 수 있는지 생각하여 보라. 일주일이어도 충분하다. 일주일 동안 똑같이 할 수 없다면, “여기까지”라고 말하라. 당신은 최선을 다 해 도운 것이고, 거기에 상대방의 수긍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다.
타인의 이슈에 이목이 끌린 탓에 자신의 모습과 해야 할 일들에 소홀하지는 않았는지 살펴보자. 우선 내가 지금 당장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돌이켜보고, 그것을 제대로 하고 있지 않다면 바로 행동에 옮기자. 그것이 공부면 공부에 집중하고, 운동이면 운동에 집중할 것이며, 일이면 일에 집중하자. 자신과 했던 약속이 있다면 그것을 지키려 노력하며 스스로에게 떳떳한 사람이 되자.
또한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내가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지 점검해보자. 그것이 훗날 내가 가져가게 될 관계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낯설고 잘 모르는 상대와 서로 친절하다고 해서 그것이 그 관계가 지닌 색깔의 전부라 착각하지 말자. 우리는 대부분 가깝지 않은 사람에게 자신의 차갑고 어두운 내면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이 맡은 바 해야 할 일을 우선 해내고, 가까운 사람들을 우선 신경 쓰며, 그럼에도 타인을 챙겨줄 수 있다면 그 때 챙기자. 그렇지 않으면 자신도 망치고,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도 망치며, 타인에게도 제대로 된 도움 하나 주지 못 하게 될 수 있다. 우리 모두 건강한 센스쟁이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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