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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틀루이스 Feb 01. 2020

의존적인 사람이 이별에 임하는 자세

이별 마무리 잘 합시다.

생각은 우리의 경험을 분석하고 해석하지만,
감정은 생각과는 반대로 현실을 직접적으로 표현한다.

<<The Family>> p.102 - John Bradshaw


"진짜 죽을 것 같아요 선생님"

지난 화요일 담당 선생님을 찾아가 말씀드렸습니다. 어저께인 월요일에 이별했다고 말이지요. 네, 결국 그 사람과 이별하게 됐습니다. <<사랑 같은 중독>> 마지막 장에 나온, 몇 달간 연락 안 된 그 여자 친구 말이지요. 저의 상태를 보신 선생님은 제가 먹던 약의 용량을 늘려주셨습니다. (근래 마음이 무너지는 일이 많아 약을 복용하고 있었습니다.) 그 약은 독한 약이라서 갑작스레 올리면 부작용이 있을 수 있지만, 제 상태가 그렇게 안 좋아 보였나 봅니다.

     

네, 저는 3일 내내 눈물을 쏟아냈습니다. 벌써 토요일인데, 아직도 얼굴이 부어 있네요. 헤어지던 날이었던 월요일 저녁, 그 사람을 버스에 태워 보내고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다가 돌아가는 길에 오열했습니다.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하철역 계단을 내려가는 것도 버거웠습니다. 가슴이 막혀 숨이 쉬어지질 않았기 때문입니다. 최근 이래저래 여러 힘든 일들이 있었지만, 이것은 그것들을 다 합친 것보다 더 아픈 고통이었습니다.  


이번 이별은 아플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 이별이 아픈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이번 이별은 다른 것들보다 몇 배나 더 아픈 이별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 사람에게 모든 것을 의존했기 때문입니다. 정서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이 하는 연애와는 다른 연애를 한 것이지요. 그 사람은 저의 ‘엄마’ 같은 존재였습니다. 저는 그 사람만 보며 일상을 살아왔고, 추억을 만들었으며, 미래를 계획했습니다.  



엄마 같은 모습만 원했다.

저는 주변에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나눌 상대가 없었습니다. 저는 가족과 잘 연락하지 않고, 따로 나와 살고 있으며, 제 각별했던 친구들은 결혼하여 각자의 가정을 꾸렸기 때문이지요. 그렇다고 예전처럼 연락 어플을 붙들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제게 있어 그것이 충동을 자극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거니와, 교제 중인데 어찌 또 그러겠습니까) 일이 끝나면 집에 돌아와 여자 친구가 연락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한 시간 넘도록 대화를 나누는 것이 그날 하루를 버틴 보상이었던 것이지요.  


그 사람은 저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줬고 대꾸해줬으며 제 말이 끝나면 저를 위로해주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에게 자신의 하루는 어떠했는지 이야기할 여유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제가 그런 대화의 문화를 만들어서일까요.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내가 말하는 도중에 그 사람이 치고 들어와 자신의 이야기를 충분히 할 수 있었을 거라는 핑계는 대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없는 상냥한 사람이라는 것을 저는 알고 있었으니까요.


저는 여자 친구가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정서적으로 의존할  있는 ‘엄마 필요로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사람을 그렇게 활용했고요. 엄마가 없는 제게는, 그리고 어머니가 계셨던 과거에도, 제 평생 저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줬던 사람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많이 사랑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와서야 저는 나 자신을 돌봐주는 그사람의  모습만을 사랑했고, 그 사람  자체로는 사랑해주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결국 날 돌봐줄 책임이 없는, 나의 ‘엄마’가 아닌 그녀는 제게서 떠났습니다.


그래서 죽도록 아픕니다. 아, 아팠습니다. 3일간은 죽어라 아파했습니다. 심장이 통째로 날아가 버린 기분이었으니까요. 여러분이 평생 자신의 것이라 생각했던 것을, 그것도 자신의 뜻대로 잘 따라주던 사람이(예로 엄마) 갑자기 떠나버렸다고, 영영 다시는 돌아오지 않고 내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고 상상해보십시오. 아마 죽을 듯이 아플 것입니다.



이제는 버려야 하는 고통 회복 루틴

이렇게 힘들 때, 일상을 버텨낼 재간이 없게 되면 제가 하는 루틴이 있었습니다. 이건 과거 이야기입니다. (그렇다고 그리 오래된 과거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것은 빠른 보상을 주는 것들을 찾아내서 그것을 붙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냥 하루 종일 게임을 하고, 영화를 보고, 술을 마시거나, 친구들을 찾아가서 만나고 하는 그런 것들이요. 아니면 아픈 기억이 떠오르는 장소에서 벗어나도록 낯선 곳을 걸어 다니거나 제주도로 훌쩍 여행을 떠나버리곤 했습니다.   


위의 방법들이 평소 마음이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지와 절제력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금방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말이지요. 하지만 저 같은 의존적인 사람에게는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고통을 잊기 위해 붙잡은 것들에 쉽게 중독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일상으로 더 복귀하기가 어려워지고, 새로운 문제가 차곡차곡 쌓여가게 됩니다. 이런 악순환을 지속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 더 나은 오늘과 내일을 만들어야지요.


그래서 저처럼 의존적인 사람들이 이별을 겪었을 때, 어떻게 이별에 대처하면 좋을지 저에게, 그리고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완벽한 답안은 아니지만 도움이 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럼 시작하지요.

 



1. 건강하게 슬퍼하기

이별과 같이 물리적으로 해결법을 찾을 수 없는 고통을 마주했을 때, 그것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진심으로 슬퍼하는 것입니다. 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고 말입니다. (이것은 잠시 뒤에 말씀드리지요) 이 부분이 힘이 드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중요하기에 첫 번째로 말씀드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시련의 고통에서 회피하고자 이별에 대해 생각지 않고, 외적인 활동으로 일상을 가득 채우려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시간이 해결해주고, 아픔이 잊혀지기를 바라지요. 또 그럴 때 보면 약간은 붕 떠있는 듯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중심은 슬픔인데,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니 마음에 괴리가 일어날 수밖에요.  


잊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치킨집 앞에서 치킨냄새를 맡으며 치킨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잊으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기억들이 더 생생하게 올라와 심장을 후비게 되는 것이지요. 건강하게 슬퍼하는 것은 이것과는 다른 마음가짐입니다. 지금 이 순간의 아픔에 집중하는 것이지요. 나로부터 사랑하는 존재가 떨어져나간 느낌이 무엇인지, 혼자가 된 기분이 어떤 것인지 거기로부터 올라오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느껴보는 것입니다.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과거의 추억이나 미래에 대한 감상이 몰려오지 않도록 현재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림으로서 현재에 감정에 영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평소 어렸을 적의 추억을 떠올리면서 가슴앓이 해보신적 있지 않으신가요? 그렇다면 그것보다 더 가까운 과거인 연인의 추억을 떠올리면 가슴이 얼마나 더 미어질까요. 과거는 시간의 영향을 받지 않고 모든 에피소드가 동시에 밀려오게 할 수 있기 때문에, 감당할 수 없는 우울감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생각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별의 시기에는 미래를 더 낭만적으로 그리며 아쉬워하기 때문에, 연인과 함께 그렸던 미래를 상상하며 슬퍼하기 마련입니다. 허나 미래에 대한 상상은 끝이 없어도 정말 없습니다. 우리는 ‘이랬다면 이랬을 텐데’하는 아쉬움으로 애간장을 녹이는 스토리를 무한정 자아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별 당시에는 그 공상으로 인한 감정의 요동이 클 수밖에요. 우리는 이 딜레마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이별을 경험하고 있는 지금 순간에는 다른 시간의 우울과 아쉬움을 감당할 마음의 상태가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연인과 가까워 졌던 것은 다양한 에피소드를 통해 추억을 남겼기 때문이고, 함께 행복한 미래를 기대했기 때문인 것은 맞습니다. 그것들이 없었다면 이렇게 아플 수도 없었겠지요.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이것들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의도적으로 이것들을 극대화 시켜 자신을 ‘세상의 제일가는 비참한 사람’으로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슬픔을 느끼되, 상실로 인해 느껴지는 지금  순간의 진정한 마음의 소리를 듣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공감하고 슬퍼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도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 추억과 그에 대한 슬픔은 어쩔 수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그것이 그만큼 달콤했다는 증거라 할 수 있겠지요. 밀어내지 마시고 실컷 슬퍼하시고 달래주세요. 좋았던 만큼 아픈 거라고,  아픔 또한 마음을 썼던 나의 책임이라고, 아름다운 사랑해서  했다고. 그리고 이제는  사람 보내자고. 



2. 의식, 의지를 필요로 하는 활동하기

모든 것을 해도 타인으로부터, 그리고 자신으로부터 용서 받을 수 있는 시기가 있습니다. 바로 이별 직후입니다. 어떤 이는 심리학적 지식을 들이대며, 어떤 사람은 인터넷에서 얻은 정보를 가지고 ‘다 해도 괜찮아, 환기시켜’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 이 말과 이런 마음가짐은 궁극적으로는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의존적인 성향을 타파하지 않으면, 연인을 대신하게 되는 대체물에 의존적이게 되는 경향을 지니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 해도 괜찮다는 것에 해당하는 대부분은 되게 ‘자극적인 것’입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 게임을 실컷 하는 것, 술을 실컷 퍼 마시는 것, 친구들과 맛집을 가고, 카페도 가고, 놀이동산도 가고, 그곳에서 시끄럽게 떠들고 소리도 지르기도 하도, 또 저 멀리 여행도 떠나며 이별에 대한 고통에서 완전히 탈피하고자 하는 것 등의 일들이 해당하겠지요. 저는 이것들의 좋은 영향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분명 이것들은 이별의 충격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잠시 고통을 잊고 즐거움이나 쾌락을 누릴 수 있도록(현재에 느낌에 집중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하지만 이것들을 지속하면서 이별에 대한 아픔을 잊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방법입니다.


왜냐하면 첫 단락에서 말씀드린바, 우리는 의존적이며 연인이 우리 안에서 차지했던 비중만큼의 자리(거기에 슬픔까지 더해 더 큰 자리)를 쉽고 빠른 보상을 주는 자극적인 것들로 채우려 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잊으려고 무엇인가에 중독될 필요까지는 없지요. 게다가 빠른 보상을 주는 것은 대체적으로 습관화되기가 쉽습니다. 또 이것이 추가적인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데, 자극으로서 이별에 대한 아픔을 잊으려 하다가 그것이 습관이 되어 더 이상 이별을 잊을 수 있는 정도의 자극을 주지 못하게 되는 경우입니다. 이럴 경우 안 좋은 습관은 안 좋은 습관대로 생겨나고, 슬픈 마음 또한 제대로 처리 못하게 되는 불상사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힘든 순간일수록 여러분의 의지를 십분 활용할 수 있는 일을 찾아 그것을 하기를 권유 드립니다. 저 같은 경우는 글쓰기가 그렇습니다. 저는 평소 글 쓰는 것을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생각 없이 막 후려갈기지는 않습니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무엇을 써야 하는지 생각해야 하고, 거기에 내러티브를 입혀야 하며, 독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다듬어야 합니다. 숨 쉬듯 쉽게 되는 일이 아니지요. 컨디션이 좋아도 글 쓰는 것이 귀찮고 힘든 날이 있습니다. 이렇게 의지를 발휘해야 하는 일에 집중하다보면, 저의 마음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어 감정 정리도 잘 됩니다.


의지를 십분 활용할 수 있는,
 여러분의 의식이 생각습관에 끌려 다니지 않게 해주는
그런 일은 무엇인가요?  



3. 과감히 버리기

위의 1번과 2번의 절차를 잘 밟고 계시다면, 이제 버릴 시간입니다. 주변에 그 사람에게 받은 물건이 있다면, 그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소품이 있다면 싹 다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너무 비싸서 버리기 아깝다면, 중고로 팔아도 되고요. 다만 소중한 추억이 있기에 절대 버릴 수 없는 물건이 있으시다면, 그것만큼은 절대 버리시기를 권유 드립니다. 이 버리는 과정의 의의가 바로 그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버리는 과정의 핵심은 ‘마음을 비움 있습니다. 그 사람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포기 해버리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갔습니다.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잘 지내든, 못 지내든 이제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그냥 마음에서 버리십시오. 혹시나 상대가 돌아올까 기대하지 마시고, 당신이 더 잘 사는 모습을 보이며 복수하려고도 마십시오. 앞선 생각이 드는 이유는 상대를 마음에서 완전히 놓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완전히 헤어졌다고 할 수 없지요. 그 사람의 존재는 떠났지만, 그림자가 당신 마음속에 남아있으니까요. 그리고  그림자는 당신을 계속해서 괴롭힐 것입니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려 애써 노력할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너무 못 살아서 그 사람이 나를 불쌍히 여기면 어떡할지, 내가 너무 잘 살아서 그 사람이 아쉬워하고 슬퍼하면 어떡할지 등의 생각도 필요 없습니다. 이제 그 사람은 당신에게 아무 사람도 아닙니다. 당신은 그 사람이 없는 당신의 삶을 건강하게 가꿔나갈 스스로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이제 그 상대(그림자)는 그 책임의 걸림돌입니다. 걸림돌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사람에 대한 아쉬운 기억들을 마음에서 완전히 버리고 나면, 당신은 해방감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버렸음에도 슬프고 고통스럽다면, 아직 미련과 감정이 남아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려움이 멈추지 않는다면 앞선 1번과 2번을 그리고 과감히 버리는 것을 반복하시면 됩니다.


주변 가까운 사람들과 여러분의 고통을 나누는 것도 좋습니다. 허나, 상대에게 과한 위로와 공감을 기대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반복될수록 타인은 힘들어지고 결국 당신은 타인에게 실망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고통을 100%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 하나뿐입니다. 고통은 자신의 몫입니다. 정말 힘들어 죽을 것 같은 때는 타인과 고통을 나누며 고통을 짊어지는 방향을 잡아갈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계속할 수는 없습니다. 도움을 통해 좋아진다면, 아픔을 회피하지 말고 마주해보십시오. 그 아픔은 시간이 지나면 당신의 마음을 더 단단하게 해줄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버티기 위해 노력하는 당신을 응원합니다.  


슬픔은 작별을 고하고 상실을 슬퍼하는 에너지다. 인생은 이별의 연속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작별을 고하며 성장의 주기들을 끝마쳐야 한다.
애통과 슬픔은 과거를 끝낼 수 있는 에너지를 준다.
유년기에 작별을 고하는 것은 학교에 가게 되는 잠복기로 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학교에 작별을 고하는 것은 사회에 나가서
자기의 길을 개척하고 자리를 잡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성장하려면 계속해서 죽고 다시 태어나야 한다.

슬픔은 '치유의 감정'이다.

<<The Familiy>> p.103 - John Bradshaw


추신 - 이 글은 심리학적 전문 글이 아닙니다. 따라서 극심한 고통으로 일상을 버티기가 어려우신 분이나, 트라우마로 인한 쇼크로 힘들어하시는 분께서는 가까운 신경정신과나 심리상담 센터를 찾아가시기를 권유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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